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3/0003974960?sid=103
한예종 광주 이전 논란인데
왜 지방엔 문화산업 인프라 없나
지방 몰락은 공간 분업의 결과
균형발전 담론을 바꿔야 한다

28일 오후 서울 성북구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 석관동 캠퍼스에서 방세희 한예종 총학생회장이 ‘광주 이전 법안 발의 학생사회 반발 성명 발표’를 하고 있다. /강정아 기자
지난달 22일 광주광역시 국회의원들이 발의한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 광주 이전 법안은 뭇매를 맞았다. 별다른 인프라가 없는 지역에 한예종을 보내겠다는 정치 논리라는 비판이었다. 상당히 수긍이 가는 논리였다. 대학교 하나 내려보낸다고 지역의 문화산업이 활성화되지는 않는다. 수도권의 인적 네트워크에서 지리적으로 단절되면 대학이 제 기능을 하기 어렵다는 예측은 설득력 있다.
그런데 비판자들이 제시하는 논리가 바로 문제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수도권 밖 지방이 죽어가는 이유는 문화산업 같은 고부가가치 서비스업이 성장할 수 없는 여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예종 자리에 다른 고부가가치 서비스업, 인간의 지식과 창의성이 중요한 산업과 관련된 공공기관을 가져다 놓아도 비판 논리는 비슷하게 전개될 터이다.
산업화가 시작된 이래로 서울은 줄곧 ‘머리(구상 노동)’ 역할을, 지방은 ‘손발(실행 노동)’ 역할을 각각 맡았다. 한국이 선진국에 진입하고, 부가가치에서 직접 생산이 차지하는 몫이 줄면서 지방 경제도 가라앉게 됐다. 부산·울산·경남에 있던 연구소들이 대거 수도권으로 옮겨오는 등 이제 서울은 유일한 ‘머리’의 역할을 맡기 시작했다. (중략)
한예종 이전 법안에 대한 격렬한 비판을 보면서 지방 사람들이 적잖이 불편한 건 이 때문이다. ‘수도권의 배운 분들’이 대안으로 제시하는 공장 이전이나 대규모 예산 지원으로는 지방을 살릴 수 없다. 제조업만 해도 상품을 만들고 판매하는 것에서 벗어나 연구개발·디자인·유지보수·각종 컨설팅 등에서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서비스화’가 급속히 진전되고 있다. 전현배·허정 서강대 교수는 2008~2013년 한국 제조업체를 분석한 결과, 해외에 생산 기지를 두고 수출입을 병행할수록 서비스화가 더 심화했다고 지적한다. 지방에 내려갈 만한 공장 수는 줄고, 제조업체들은 다양한 분야의 고숙련 인력을 필요로 한다. 최근 반도체 공장 이전 논쟁이 보여주듯이, 첨단 산업의 지방행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또한 성장률이 높고 일자리를 창출하는 신산업은 예외 없이 고부가가치 서비스업 비율이 높다. 중소벤처기업부가 선정한 12대 신산업 분야가 AI 모델 및 인프라, 콘텐츠, 헬스케어, 첨단 제조, 보안·네트워크·양자 등인 게 현실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지난해 12대 분야 벤처 투자의 79.1%가 수도권에 몰렸다.
지역의 정주 여건도 서비스업과 떼어놓을 수 없다. 좋은 식당과 카페, 공연장과 갤러리, 다양한 사람을 만날 기회 같은 어메니티(편의 환경)가 결정적인 변수다. 어메니티는 공공이 만들어줄 수 없다. 지역 내에 일정 규모의 고부가가치 서비스업이 자리 잡아야 하는 이유다.
지방에 진짜 필요한 것은 반도체 공장이나 공공기관, 예산 폭탄이 아니다. 고부가가치 서비스업이 자생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 한두 곳이라도 충분하다. 고숙련·고기능 인력이 모여 살 만한 여건을 조성하고, 그들의 인적 자본을 바탕으로 새로운 산업이 성장하는 선순환이 일어나도록 해야 한다. 해외에서는 오스트레일리아 브리즈번과 같은 성공 사례가 여럿 있다.
한예종 이전이 무리수라는 비판은 일리가 있다. 하지만 서울 사람들이 지방의 절망을 들여다보고, 그곳에서도 한예종이 살아남을 토양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하면 좋겠다. 지방도 ‘선진국’에 걸맞은 산업 구조와 인적자본을 가지는 게 바람직하다. 그런 방안을 제시하지 않고, 지방의 탐욕과 어리석음만 규탄한다면 다른 형태의 서울 중심주의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