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근원을 따라가다 보면 박해영의 인물들이 치부를 건드리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닿는다. 황동만처럼 타인의 기분을 고려하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쏟아내고, 박경세처럼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자신이라고 여기며, 변은아처럼 타인을 한 덩어리로 묶어버리고 자신만은 예외라고 생각하는 나를 발견하게 만든다.
이 지점은 <모자무싸>의 기획 의도를 떠올리면 더욱 선명해진다. 박해영 작가는 “큰 해를 끼치진 않지만 만나면 불편한 사람들”을 관찰하다가 그들에게 “나는 특별한 존재라고 몸부림치는 것”이라는 공통점을 있다는 걸 발견한다. 그 몸부림을 보는 게 왜 민망한지도 따라가 보니 자신의 모습이어서 그랬다는 걸 깨달았다고 한다. 황동만은 그 자각에서 출발한 인물 이다.
<모자무싸>의 인물들과 자신이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이것이 박해영식 위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그저 감정 상태를 펼쳐 보인다. 행복해지라고, 슬픔에서 벗어나라고 설득하진 않는다. ‘어떤 상태가 돼라’는 요구가 지금 시대의 시청자에게는 부담이 될 수 있다는 걸 그는 아는 듯하다. 대신 자세히 보여준다. 파악할 수 없어 답답했던 감정 덩어리를 하나씩 해체하고, 그것에 정확한 이름을 붙인다. 네가 지금 느끼는 것은 질투이고, 허기이며, 불안이라고. 정확하게 아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안도감을 준다는 사실 역시 그는 알고 있는 듯하다.
이런 점에서 박해영은 감정을 회피하지 않는 작가다. 아직 베일에 싸인 ‘감정 워치’는 박해영식 위로를 더 강력하게 전달하는 장치로 기능할 것이다. 종종 ‘알 수 없음’이 뜨는 황동만과 변은아의 워치에 감정들이 명확한 단어로 표시될 때마다 불편함 속에서도 묘한 해방감을 느낄 거라고 예상한다.
황동만이 말하는 황동만을 기다리며
밉상이긴 해도 황동만은 궁금한 인물이다. 4화까지 황동만은 주로 타인의 입을 통해 만들어진 이미지로 시청자에게 전달됐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도망치지 않았다. 20년간 숨 쉴 때마다 자신의 무가치함을 느끼면서도 “망가져 나를 증명”하며 견뎌왔다. 실패한 황동만, 구제불능의 황동만. 그러나 그에게는 ‘버티는 파워’가 있다. 또 다른 파워는 ‘느낄 줄 아는 파워’다. 호감을 느끼는 은아에게 반찬통을 받고 기뻐서 날 듯이 춤을 추고, “왜 영화를 하느냐”는 질문에 왈칵 눈물을 쏟는 사람. 세상을 향해 자기 이름을 외칠 에너지가 마르지 않는 사람이다.
그의 생동감과 생명력을 알아본 변은아와의 관계가 진전되기 시작하면서 <모자무싸>는 황동만에게 성장 서사의 주인공이 될 기회를 주려는 듯 보인다. 앞으로 그가 직접 말하고 보여줄 인생은 무엇일까. 그가 선언했듯 그의 미래에는 “빛나는 진실”이 있을까. 그에게 느끼는 이 불편함은 어떤 방향으로 향하게 될까. 이제 남은 것은 하나다. 황동만이 자기 목소리로 자신을 증명하는 순간을 지켜보는 일이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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