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박에 30만~40만 원을 호가하는 메리어트, 힐튼 등 미국 특급 호텔의 화장실에는 칫솔이 없습니다.
치약도, 면도기도, 슬리퍼도 기본 비치 품목이 아닙니다. 프런트에 요청해야 그제야 제공되거나, 일부 저가 호텔에서는 로비 편의점에서 직접 사야 합니다. 한국 여행객들이 가장 많이 당황하는 장면 중 하나입니다.
이 현상의 배경에는 단순한 절약이 아닌 치밀한 비용 계산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객실 1,000개짜리 호텔을 기준으로 보면, 칫솔을 매일 각 방에 비치할 경우 투숙객의 사용 여부와 무관하게 구매·교체·폐기 비용이 발생합니다. 포장이 훼손된 제품은 미개봉 상태로도 버려야 합니다. 하우스키퍼의 관리 인건비까지 포함하면 100%의 비용이 매일 반복되는 구조입니다.
반면 프런트에서 요청 시에만 제공할 경우 실제 받는 투숙객은 전체의 10%가 채 되지 않습니다. 미국인 대다수가 여행 시 개인 세면도구를 직접 챙기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비치를 없애는 것만으로 관련 비용의 90%가 절감됩니다.
기본값을 없애고 ‘옵트인’으로 바꾸는 전략...자본주의의 본질
이 구조를 ‘짠돌이 경영’으로만 해석하면 미국 자본주의의 본질을 놓치게 됩니다. 미국 서비스 산업은 오래전부터 기본으로 제공되던 것들을 하나씩 걷어내고, 필요한 소비자가 직접 요청하거나 추가 비용을 지불하게 하는 방향으로 진화해 왔습니다. 이른바 ‘옵트인(Opt-in)’ 전략입니다.
항공업계가 대표적입니다. 수화물 위탁은 과거 기본 서비스였지만 현재는 유료입니다. 좌석 선택, 기내식, 담요까지 개별 과금하는 ‘언번들링(Unbundling)’ 방식이 산업 표준이 됐습니다.
외식업계에서도 무료 음료 리필이 사라지고 있죠. 케첩·소스를 별도 청구하는 패스트푸드 체인도 등장했습니다. 구독 서비스 역시 무료 혜택을 앞세워 가입자를 확보한 뒤 유료로 전환하는 패턴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서비스의 기본값이 조용히, 그러나 광범위하게 내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최근에는 ESG가 이 전략에 강력한 명분을 더해주고 있습니다. 캘리포니아주는 2019년 가장 먼저 관련법을 제정했고, 뉴욕주는 2025년 1월 1일부터 50실 이상 호텔의 소형 일회용 플라스틱 용기 비치를 금지했습니다. 워싱턴주는 2027년 시행을 앞두고 있으며, 일리노이주도 유사한 법안을 검토 중입니다.
메리어트는 이 흐름에 가장 발 빠르게 대응한 체인으로 꼽힙니다. 메리어트 측은 소형 병을 대용량 펌프형 용기로 교체할 경우 연간 약 5억 개의 소형 용기가 매립지로 향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비용 절감과 친환경 이미지 제고를 동시에 달성하는 구조입니다.
정말 비싼 호텔은 칫솔이 나온다…어메니티는 브랜드 경험
미국의 모든 호텔이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은 아닙니다. 어메니티(편의용품)의 유무는 지갑의 두께에 따라 명확하게 나뉩니다.
포시즌, 리츠칼튼, 만다린 오리엔탈 등 최상위 럭셔리 호텔들은 여전히 풍성한 어메니티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어메니티는 소모품이 아닌 브랜드 경험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향수 브랜드와의 협업 제품, 전용 패키지 디자인, 고급 목욕 소금까지 이 모든 요소가 1박에 수십만 원을 더 받을 수 있는 가격 정당화의 근거가 됩니다. 이 구간에서 어메니티를 없애는 순간 가격 경쟁력 자체가 흔들립니다.
반면 메리어트 코트야드, 힐튼 가든 인, 하얏트 플레이스 등 중간급 브랜드가 어메니티 축소의 최전선에 서 있습니다. 이 구간 투숙객들은 가격 대비 실용성에 민감하고, 어메니티보다 와이파이 속도나 조식 구성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호텔 입장에서는 불만 제기 가능성이 낮고 가격만 맞으면 재방문하는 이 구간이 비용 절감을 적용하기 가장 용이한 시장입니다. 최상위 소비자에게는 모든 것을 제공하되, 중간 이하 소비자에게는 기본값을 낮추는 것은 미국 자본주의가 서비스 시장에서 작동하는 방식입니다.
한국에서도 점점 칫솔 없다...태평양을 건너온 자본주의
이 흐름은 더 이상 미국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한국에서도 자원재활용법 개정안에 따라 2024년 1월 1일부터 객실 50개 이상 숙박업소에서 일회용 칫솔·샴푸·린스·면도기 등 5종의 무상 제공이 전면 금지됐습니다.
롯데호텔은 시그니엘, 롯데호텔 서울, L7 등 전 체인에 친환경 칫솔과 대용량 다회용 디스펜서 도입을 완료했고요. 조선호텔앤리조트, 파르나스호텔, 신라호텔도 잇따라 다회용기로 전환을 마쳤습니다.
한때 특급호텔의 차별화 요소였던 딥티크, 몰튼 브라운, 바이레도 등 명품 브랜드 어메니티는 이제 요청하거나 별도로 구매해야 하는 품목이 됐습니다.
명분은 환경 보호이지만, 효과를 둘러싼 논란은 가라앉지 않고 있습니다. 한국 현장에서는 무상 제공이 금지된 이후에도 유료로 일회용품을 구입해 쓰는 고객이 많아 규제의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일회용품 소비 자체가 줄어든 것이 아니라 비용 부담이 호텔에서 소비자에게로 이전된 것에 불과하다는 지적입니다.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대용량 디스펜서의 위생 관리 수준과 고급 브랜드 제품이 실제로 채워지는지에 대한 소비자들의 의구심이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 냉정한 사실은요. 소비자가 ‘당연하다’고 느끼는 것은 기업 입장에서 반드시 제거해야 할 비용입니다. 칫솔이 원래부터 호텔 방에 있던 것이 아니었듯,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는 서비스들도 영원히 보장된 권리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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