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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130년전 미국의 상류층 명문가 따님과 연애결혼했던 독립운동가 서재필의 당시 회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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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3.01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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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리엘 암스트롱을 만난 것은 그 무렵이었다. 나는 원래 쾌락에 큰 흥미가 없었다. 십 년 가까운 미국의 독신생활 중에서 술과 여자는 거의 가까이 하지 않았다. 딱히 금욕생활을 했다기보다는 별로 그런 것이 끌리지 않았다. 원래 조선에서 살던 때에도 그다지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았었거니와, 미국 생활에서는 그럴만한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그러던 내가 여자를 만났다. 뮤리엘과 처음 만난 것은 교회에서였다. 주말에 교회에서 오가며 얼굴은 여러 번 마주쳤는데, 길쭉하고 호리호리한 서양 미인인데 눈매 어딘가에 동양적인 아름다움이 담겨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냥 그 정도였을 뿐, 특별한 감정은 없었다. 

 

 

어느 날 심부름꾼이 찾아와 환자가 있으니 왕진을 부탁했다. 왕진가방을 들고 어느 호텔로 찾아갔더니 뮤리엘과 그녀의 어머니, 두 사람이 열병으로 앓아누워 있었다. 약간의 치료를 마치자 젊은 뮤리엘은 금방 증세가 호전되었는데, 그녀의 어머니는 보름 이상을 계속 앓았다. 나는 그녀의 어머니 때문에 계속 왕진을 다녔고 그러면서 뮤리엘과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생겼다. 

 

 

뮤리엘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재미있고 즐거웠다. 그녀는 아주 여성적이고 나긋나긋했으며, 역사와 예술과 문화에 대한 여성적 감수성을 가졌으며, 아주 귀여운 유머감각을 가졌다. 모두가 내가 가지지 못한 것들이었다. 

 

 

“열병은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은 세균 때문에 생긴다고 하셨죠? ”

 

“그렇지요. 외부의 세균과 우리 몸의 면역체계가 싸움을 벌이는 과정에서 몸에 열이 나는 것입니다.”

 

“논쟁을 벌이면 볼이 뜨거워지는 것과 같은 원리군요.”

 

그녀가 배시시 웃으면서 이런 농담을 할 때면 나는 가슴이 뭉클했다.

 

 

그녀의 어머니가 완치된 이후에는 교회에서 만나거나 가끔 그녀가 병원을 찾아오기도 했다. 우리는 함께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고, 자연스럽게 결혼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서른 살, 뮤리엘은 스물세 살이었다. 서재필이라고 불리던 시절에 나는 이미 두 번 결혼했었다. 첫 번째 부인인 경주 이씨는 몸이 약해서 혼인 다음 해에 죽었고, 재혼했던 광산 김씨는 아들 하나를 낳았으나 갑신년에 온 집안이 몰락할 때 죽었다. 이제 결혼한다면 세 번째가 된다.

 

 

조선의 결혼과 미국의 결혼은 의미가 조금 다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이든 미국이든 결혼이란 그 사회의 안정된 구성원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아직도 미국인으로서 살아갈 날이 많이 남아있다. 혼자 사는 것보다는 이 나라의 여성과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루는 편이 낫다. 하지만 아무 여자와 결혼할 수는 없었다. 유색인종으로서 배경이 전혀 없는 내 핸디캡을 채워줄 수 있는, 더불어 가치관과 취미가 맞는 여성이어야 한다.

 

 

뮤리엘 암스트롱이라면 모든 것을 만족시킨다. 그녀는 다정다감한 여성적 성격에 지성과 미모를 모두 갖췄고, 작고한 그녀의 부친은 철도우편국을 설립하고 초대 국장을 역임했던 사회 지도층이었다. 적어도 워싱턴의 사회지도층들은 철도우편국의 미스터 암스트롱이라면 알만한 사람은 다 알았다. 뮤리엘은 내게 결핍한 모든 것을 채워줄 수 있다.

 

 

나는 뮤리엘에게 청혼했고 그녀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주변의 반대, 특히 뮤리엘의 어머니의 반대를 걱정했다. 하지만 그 문제는 생각보다 쉽게 해결됐다. 뮤리엘의 어머니는 최근 재혼했고, 유색인종 사윗감을 내켜 반가워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심하게 반대할 입장도 아니었던 것이다. 

 

 

 

현실적인 결혼 생활 준비를 하려니 걸리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물론 가장 큰 문제는 돈이었다. 특히나 주택 자금이었다. 나는 명색이 의사지만 돈은 거의 없었다. 어느 날 박채호를 만나서 이런 고민을 이야기 했더니, 박채호가 뜻밖의 말을 꺼냈다.

 

 

“조선 공사관 건물을 사용하시면 어떻습니까?

 

 

조선의 입장에서 나는 갑신년의 역적인데,

역적이 공사관에 투숙한다니. 말이 되는 일인가?

우스꽝스럽다.

 

 

“마음대로 쓰시지요. 어차피 놀고 있는 방입니다. 2층에 방이 넷인데, 그 중 방 두 개는 제이손 박사께서 마음대로 쓰셔도 됩니다. 거금 이만오천 달러를 주고 산 건물인데 쓰든 안 쓰든 나가는 돈은 똑같으니까요.” 조선 공사관은 값비싼 주택이라서 월세를 주고 구할 수 있는 집보다 훨씬 시설이 좋았고, 교통도 편했다. 게다가 무료라니. 지금처럼 어려운 형편에, 가리고 어쩔 처지가 아니었다. 

 

 

마음에 걸리는 것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 문제는 조선 때문에 그토록 심적 고통을 겪었으면서 조선 공사관에 얹혀살 수 있냐는 것이다. 나는 조선인 서재필이 아니고, 미국인 필립 제이손 아닌가. 하지만 정말로 내 영혼 밑바닥에 쌓인 조선에 대한 기억까지 다 사라진 것은 아니다. 조선 공사관에서 조선에 둘러쌓여 살면, 다시 날이면 날마다 민비와 청군과 백성들에게 쫓기는 악몽을 꾸지는 않을까. 순전히 내 마음먹기 나름이지만 뮤리엘이 곁에 있으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번째 문제는 조선 공사관의 입장이다. 나는 아무튼 아직도 조선의 대역죄인이었다. 그 사이 조선의 소식을 못 듣기는 했지만, 내가 사면되었을 리가 없다. 몇 년 전, 대리공사였던 이완용을 만났을 때 그는 피차간 만나봐야 좋을 것이 없는 사이니 못 만난 것으로 하자고 했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공사인 이성수는 조선의 역적인 나를 한 지붕 아래에 유숙시킬 수 있을까? 첫번째는 몰라도 두번째 문제는 내가 판단할 수는 없다. 조선 공사에게 답을 얻어야 한다.

 

 

혼자 남아있는 조선공사 대리 신분인 이성수는 내가 찾아온 것을 반기는 눈치였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주상께서 저에게 아주 어려운 임무를 부여했습니다. 미국으로부터 차관을 얻고, 군인을 파견받고, 기술자를 초빙하라는 어명입니다. 저는 영어도 짧고 이 나라에 아는 사람도 없는데, 그 모든 임무를 저 혼자 부여받은 입장이라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결국 이성수는 내게 조선공사관 일을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조선과의 인연을 확장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현실적으로 조선공사관만큼 좋은 조건의 신혼집을 구할 방법이 없었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저는 조선 백성이 아니고 미국 시민입니다. 게다가 저는 개인 사업자로서 병원을 운영하느라 시간이 없어, 낮 시간에 공사관의 직원처럼 일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번역이 필요하거나 미국의 행정 관행을 알려드리는 정도의 도움이라면 얼마든지 드릴 수 있습니다. 저는 이제 미국인이니 서재필 대신 제이손 박사로 호칭해주십시오.”

 

 

이성수와 대화를 마치고 몇일 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미국 사회니 계약서는 쓰기로 했다. 닥터 필립 제이손은 조선 공사관 2층의 방 두 개를 향후 삼 년간 사용하며, 그 댓가로 일주일에 여덟 시간 씩 업무를 지원하는 조건이었다.

 

말할 수도 없이 내게 유리한 계약이지만, 이성수의 입장에서도 어차피 비어있는 공사관을 빌려주면서 아쉬울 때 조력을 받을 수 있으니 만족하고 있었다. 공사관 건물은 월세 삼십 달러를 내고 빌리는 집보다 훨씬 좋았다.

 

공간 여기저기에는 조선에서 가져온 장식물이 있어, 뮤리엘은 무료로 아시아 여행을 하는 기분이라며 즐거워했다. 가장 어려웠던 집을 구하는 문제가 해결되었다. 이제 결혼 준비는 급진전 되었다.

 

 

 

130년전 이야기인데 뭔가 국제적입니다.

참고로 저 미국인 여성 뮤리엘은 

미국 제15대 대통령인 제임스 뷰캐넌의 

5촌 조카딸이기도 했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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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필이 당대에 미국 최고 명문인 조지워싱턴대 의과대학을 

졸업한 의사였던 것도 놀라운데, 

미국 완전 주류 상류사회의 여성과 동양인이 

연애결혼했다는 사실도 너무 놀랍고 재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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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리엘과의 연애결혼 끝에 태어난 따님분들..

 

무려 100년전 분들입니다. 

 

왼쪽 막내딸분은 훗날 조각가가 되어서

유한양행 버드나무 로고를 디자인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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