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왜 조선어를 국어로 하지 않고 일본어를 국어라고 하느냐?”
일제강점기 군국주의 통치가 강화되기 시작하던 1931년 9월, 당시 15살이었던 고 윤덕율(1977년 사망)씨는 떨리는 목소리로 청중 앞에 섰다. 전남 완도군 대신리에 살던 윤씨는 마을 유치원에 모인 사람들 앞에서 ‘일본어와 국어’라는 제목의 연설을 했다. “국어는 그 나라의 국민성을 함양함에 가장 중대한 것” 등 일제의 ‘문화통치’에 맞서 우리말과 한글을 의식적으로 사용해 지켜야 한다는 취지의 연설이 끝나자마자, 윤씨를 비롯한 대신리 마을 주민 7명은 경찰에 끌려갔다. 윤씨를 지도한 야학교사 고 김병규(당시 44살)씨는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고, 당시 20대 청년이던 마을주민 5명도 각각 징역 1년∼1년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유일한 미성년자였던 윤씨는 폭행 등 가혹 행위를 겪은 뒤 열흘 만에 풀려났다.
1일 한겨레가 신장식 조국혁신당 의원실로부터 확보한 국가보훈부의 독립유공자 포상 공적심사 결과 안내문 등을 보면, 윤씨의 후손들은 2002년부터 2024년까지 총 8차례에 걸쳐 독립유공자 공적 심사를 신청했지만 윤씨는 매번 서훈·포상 대상에서 탈락했다. 훗날 ‘신우회 사건’이라고 이름 붙은 이 사건에 동참한 7명 가운데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지 못한 건 윤씨가 유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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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장식 의원은 “‘나이가 어려 주도적 행위로 보기 어렵다’는 이유로 미성년 독립운동가들의 희생이 축소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며 “나이, 참여 형태 등에 따라 달라지는 현행 공적 인정 기준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한겨레 정인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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