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이슈 소녀는 여자를 보며 자란다.
7,343 38
2026.03.10 01:09
7,343 38
가수 김윤아. 코스모폴리탄 제공
가수 김윤아. 코스모폴리탄 제공

2002년 9월, 수유역 핫트랙스. 나는 직접 만든 자주색 토끼인형과 딸기우유를 들고 자우림의 4집 앨범을 품은 채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살짝 삐친 쇼트커트를 한 자우림의 프론트맨, 김윤아가 사인을 하고 있는 모습이 멀리서 보였다. 미치게 매력적이었다. 한 발짝 앞으로 갈 때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팬걸’로서의 내가 미디어를 통해 사랑한 존재를 실물로 만나는 역사적인 첫 순간이었으므로.

(한겨레 ‘오늘의 스페셜’ 연재 구독하기)

“미안해, 널 미워해.” 담담하고도 뜨거운 이 목소리에 완전히 매혹된 것은 열세 살 때였다. 자우림은 ‘매직카펫라이드’나 ‘헤이 헤이 헤이’처럼 우리를 열정적인 쇼의 한가운데로 끌어오는 밴드인 동시에 ‘밀랍천사’처럼 치명적인 사랑의 굴레로 밀어 넣는 환각적인 뮤지션이었고, ‘미안해 널 미워해’처럼 오묘한 아이러니를 노래하는 멜랑콜리한 팀이었다. 음악 좀 듣는 중학생이라면 ‘너바나’며 ‘펄잼’, ‘오아시스’와 ‘블러’ 같은 물 건너온 밴드맨들에 심취해 있던 시기, ‘록’이라고 하면 남성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던 그때,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록 밴드 프론트맨으로 현현한 김윤아는 그야말로 어린 내게 신이었던 것이다.

당시 김윤아는 또렷한 자의식과 예민한 기질을 가진, 어딘가 좀 이상한 사춘기 여자애들의 교주이자 교집합이었다. 특히 김윤아의 첫 솔로앨범 ‘섀도우 오브 유어 스마일’은 그들을 미치게 만들었다. 나는 그녀가 쓴 글이 수록된 포토 에세이집과 함께 발매된 이 앨범으로 인해 단지 그녀의 음악 뿐 아니라 그녀의 목소리, 그녀의 문장, 그녀의 취향, 그녀의 사상에까지 모조리 마음을 빼앗겼다. 나는 그 책에 수록된 에세이 중 겨자색 코트를 입은 채 자주색 립스틱을 덧바르는 김윤아에 대한 묘사를 너무 자주 상상한 나머지, 마치 화장실 거울 앞에서 화장을 고치던 그녀를 마주친 것이 우리의 첫 만남인 것 같은 왜곡된 기억마저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어릴 때의 나는 꼭 김윤아처럼 되고 싶었다. 남들이 핑클의 이효리와 SES의 유진을 두고 실랑이를 하던 바로 그때, 드높은 자의식, 맹렬한 목소리, 뜨거운 창작욕, 빼어난 미감,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내 바보같고 비뚤어진 마음을 알아주고 어루만져주는 이상한 공감대까지 모두 가진 그 여자가 되고 싶었다.

안타깝게도 당시 내 주변에는 그런 센티멘털한 주파수를 공유하는 친구가 없었다. 그러나 대학생이 되어, 성인이 되어 만난 여전히 이상한 여자애들은, 하나같이 사춘기에 김윤아를 사랑했노라고, 그 시절 연말 콘서트장에서 우린 함께 소리를 지르고 있었노라고, 사인을 받기 위해 같은 줄에 서 있었노라고 서로에게 틀림없이 고백을 하게 되고 말았다. 그리고 나는 이 ‘좀 이상한 여자들의 여자’를 좋아했다는 사실이, 동족을 알아보는 하나의 증표로 기능한다고 믿게 된다.

가수 김윤아. 코스모폴리탄 제공
가수 김윤아. 코스모폴리탄 제공

그 중엔 김윤아가 변했다고 말한다든지, 애증을 드러낸다든지, 심지어는 그녀를 좋아하는 취향을 경멸하는 일이 마치 쿨하고 더 상급의 취향과 태도를 가진 줄로 착각하는 사람들 또한 꽤나 있었다. 그들이 왜 그녀를 싫어하는지에 대해 듣고 있자면, 오히려 그것은 솔직하지 못하고 자의식이 비대한 자들이 역으로 자신이 김윤아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고백하는 방증같다고 생각했다. 취향을 가진 이들 사이에서 그런 표지가 되는 것 역시 김윤아가 지닌 힘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김윤아를 사랑했고 중간중간 그녀를 잊기도 했지만 김윤아는 음악을,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잊은 적이 없다. 긴 세월이 지났다. 강산이 세번 가까이 바뀌었다. 28년 차, 자우림과 김윤아는 굳건하다. 그들은 활발하게 새 앨범을 내고 쉬지 않고 투어를 돌며 당장 내일이 없는 사람들처럼 노래하고 또 노래한다. 그들의, 혹은 그녀의 공연에 가본 적 있는가? 그 폭발하는 에너지는 마치 질식할 것처럼 홀을 가득 메운다. 그들이 쌓아온 세월만큼 경이롭게, 어떤 젊음보다 뜨겁게, 바로 지금 말이다.

 

 

중략 

 

 

―제 나이 또래의 여자들은 다 한번쯤 당신을 사랑해본 경험이 있을 겁니다. 왜 소녀들은 당신을 사랑하게 될까요?

“제가 딸들이 많아요.(웃음) 그건, 공감할 수 있기 때문 아닐까요? ‘내가 알 것 같은 이야기를 저 사람이 하고 있다’는 느낌. 저는 그런 이야기를 가능한 한 오래 하고 싶은데요, 사실 제 또래 여성분들 중 지금까지 활동하고 계신 분이 많지 않아요. 특히 기혼이고 아이가 있으신 분들은 정말 드물죠. 소녀들이 ‘저 사람처럼 나도 내 일을 저렇게 오래 하고 싶다’고 생각할 수 있는 ‘저 사람’이 되고 싶어요. 최대한 오랫동안, 여러분들께 부끄럽지 않게 일을 해나가고 싶습니다.”

-‘김윤아는 노래한다, 언제까지나’ 코스모폴리탄 인터뷰

가수 김윤아. 코스모폴리탄 제공
가수 김윤아. 코스모폴리탄 제공

십대, 이십대엔 롤모델로 찾을 수 있는 여성들이 많다. 그러나 삼십대, 사십대에 들어서며 조금씩 줄어든다. 그 많던 빛나던 여성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왜 우리는 백발에 안경을 낀 멋진 시니어 여성을 그러한 남성들의 수만큼 알지 못하는 것일까. 그렇기에 “저 사람이 저기에 있어서” 나도 힘을 낼 수 있는 존재는 우리 모두에게 귀하다. 28년 전에도 지금도 김윤아는 한결 같이 질투 나는, 나의 롤 모델이다.

3월 11일은 그녀의 오십번째 생일이다. 김윤아에게 딸기우유를 건넸던 열네 살은 자라서 그녀의 생일에 딸기 한 박스와 와인을 보낼 수 있는 서른일곱 살이 됐다. 그렇다. 소녀는 여자를 보며 자란다.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186556.html

 

 

작년 김윤아 생일에 올라온 글인데

내용이 좋아서

올해 생일이 다가오기전에 공유한다~~

목록 스크랩 (5)
댓글 38
댓글 더 보기
새 댓글 확인하기

번호 카테고리 제목 날짜 조회
이벤트 공지 ✨투슬래시포X더쿠✨ 반사판 댄 듯 얼굴의 입체감을 살리는, 이사배가 만든 NEW 파우더 ‘플래시 리플렉팅 스킨 피니셔’ 리뷰 이벤트 (50인) 471 04.27 19,419
공지 [공지] 언금 공지 해제 24.12.06 5,100,660
공지 📢📢【매우중요】 비밀번호 변경 권장 (현재 팝업 알림중) 24.04.09 12,286,806
공지 공지가 길다면 한번씩 눌러서 읽어주시면 됩니다. 23.11.01 13,080,991
공지 ◤더쿠 이용 규칙◢ [스퀘어 정치글은 정치 카테고리에] 20.04.29 35,580,082
공지 정치 [스퀘어게시판 정치 카테고리 추가 및 정치 제외 기능 추가] 25.07.22 1,103,918
공지 정보 더쿠 모바일에서 유튜브 링크 올릴때 주의할 점 785 21.08.23 8,552,805
공지 정보 나는 더쿠에서 움짤을 한 번이라도 올려본 적이 있다 🙋‍♀️ 270 20.09.29 7,463,277
공지 팁/유용/추천 더쿠에 쉽게 동영상을 올려보자 ! 3617 20.05.17 8,673,731
공지 팁/유용/추천 슬기로운 더쿠생활 : 더쿠 이용팁 4020 20.04.30 8,564,503
공지 팁/유용/추천 ◤스퀘어 공지◢ [9. 스퀘어 저격판 사용 금지(무통보 차단임)] 1236 18.08.31 14,499,638
모든 공지 확인하기()
3055752 이슈 저도 옛날엔 아 우리 집은 객관적으로 정말 좋은 가정인데 왜 나는 이런 정신병자가 된 거지?? 정말 그냥 내가 천부적 미친새끼인 건가? 싶었거든요 근데...twt 04:07 1
3055751 유머 사친에게 우산 주고 비 맞고 온 애인 vs 사친이랑 한 우산 쓰고 데려다준 애인 04:03 64
3055750 이슈 성형외과에서 상안검 하안검 수술 받다가 저산소성 뇌손상으로 사망..jpg 11 03:44 983
3055749 이슈 할머니께서 '많이 안 다치셨을까봐' 걱정입니다. 6 03:31 1,035
3055748 유머 고품격 박사 조롱 4 03:11 656
3055747 이슈 배달기사님이 자꾸 내뒤를 보며 웃고 있었음 3 03:08 1,416
3055746 정보 지구과학계에서 분석한 역사시대 3대 화산폭발 3 03:06 823
3055745 유머 승헌쓰 근황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10 02:57 1,485
3055744 유머 최근에 발생한 대규모 불법 컨텐츠 복사 사태.jpg 12 02:56 2,195
3055743 유머 네 홍차에 독을 탔어 4 02:54 619
3055742 이슈 홍진경 ㄴㅇㄱ 근황...jpg 22 02:49 2,779
3055741 이슈 쌍둥이소재 드라마에서 주변인물들 그 누구도 구별 못하는걸 바로 감별해내는 장면 볼때마다 희열이 느껴져 .. 10 02:43 1,711
3055740 이슈 생명을 지키는 엄마들의 모임 7 02:41 1,084
3055739 이슈 개웃긴거 세포 성우분들도 유바비 소모임 회원들이심. 4 02:40 1,331
3055738 이슈 친애엑 백선호 홍민기 나온 거 또 봐야지 02:35 279
3055737 이슈 노래할때 목소리 완전 다른 사람 같은 지예은 4 02:30 1,067
3055736 이슈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전무후무한 인기를 누린 여배우.jpg 22 02:27 3,082
3055735 이슈 단체 셀카 개고수인 거 같은 워너원 이대휘 3 02:27 766
3055734 이슈 순록이 이성세포 안되겠다면서 버튼 딱 누르고 비상이다 하고 유미 차트 가져오라고 하는거 ㄴㅁ 귀여움 3 02:27 1,211
3055733 이슈 남이랑 내 생활 공간을 백푸로 공유하는게 진자 힘듦.. 4 02:25 1,4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