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살, 엘리베이터에 사람이 타면 엄마 뒤로 숨을 만큼 수줍음 많던 소녀. 그 수줍음을 이겨내려 시작한 연기는 소녀 안에 잠들어 있던 재능을 깨웠다. '헥토파스칼 킥'을 날리던 초등학생('단팥빵')에서 신들린 욕설을 뱉던 전라도 전학생('써니')을 지나, 칠순 노인의 영혼을 품고 "워뗘, 후달려?"라며 능청스럽게 허벅지를 내보이던 스무 살('수상한 그녀')까지. 배우 심은경은 언제나 예상한 범주를 훌쩍 벗어난 나뭇가지처럼 자유롭게 뻗어 나갔다.
그런 그가 6년 만의 드라마 복귀작 tvN '대한민국에서 건물주 되는 법'(이하 '건물주')에서 다시 한번 제 얼굴을 비튼다. 이번엔 회춘도, 빙의도 아니다. 가장 말간 얼굴로 가장 잔혹한 파멸을 설계하는 대부업체 행동대장 요나다.
우리는 흔히 선한 얼굴에서 선한 의도를 기대한다. 심은경은 이 보편적인 심리를 이번 '건물주'에서 영리하게 이용한다. 극에서 요나가 보여주는 공포는 역설적이게도 그가 가진 무해한 마스크에서 기인한다. 가죽 재킷이나 거친 문신 대신 화장기 없는 깨끗한 얼굴과 단조로운 표정을 취한 것이다. 피투성이가 된 사내 앞에서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라고 나직이 묻는 목소리는 마치 오늘 점심 메뉴를 묻는 것처럼 일상적이고 차분하다.
심은경은 과거 '수상한 그녀'에서 노인의 영혼을 제 몸처럼 입었듯, '건물주'에선 악(惡) 그 자체를 본연으로 받아들인 건조한 공기를 입었다. 길가의 달팽이를 소중히 옮겨다 주는 기괴한 자애로움과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살인을 저지르는 냉혹함이 한 몸에 공존하는 요나는, 심은경의 투명함과 만나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서스펜스가 됐다.
아역부터 시작해 어느덧 연기 경력 20년을 넘어선 심은경은 이제 캐릭터의 핏줄 하나까지 직접 설계하는 베테랑이 됐다. 요나의 오른쪽 셔츠 커프스에 달린 '시계태엽 오렌지' 레퍼런스의 눈동자 장식은 그가 직접 제안한 디테일이다. 아이 같은 천진함과 광기 어린 잔혹함을 시각적으로 박제하고 싶었다는 의도다. 눈가에 붉은 음영을 더해 피폐한 분위기를 강조한 메이크업 역시 무해해 보이기에 더 무서운 요나만의 독보적인 분위기를 완성했다.
본래 남성으로 설정됐던 요나를 여성으로 바꾼 임필성 감독의 선택은 신의 한 수가 됐다. 근육질 남성의 물리적 폭력보다 가녀린 체구의 심은경이 무심하게 던지는 한마디가 간담을 더 깊게 파고들기 때문이다. '건물주' 4회 엔딩에서 상사 모건(미야비)을 잔혹하게 죽이고 책상 아래 숨은 김선(임수정)을 향해 다가가는 요나의 으슥한 기운은, 그가 왜 특정 타이틀에 갇히지 않는 배우인지를 증명한다.
누구보다 성실하게, 그러나 누구보다 분란하게 변주해 온 심은경의 필모그래피는 이제 '순수 악'이라는 새로운 지점에 닿았다. 스무 살의 그는 할머니의 영혼으로 866만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서른둘의 그는 요나라는 서늘한 얼굴로 안방극장을 얼어붙게 하고 있다. 담을 넘어 뻗어 나간 나뭇가지처럼 심은경의 연기는 여전히 어디로 나아갈지 모르는 생동감으로 가득하고 그래서 앞으로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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