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이슈 소녀는 여자를 보며 자란다.
2,751 15
2026.03.10 01:09
2,751 15
가수 김윤아. 코스모폴리탄 제공
가수 김윤아. 코스모폴리탄 제공

2002년 9월, 수유역 핫트랙스. 나는 직접 만든 자주색 토끼인형과 딸기우유를 들고 자우림의 4집 앨범을 품은 채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살짝 삐친 쇼트커트를 한 자우림의 프론트맨, 김윤아가 사인을 하고 있는 모습이 멀리서 보였다. 미치게 매력적이었다. 한 발짝 앞으로 갈 때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팬걸’로서의 내가 미디어를 통해 사랑한 존재를 실물로 만나는 역사적인 첫 순간이었으므로.

(한겨레 ‘오늘의 스페셜’ 연재 구독하기)

“미안해, 널 미워해.” 담담하고도 뜨거운 이 목소리에 완전히 매혹된 것은 열세 살 때였다. 자우림은 ‘매직카펫라이드’나 ‘헤이 헤이 헤이’처럼 우리를 열정적인 쇼의 한가운데로 끌어오는 밴드인 동시에 ‘밀랍천사’처럼 치명적인 사랑의 굴레로 밀어 넣는 환각적인 뮤지션이었고, ‘미안해 널 미워해’처럼 오묘한 아이러니를 노래하는 멜랑콜리한 팀이었다. 음악 좀 듣는 중학생이라면 ‘너바나’며 ‘펄잼’, ‘오아시스’와 ‘블러’ 같은 물 건너온 밴드맨들에 심취해 있던 시기, ‘록’이라고 하면 남성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던 그때,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록 밴드 프론트맨으로 현현한 김윤아는 그야말로 어린 내게 신이었던 것이다.

당시 김윤아는 또렷한 자의식과 예민한 기질을 가진, 어딘가 좀 이상한 사춘기 여자애들의 교주이자 교집합이었다. 특히 김윤아의 첫 솔로앨범 ‘섀도우 오브 유어 스마일’은 그들을 미치게 만들었다. 나는 그녀가 쓴 글이 수록된 포토 에세이집과 함께 발매된 이 앨범으로 인해 단지 그녀의 음악 뿐 아니라 그녀의 목소리, 그녀의 문장, 그녀의 취향, 그녀의 사상에까지 모조리 마음을 빼앗겼다. 나는 그 책에 수록된 에세이 중 겨자색 코트를 입은 채 자주색 립스틱을 덧바르는 김윤아에 대한 묘사를 너무 자주 상상한 나머지, 마치 화장실 거울 앞에서 화장을 고치던 그녀를 마주친 것이 우리의 첫 만남인 것 같은 왜곡된 기억마저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어릴 때의 나는 꼭 김윤아처럼 되고 싶었다. 남들이 핑클의 이효리와 SES의 유진을 두고 실랑이를 하던 바로 그때, 드높은 자의식, 맹렬한 목소리, 뜨거운 창작욕, 빼어난 미감,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내 바보같고 비뚤어진 마음을 알아주고 어루만져주는 이상한 공감대까지 모두 가진 그 여자가 되고 싶었다.

안타깝게도 당시 내 주변에는 그런 센티멘털한 주파수를 공유하는 친구가 없었다. 그러나 대학생이 되어, 성인이 되어 만난 여전히 이상한 여자애들은, 하나같이 사춘기에 김윤아를 사랑했노라고, 그 시절 연말 콘서트장에서 우린 함께 소리를 지르고 있었노라고, 사인을 받기 위해 같은 줄에 서 있었노라고 서로에게 틀림없이 고백을 하게 되고 말았다. 그리고 나는 이 ‘좀 이상한 여자들의 여자’를 좋아했다는 사실이, 동족을 알아보는 하나의 증표로 기능한다고 믿게 된다.

가수 김윤아. 코스모폴리탄 제공
가수 김윤아. 코스모폴리탄 제공

그 중엔 김윤아가 변했다고 말한다든지, 애증을 드러낸다든지, 심지어는 그녀를 좋아하는 취향을 경멸하는 일이 마치 쿨하고 더 상급의 취향과 태도를 가진 줄로 착각하는 사람들 또한 꽤나 있었다. 그들이 왜 그녀를 싫어하는지에 대해 듣고 있자면, 오히려 그것은 솔직하지 못하고 자의식이 비대한 자들이 역으로 자신이 김윤아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고백하는 방증같다고 생각했다. 취향을 가진 이들 사이에서 그런 표지가 되는 것 역시 김윤아가 지닌 힘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김윤아를 사랑했고 중간중간 그녀를 잊기도 했지만 김윤아는 음악을,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잊은 적이 없다. 긴 세월이 지났다. 강산이 세번 가까이 바뀌었다. 28년 차, 자우림과 김윤아는 굳건하다. 그들은 활발하게 새 앨범을 내고 쉬지 않고 투어를 돌며 당장 내일이 없는 사람들처럼 노래하고 또 노래한다. 그들의, 혹은 그녀의 공연에 가본 적 있는가? 그 폭발하는 에너지는 마치 질식할 것처럼 홀을 가득 메운다. 그들이 쌓아온 세월만큼 경이롭게, 어떤 젊음보다 뜨겁게, 바로 지금 말이다.

 

 

중략 

 

 

―제 나이 또래의 여자들은 다 한번쯤 당신을 사랑해본 경험이 있을 겁니다. 왜 소녀들은 당신을 사랑하게 될까요?

“제가 딸들이 많아요.(웃음) 그건, 공감할 수 있기 때문 아닐까요? ‘내가 알 것 같은 이야기를 저 사람이 하고 있다’는 느낌. 저는 그런 이야기를 가능한 한 오래 하고 싶은데요, 사실 제 또래 여성분들 중 지금까지 활동하고 계신 분이 많지 않아요. 특히 기혼이고 아이가 있으신 분들은 정말 드물죠. 소녀들이 ‘저 사람처럼 나도 내 일을 저렇게 오래 하고 싶다’고 생각할 수 있는 ‘저 사람’이 되고 싶어요. 최대한 오랫동안, 여러분들께 부끄럽지 않게 일을 해나가고 싶습니다.”

-‘김윤아는 노래한다, 언제까지나’ 코스모폴리탄 인터뷰

가수 김윤아. 코스모폴리탄 제공
가수 김윤아. 코스모폴리탄 제공

십대, 이십대엔 롤모델로 찾을 수 있는 여성들이 많다. 그러나 삼십대, 사십대에 들어서며 조금씩 줄어든다. 그 많던 빛나던 여성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왜 우리는 백발에 안경을 낀 멋진 시니어 여성을 그러한 남성들의 수만큼 알지 못하는 것일까. 그렇기에 “저 사람이 저기에 있어서” 나도 힘을 낼 수 있는 존재는 우리 모두에게 귀하다. 28년 전에도 지금도 김윤아는 한결 같이 질투 나는, 나의 롤 모델이다.

3월 11일은 그녀의 오십번째 생일이다. 김윤아에게 딸기우유를 건넸던 열네 살은 자라서 그녀의 생일에 딸기 한 박스와 와인을 보낼 수 있는 서른일곱 살이 됐다. 그렇다. 소녀는 여자를 보며 자란다.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186556.html

 

 

작년 김윤아 생일에 올라온 글인데

내용이 좋아서

올해 생일이 다가오기전에 공유한다~~

목록 스크랩 (0)
댓글 15
댓글 더 보기
새 댓글 확인하기

번호 카테고리 제목 날짜 조회
이벤트 공지 🩵더쿠X유세린🩵 유세린 이븐래디언스 브라이트닝 부스터 세럼 체험단 50인 모집 349 03.09 29,539
공지 [공지] 언금 공지 해제 24.12.06 4,962,437
공지 📢📢【매우중요】 비밀번호 변경 권장 (현재 팝업 알림중) 24.04.09 11,920,752
공지 공지가 길다면 한번씩 눌러서 읽어주시면 됩니다. 23.11.01 12,954,935
공지 ◤더쿠 이용 규칙◢ [스퀘어 정치글은 정치 카테고리에] 20.04.29 35,255,195
공지 정치 [스퀘어게시판 정치 카테고리 추가 및 정치 제외 기능 추가] 25.07.22 1,064,271
공지 정보 더쿠 모바일에서 유튜브 링크 올릴때 주의할 점 782 21.08.23 8,509,761
공지 정보 나는 더쿠에서 움짤을 한 번이라도 올려본 적이 있다 🙋‍♀️ 268 20.09.29 7,427,419
공지 팁/유용/추천 더쿠에 쉽게 동영상을 올려보자 ! 3600 20.05.17 8,639,439
공지 팁/유용/추천 슬기로운 더쿠생활 : 더쿠 이용팁 4016 20.04.30 8,520,103
공지 팁/유용/추천 ◤스퀘어 공지◢ [9. 스퀘어 저격판 사용 금지(무통보 차단임)] 1236 18.08.31 14,406,967
모든 공지 확인하기()
3015618 정보 부시시 반곱슬을 곱슬로 만드는 방법 3 05:45 344
3015617 유머 ??? : 과자가 건조해서 그런가 건조하고 못생기게 살쪄요 2 05:43 253
3015616 이슈 야옹이가 젤 좋아하는 사람에게만 보여주는 찐 애정 1 05:30 490
3015615 유머 말 잘 듣는데 안 듣는 빌라 주민들.jpg 9 05:24 1,011
3015614 유머 개미친 어제오늘 하루 원유 차트 무빙 6 05:20 697
3015613 유머 친아들까지 도륙한(ㄷㄷ) 역대급 빌런 '조선 왕'이 Lv.999 제일검을 건드리면 벌어지는 일 1 05:04 601
3015612 유머 새벽에 보면 이불 속으로 들어가는 괴담 및 소름썰 모음 175편 3 04:44 127
3015611 유머 여성의 날에 “남성용 자동차”를 발표한 포드 자동차 🚙 10 04:43 1,135
3015610 이슈 위트컴 WBC 팀코리아 하울 영상 3 04:21 1,065
3015609 이슈 의사가 말하는 무쓸모 영양제 91 03:56 10,144
3015608 이슈 블랙핑크 'GO' MV 비하인드 쇼츠 로제 & 리사 1 03:52 421
3015607 이슈 [WBC] 이번대회 좋으면서 심난한 두 사람 7 03:39 2,496
3015606 이슈 원덬기준 sm 옥구슬 음색의 계보를 이어나갈것같은 하투하 멤버.x 15 03:34 1,312
3015605 이슈 망명 신청한 이란 여자축구대표팀 주장에 대한 새로운 과거 4 03:30 1,830
3015604 이슈 Love Fiction - 울랄라세션 5 03:28 372
3015603 유머 9년째 찐사덕질을 이어오고 있는 일본의 성우 오타쿠.jpg 1 03:12 810
3015602 이슈 아침에 막내 키야 학교 보내는데 진심인 키키 언니들 6 03:05 1,428
3015601 유머 처음보는 형태의 진돗개 29 02:47 4,372
3015600 이슈 현재 전세계 성적 씹어먹고 있는 넷플릭스 신작..jpg 20 02:44 6,580
3015599 이슈 막 만난 솜인형은 긴장한 얼굴을 하고 있으니 많이 쓰다듬고 사랑해주면 좋다 24 02:38 3,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