
660년 7월 18일
백제 최후의 보루인 웅진성(고마나루)이 함락당한다
망국의 군주 부여의자는 치욕스럽게
신라의 왕에게 술을 따라야 했고
당은 부여씨 왕족들과 12,000명의 백제인을 포로로 잡아
당나라의 수도 장안으로 압송시켜버린다

문제는 당나라놈들이 백제의 수도 사비성을 약탈 할 때
도를 넘을 정도의
학살, 강간, 방화 등의 패악질을 부렸고
이를 똑똑히 본 사비성 생존자들이
백제 전역으로 퍼져서
이 참상을 백제 전역에 알렸다.
심지어 백제인들을 모두 죽이고 빈 땅을 신라에게 준다는
괴소문까지 돌자 백제의 민심은 급격히 반당, 반신라로 기운다
이에 웅진성이 함락된 지 겨우 1달만인 660년 8월
살아남은 백제 최고위 각료인 좌평 정무 아래
복신과 승려 도침, 부여자신이
백제 지방군을 규합해 고토 회복을 외친다

여기에 고구려는 신라 정예 군단이
백제 땅에 묶여 있는 틈을 타서
한강 일대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가했고
이를 틈 타 백제부흥군은 무려 200개의 성을 탈환한다

여기에 백제와 혈맹 관계였던
일본이 전격 개입하는데
백제가 망하면 신라가 일본 공격 하는 거 아님??
라는 로직회로가 돌아간 사이메이 천황은
일본군의 대규모 병력 파병을 약속했고

일본에 체류하던 백제의 왕자 부여풍과
소규모 일본 원정군을
선발대로 백제 부흥군과 합류시킨다

여기서 백제 부흥군은 당나라군 1천명을 죽이고
웅진성을 함락 직전까지 몰았다
또한 사비성을 포위하며
백제 주둔 당나라 군의 보급을 완전히 끊어버린다
이 시점에서 당은 백제 주둔군을 한반도에서
뺄 생각까지 할 정도로
당나라를 절체절명의 상황까지 몰아가는데 성공한다
여기까지는 아주 좋았다
문제는 백제 본토 병력을 이끌던 복신과
일본 측의 지원을 받던 백제왕자 부여풍 간의
갈등이 격화된 것

게다가 부여풍이 임시 백제 국왕으로 즉위하는 과정에서
일본 천황에게 책봉받는 식으로 진행했는데
당연히 이 주군 역전 세계를 실시간으로 지켜본
복신과 백제 장수들은 피가 거꾸로 솟았고
이건 광개토 대왕에게 쳐맞는 시절에도 한 적 없는 대굴욕이었기에
백제 부흥군 지휘부는 그야말로 분열 직전까지 간다
복신은 일단 창립 멤버였지만 갈등을 벌이고 있던 승려 도침을 죽이고
부여풍마저 죽이려다가 실패하고
결국 자기가 부여풍에게 죽임을 당하는 자충수까지 둬버린다


실제 귀실복신이 남긴 유언
문제는 초기 부흥운동을 지휘하며
명성을 얻은 복신에 비해
(백제인들 입장에선) 왜국에서 온 듣보잡
+ 일본왕실에 굴종 외교 시전한 부여풍의 인기가
처참할 정도로 없던 것
이렇게 백제 부흥군의 사기 하락과
지휘부 간의 갈등으로
지휘체계가 붕 떠버린 순간
신라는 나당 연합군의 보급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대전 지역의 요새를 모조리 함락시켜
나당연합군을 계속 괴롭히던 보급로 교란을 완전히 해결한다
이에 장기화 될 수록 백제의 전황이 불리해진다는걸 깨달은
부여풍은 결국 일본에 SOS를 요청한다

부여풍
솔직히 이제 백제 부흥군만으로는
이거 판 못 뒤집는다

덴지 천황
아 뭐요??! 또 병력 땡겨달라고요?
엄마(사이메이 천황)가 많이 도와주래서
여태까지 빛내서 존나 도와줬잖슴

부여풍
지금 님들 영토 곳곳에 우리 유이민 존나 많은 거 알죠?
만약 여기서 내 부탁 거절하면
걔네가 어떤 포지션을 취할까요?

덴지 천황
진짜 엄마 생각해서 마지막 영끌해준다 내가!
어휴 이래서 지장 잘못 찍으면 안되는데
부여풍의 마지막 구원군 요청을 받은 덴지 천황은
일본 역사상 최초로 대규모 원정군인
27,000명의 병력과
백제계 도래인들이 건조한 1,000척의 함선을
한반도로 파견하기로 결정한다
먼저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출병 사실을 전달해 군사적 협의를 가지고
기습적으로 경남 김해, 의령을 공격해 함락시킨다

그러나 얘들은 사람 한 명 잘못 건들게 된다
무려 신라의 수도 경주 근방까지 도달한 일본군!
그러나 이미 의자왕과의 나라삭제빵 전쟁을 수없이 한 신라는
코웃음 치며 여유롭게 막아내며 일본군 병력을 묶어놨고
서라벌에서 요양하던 김유신이 직접 움직이기로 결정한다
김유신은 차라리 이번 기회에 백제 반항의 씨를 말리기로 결정!
백제 부흥군의 수도 주류성을 박살내서 겜을 끝내기로 한다
국왕 문무왕과 김유신이 직접 이끄는 5만 병력과
삼국통일전쟁의 역전의 영웅 + 유망주들을 모조리 긁어모아 주류성으로 간다

일단 나당연합군은 편제를 둘로 나눠서
주류성을 포위하고 백제부흥군의 공격을 막을
육군 쪽의 신라
바다쪽에서 일본 수군을 막을
수군 쪽의 당으로 나뉜다
여기서 특이사항은 당 수군에 장안으로 끌려간
또다른 백제 왕자 부여융이 있다는 것인데
아무래도 백강 하구의 밀물, 썰물 같은 지리적 정보 제공으로 추정된다

부여융 VS 부여풍
망국의 두 왕자들간에
형제의 전쟁이기도 했다
백제 부흥군 역시 주류성이 뚫리면 사실상 찐 멸망이기에
가용할 수 있는 모든 병력을 긁어모았고
일본 역시 기존에 파견했던 5천 병력
카미츠케노노키미 와카코의 2만 7천 병력
이오하라노키미 오미의 수군 1만 병력 등
최대 4만 2천명을 파견했고
심지어 탐라국 역시 이에 호응하여 소규모 병력을 보낸다

663년 8월 17일
백강 하구에서 도합 10만명이 넘는 한,중,일의 대병력이 격돌한다
여기서 신라가 절묘한 선빵을 때리는데
일본 수군 예상 상륙지에 진을 친 부여풍의 근위대를
신라군이 싹 밀어버려서
일본 수군의 상륙을 사전차단 해버린 것
일본 수군의 상륙을 틀어 막은 덕분에
나당 연합군은 여유롭게 육상- 해상에서 주류성을 포위할 수 있었고
마음이 급해진 일본 수군은 8월 27일 선공을 때린다

조급해진 부여풍은 직접 백제군-일본군
두 나라의 연합 수군을 이끌며
당 수군에게 정면으로 들이박는다
그러나 이는 당 수군의 훼이크였다
일부로 중앙을 열어주는 척하면서 양측을 완벽히 포위한 당군
당 수군은 백제-일본 선단을 완전히 포위하고
바람을 따라 불화살을 날려 화공을 건다

이에 일본 선단은 어떻게든 빠져나가려 뱃머리를 돌리지만
설상가상 물 때도 안맞아서 먼 바다로 나갈 수도 없는 상황
이후 말 그대로 전장은 진짜 피비릿내 나는 도살장으로 변했고
맑디 맑았던 백강은 피로 붉게 물들여진다
※ 일본서기, 신당서 모두 바다가 피로 붉게 물들었다고 서술

부여풍은 탈출에 성공했지만 모든 병력을 잃어버려서
고구려로 도망가버린다
결국 흑치상지, 사타상여가 이끄는 기동부대는 당에게 항복하며
동아시아 최초의 대규모 국제 해상전인 백강전투가 끝난다
백제군의 지휘부, 주력부대가 모두 주류성과 백강에서 소멸되었기에
사실상 이 시점에서 백제 부흥군은 멸망한다
이 때 수많은 백제인들이 멸망을 통감하며 일본으로 건너가는데
660년 ~ 663년에 걸쳐서
무려 백제사람들 20만명이 넘어 간 것으로 추정될 정도

아무튼 일본으로 간 백제 유민들은
규슈, 관서 지방 이곳저곳에 리틀 백제?를 만들어서 살아갔는데
그래서 오사카 근방엔 일본에서 백제를 부르던
'쿠다라'라는 지명이 꽤 많이 남아있다
그러나 삼국통일전쟁 내내 피로 피를 닦는 골육상쟁이
계속된 관계다 보니, 신라는 백제를 완전히 포용하지 못한다
몇백년동안 구 백제 지역의 사람들은
백제 유민의식을 잃어버리지 않았고
결국 신라가 망해갈 때, 이들의 유민의식은 다시 폭발한다

그리고 이들을 이용해 다시 백제를 부흥한 사람이 바로 신라인 견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