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송경원
적절한 복수란 존재하지 않는다. 애초에 측정 불가능한 광기의 감정이기 때문이다. ‘복수를 할 땐 두개의 무덤을 파라’는 말처럼 복수는 근본적으로 자기 파괴적이고 소모적이다. 그만큼 제대로 된 복수를 달성하기 쉽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실상 복수를 통해 보상되거나 회복되는 건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최소한 두 가지 효용에 눈이 멀어 복수를 갈망한다. 하나는 감정의 분출이다. 사적 영역에서 복수는 회복과 치유라기보다는 증오의 발산과 분노의 해소에 가깝다. 이런 이유로 복수는 언제나 넘치거나 모자랄 뿐 정확히 계산될 수 없다. 그나마 근사치에 도달하는 유일한 길은 원시적인 형태의 정의, 바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일대일 대응이다. 이 순간 복수는 사적 감정에서 공적인 기능으로 치환된다.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다는 최소한의 정의. 언젠가는 대가를 치른다는 사회적 안전장치(혹은 경고)라 해도 좋겠다.
<더 글로리>의 복수는 나름 합리적으로 보인다. 들끓는 감정에 매몰되었다면 <악마를 보았다>식의 끔찍한 폭력과 파괴도 가능했겠지만 그 끝에 남는 건 폐허뿐이다. 대다수 복수물은 폭력을 향한 공허한 페티시에 가까운데 <더 글로리>는 이 함정을 영리하게 피해간다. 대신 <더 글로리>가 원한 건 납득되는 복수와 그로 인한 최소한의 정의, 받아들일 수 있는 해피 엔딩이었던 것 같다. 동의한 적 없는 어설픈 용서로 적당히 마무리하지도, 넘치는 증오와 폭력에 몸을 맡기지도 않는 동은(송혜교)의 복수는 납득 가능한 선에서 영리한 결말을 내놓는다. 장대하고 합리적이며 치밀한 복수극에 나름 만족하며 박수를 보내다 문득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영리하고 합리적인 복수라는 게 가능한 일인가. 애초에 통쾌한 복수라는 게 성립하는가. 이 복수가 통쾌함을 제공하는 대상은 누구인가.
동은은 가해자들에게 손쉬운 물리적 징벌이 아닌 각자의 죄에 맞춘 복수를 설계한다. 연진(임지연)의 곁에서 모두를 떠나게 만들어 영혼을 파괴하고, 재준(박성훈)의 두눈을 멀게 하고, 사라(김히어라)의 조롱하고 망가뜨리던 손을 부수고, 남의 불행에 크게 웃던 혜정(차주영)에게서 목소리를 앗아가고, 남의 고통에 앞장서던 명오(김건우)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 얼마나 적절하고 합리적인 징계인가. 그 속 시원한 전개에 눈이 멀어 간과하는 것이 몇 가지 있다.
우선 동은의 복수는 그다지 치밀하지 않다. 이 복수극의 작동 원리와 결정적인 고리들은 가해자들을 향한 믿음에 근거한다. 그들이 여전히 악인이고 반성하지 않으며 일말의 부끄러움도 느끼지 않을, 개선과 정상참작의 여지가 없는 종자들이라는 사실. 동은이 판을 깔면 가해자들은 서로를 물고 뜯으며 알아서 지옥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 순간 동은의 행위는 단순한 죄의 징계 이상의 정당성을 획득한다. 동은의 복수는 감정의 발산과 해소라기보다는 개선되지 않는 현실의 어둠을 향한 증명이다. 시간이 지나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고 나쁜 놈들이 더 잘사는 비틀린 현실을 향한 수정이라고 해도 좋겠다. 잘못을 바로잡고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선 감정보다 이성이 필요한 법이다.
그런 만큼 동은의 복수는 관조적이다. 동은은 감정의 열기를 누르고 기계처럼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이것은 동은의 통쾌함, 감정적 해소를 위해 설계된 판이 아니다. 차라리 죄의 형태에 의미를 맞춘 일종의 제의(祭儀)에 가깝다. <더 글로리>는 학교 폭력이라는 침묵과 악의, 부조리를 향한 사회적 살풀이판이다. 여기서 진정 통쾌한 건 동은이 아니라 이를 지켜보는 우리다. 동은의 행위가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가해자들이 스스로 증명해줌으로써 그들에 대한 사적 단죄는 기꺼이 허용된다. 동은에게 사주받은 무당이 또 다른 희생자인 소희의 벌전을 받고 쓰러지는 순간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이 장면은 마치 치밀한 복수극인 듯 보이는 이 작품이 실은 어떤 믿음과 에너지에 기대고 있는지를 여실히 드러낸다. 동은의 복수극은 초월적인 영역, 초현실적인 힘, 적어도 그에 준하는 한 개인의 집념의 산물이다. 이는 언뜻 모든 희생자들을 위한 위로처럼 다가오지만 한편으론 현실에서의 복수가 얼마나 초현실적인 일인지를 역설하는 순간처럼 보이기도 한다.
<더 글로리>는 현실의 모든 희생자들을 향한 위로의 굿판이자 잠재적 가해자들을 향한 경고의 메시지다. 이야기를 통해 공적 정의의 구현이라 해도 좋겠다. 사회적 공분을 일으켰던 <도가니>처럼 순기능도 있을 것이다. 분노는 빠르게 퍼지고 정의가 세워지는 순간은 더없이 달콤하다. <도가니>가 (설사 그것이 의도가 아니었다 해도) 분노의 확산에 기대 사회의 변화를 유도했다면 <더 글로리>는 함무라비법전에 근거한 최소한의 (그리고 원시적인) 정의 구현을 통해 통쾌함을 제공한다.
하지만 호러영화의 클리셰를 빌려 상황을 단순화했던 <도가니>처럼 그로 인해 가려지고 지워지는 것도 적지 않다. 나는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분노의 총량이 정해져 있다고 믿는다. “권력형 폭력은 추상적이어서 잘 포착이 안된다”는 김갑수 평론가의 발언이 또 다른 공분을 사고 있는 것처럼 현재 우리 사회는 분명 노출이 많은 연예인들이 저지른 직접적 폭력에 더 예민하게 반응하는 중이다. <더 글로리>가 적극적으로 소비하고 해소하는 지점도 바로 여기다. 직접적인 가해와 폭력에 비해 잘 보이지 않는 구조적 불평등과 부조리에 상대적으로 관대한 건 어쩌면 당연하다. 직관적인 폭력은 훨씬 자극적이고, 다른 곳에 분노를 나눠주기엔 이를 통렬하게 징벌하는 복수극이 너무 통쾌하고 재미있다.
또 하나 시야를 교란하는 요소는 <더 글로리>의 매력적인 가해자들이다. 혜정의 몸, 사라의 패션, 재준의 유머, 연진의 뻔뻔함 등 끔찍한 사건의 가해자들의 태도가 불편하기는커녕 일종의 ‘밈’화 되어 거꾸로 재미있게 소비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들의 화려한 외양과 허영 넘치는 삶이야말로 실상 김은숙 드라마가 반복해서 소비하는 것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끔찍한 복수물이 폭력을 페티시한다면 <더 글로리>는 자본의 힘과 사회적 신분의 격차를 매력적으로 포장한다. 가해자들의 연대가 붕괴하는 것도 그들 사이에 경제적 격차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동은을 둘러싼 모든 남성, 조력자인 여정(이도현)과 복수의 도구인 하도영(정성일), 심지어 가해자 집단의 경제적 중심인 재준까지 모두 부유하다. 그들이 이 복수극에 얽히고설킬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의 부유함 덕분, 아니 부유함 탓이다. 기자회견에서 “가해자들을 지옥 끝까지 끌고 갈 돈이 있는 거다. 저한테는.”라는 김은숙 작가의 말은 섬뜩한 구석이 있다. 복수에는 돈이 든다. 그게 아니라면 인생을 통째로 바쳐야 한다. 대다수의 희생자들에게 복수는 꿈처럼 멀다. 미디어가 제공하는 꿈이 유난히 달콤한 이유다.
‘개새끼’와 ‘나이스한 개새끼’의 차이는 무엇인가. 천박한 졸부에 가까운 재준에 비해 하도영은 모든 면에서 월등하다. 재준이 직접 폭력을 행사한다면 하도영은 신사적으로 ‘나이스’하게 계급의 벽을 친다. 와인 맛도 모르는 비서가 눈치 없이 자신에게 우산을 좀 들어달라고 했을 때 비싼 와인을 가져가서 먹으라고 주면서 손절해버리는 그는 좋은 사람인가. 이 드라마에서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더 글로리>가 따지고 들어가는 건 죄의 여부니까. 하지만 개새끼라는 본질보다 ‘나이스함’이라는 수식어에 시선을 빼앗길 때 우리 역시 길들여진다. 재준이 끔찍하게 죽는 이유는 동은을 괴롭혀서가 아니라 감히 주제도 모르고 예솔을 탐했기 때문이다. 딸 예솔을 위해(정확히는 소유하기 위해) 기꺼이 전재준을 제거하는 하도영의 죄는 <더 글로리> 속 공분의 대상이 아니다. 그게 무섭다. 직원들을 머슴이라 칭하며 노조를 불신하는 <재벌집 막내아들>의 진양철 회장의 위험한 가치관이 쉽게 용인되고 손주를 사랑하는 뚝심 있고 매력적인 경영자로 소비되는 건 우연이 아니다. 편중된 부에 대한 원망과 부자들에 대한 선망이 뒤엉킨 사회에서 미디어는 ‘나이스한 개새끼’들에 중독되어가는 중이다.

글: 김소미
<더 글로리>가 끝난 시점에 되묻고 싶다. <더 글로리>는 학교 폭력에 어떤 화두를 던졌나. 동은(송혜교)을 괴롭힌 가해자들은 저마다 저주의 신탁이라도 받은 양 과시적인 형벌을 보여주지만 나는 냉동된 소희(이소이)의 시신이, 재준의 옷가게에서 숙식하다가 간신히 고시원으로 도망친 경란(안소요)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예상할 수 없었다. 온 생을 걸어 복수를 준비해온 주인공의 치밀한 설계도가 학교 폭력의 방지와 처벌에 어떤 사회적 나비효과를 일으켰는지 조금의 묘사도 보지 못했다. 대신 내가 본 것은 저마다 여러 층위의 고통 속에 놓인 피해자들이 한데 뭉쳐지고, 저마다 양상이 다른 가해자들이 깡그리 지옥에 던져지는 광경이었다. 집단화된 증오와 단죄 속에서 한쪽은 분열했고 한쪽은 지옥에서도 지켜낸 선의와 믿음으로 연대했다. <더 글로리>의 쾌감이자 아름다움이면서, 찝찝함을 지울 수 없는 편의적 이분법이기도 한 이 거대한 피해자-가해자 구도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주여정(이도현)은 사이코패스의 무차별 살인으로 아버지를 잃었고, 강현남(염혜란)은 알코올과 도박 중독이 극심한 남편으로부터 주기적으로 폭행당한다. 이들은 동은의 조력자로서 한데 묶인다. “나는 매 맞지만 명랑한 년이에요”라고 말하고 빨간 립스틱을 바르는 드라이버 현남, 언제든 의사라는 직업의 특권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은 “칼춤 추는 망나니” 여정은 저마다 사회가 강요하는 ‘피해자다움’을 비틀어 시청자를 감응시키는 면에서도 비슷하게 다뤄진다. 동은과 여정이 일찌감치 인연을 맺은 배경에도 피해자 정서의 공명이 있다. 동은, 현남, 여정만 동일 선상에 놓이는 것이 아니라 동은과 직간접적으로 관계 맺는 거의 모두가 각자의 피해 서사를 입증하는 방식으로 드라마가 전개된다. 의문에 부쳐진 에덴빌라의 집주인(손숙)마저 음주운전 사고로 아들을 잃고 자살 시도를 하던 중 어린 동은과 만났던 여자로 밝혀진다. 가정 폭력, 자녀 학대, 불법 촬영, 뺑소니, 공권력 부패, 크고 작은 사회적 차별과 갑질에 이르기까지 여러 공적 명명을 가진 폭력들이 거론되고 거기에 얽힌 인물들의 증오심이 연대를 이루는 구조다. 누구나 피해자(혹은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작가의 인식, 저마다 팽배한 ‘피해 의식’이 갈등이 아닌 만남의 요소로 활용된다는 사실은 훌륭한 사회적 함의를 갖는다. 사회적 계급보다 피해자성이 중요해지며, 어떤 의미로는 피해자간 고통의 위계를 줄 세우지 않는 태도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모자랄 것 없는 부유층 자제지만 ‘내면의 상처’를 가진 남자와 남다른 심성과 매력의 소유자지만 ‘가난의 상처’가 있는 여자가 서로를 충족시키는 신데렐라 서사에서 계급적 문제의식과 신분 상승의 욕망을 충돌시켰던 김은숙은 <더 글로리>에서 자본의 자리에 고통의 문제를 집어넣어본다.
이러한 시선의 확장이 김은숙 세계의 유의미한 진보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더 글로리>에 호출된 너무도 다양한 폭력의 양상과 그 피해자들의 등장에 관한 당위를 제공하기엔 역부족이다. 비교해볼 만한 작품은 박찬욱 감독의 <친절한 금자씨>다. 피해자들이 모여 가해자를 응징하는 눈물겨운 집단적 복수라는 측면에서 둘은 약간 닮아 있다. 하지만 <친절한 금자씨>는 같은 사안을 둘러싼 부모들의 각기 다른 반응과 대처, 피해자인 자신이 저지른 새로운 가해에 대한 엇갈리는 윤리를 군상화처럼 보여주면서 같은 범인에게 당했을지언정 세상에 똑같은 피해는 없음을 역설한다. 반면 <더 글로리>는 어떤 다양한 고통을 겪었든 동은 곁에서 복수의 성공을 돕거나 남은 삶의 가능성을 가리키는 피해자라는 동일한 정체성에 여러 인물들을 초대한다.
학교 폭력의 잔혹한 순간은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 않으나 아내가 남편에게 맞는 장면은 마치 누아르의 액션 신처럼 처절하게 연출한 <더 글로리>에서 현남의 몸에 남은 멍과 상처는 사적으로나 제도적으로나 되물어지지 못한다. 남편이 홍영애(윤다경)의 차에 치여 즉사했기 때문인데, 이것은 윤소희와 손명오를 살인한 죄로 사회적 죽음을 맞이한 연진이 더이상 동은에게 저지른 폭력에 관해서는 사과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도 비슷한 양상이다. <더 글로리>는 회복을 위한 정확한 처벌과 사과 대신 모든 가해자들이 한명도 빠짐없이 응징되는 퍼즐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그사이 오히려 구체화되는 쪽은 남보다 더 많이 징벌당하는 것을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추하고 비열한 짓을 일삼는 가해자 캐릭터들의 복잡한 욕망이다.
파트2의 엔딩에서 나란히 교도소로 들어가는 동은과 여정은 그곳을 걸어나올 때도 함께일까? 그들은 피해자로서 함께일 수 있으나 가해자로서는 곧 분리될 것이다. 남아 있는 일들의 후과가 사회 시스템 안에서 어떻게 해석될지 <더 글로리>는 고민하기를 멈춘다. 여정에게 내려질 처벌과 동은에게 내려질 처벌은 다를 것이고, 그에 앞서 인생의 복수를 위해 여정이 감수한 것과 동은이 감수한 것을 나란히 둘 수도 없다. <더 글로리>가 슬쩍 외면한 것 중에는 동은을 가장 괴롭게 하는 것이 학교 폭력이 아닌 친족 내 폭력이라는 사실도 있다. 파트1, 2를 도합해 동은이 가장 사무치게 오열하는 순간들은 죽지도 않고 살아 돌아오는 알코올중독자 엄마와 대면하는 과정에서 생겨난다. 그러나 그 절규는 복수의 과정에서 쉽게 증발해버린다. 개별화되지 않은 피해자들의 연대는 이렇게 가장 중요한 고통을 블랙홀 속에 빠트린다. “문동은, 주여정, 강현남 같은 피해자들이 원점에 서는 서사”를 말했던 김은숙 작가에게 복수극이란 어쩌면 액션이 가미된 어두운 멜로드라마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사회적 장애물을 뛰어넘는 낭만적 사랑의 자리에 낭만적 고통을 대입한 결과물 말이다. 그래서 <더 글로리>는 지금의 한국 사회를 증오에 몰입하는 세계로 상정하고 써내려간 어둡고 영광 없는 이야기인 동시에 작가 자신의 장기인 인간 선의에의 믿음을 끝까지 유지하며 막을 내린다. 개별적 고통에 대한 첨예한 모색 대신 적당한 타협과 모순이 생겨난 자리에서 작가 스스로 자신의 세계를 부정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한국 드라마가 문제 해결에 가장 자주 쓰는 카드인 ‘유학’은 <더 글로리>에서 서사적 클리셰로 다가오지 않는다. 현남의 딸에게 ‘탈조선’만이 유일한 가능성이라고 믿고 그를 금전적으로 지원하는 동은의 결단, 딸을 데리고 영국으로 떠나버릴 수 있는 하도영의 여유야말로 이 이야기가 가장 현실적으로 재현한 어떤 선택이란 사실이 씁쓸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