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기사/뉴스 “학살 생존자 103명이 대한민국 정부의 사과를 원합니다”
2,816 14
2026.02.26 12:44
2,816 14
필자가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진상 규명 운동 속에서 목도한 것은 두 가지 ‘악’이었다. 전쟁 시기 학살이 하나의 악이었다면, 이후 계속되는 부인(denial)과 무책임은 또 다른 악이었다. ‘학살을 듣는 법정’ 연재 마지막 회는 이 운동 속에서 마주한 ‘악의 지속성’에 대한 이야기다.



악의 평범성, 그리고 악의 지속성



한나 아렌트가 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법정 르포다. 나치 독일의 고위 관료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은 패전 뒤 독일에서 탈출해 잠적했지만, 1960년 아르헨티나에서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에 체포됐고 이후 이스라엘 법정에서 재판받았다. 유대인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이 세기의 재판을 목격하고 기록한 책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다.

아렌트가 피고인석에 앉은 아이히만의 이야기를 들으며 도출한 하나의 결론은 수백만 유대인을 절멸에 이르게 한 ‘악’의 메커니즘은 ‘무사유’(사유의 불능)였다는 것이다. 아렌트가 목격한 아이히만은 피에 굶주린 악마가 아니라 출세를 위해 성실하게 업무를 수행한 공무원이었다. 아이히만은 유대인의 추방과 학살을 위한 결정적 업무를 했지만, 아무런 사유 없이 근면하게 일했고(죽였고), 그 결과 유례없는 범죄자가 됐다는 것이 아렌트의 분석이었다. ‘악의 평범성’이라는 명제는 이렇게 탄생했다.

1999년 한겨레21의 ‘아, 몸서리쳐지는 한국군!’이라는 기사로 시작된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진상 규명 운동은 2015년 피해자의 최초 한국 방문을 계기로 제도적 활동으로 확장돼나갔다. 피해자의 변호사들은 국가정보원이 보관한 학살 자료의 공개를 청구했고, 대통령을 상대로 100명 넘는 피해자가 직접 청원서를 작성해 제출했다. 이후 퐁니마을 학살은 국가배상소송을, 하미마을 학살은 진실 규명을 요구하는 소송을 시작해 지금도 진행 중이다. 모두 이 연재에서 다룬 내용이다.

제도적 활동의 힘은 길든 짧든 권력에서 ‘답’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베트남전 이후 수십 년을, 1999년 공론화 이후로만 해도 15년을 침묵하던 대한민국은 비로소 ‘피고’석에 앉혀졌고 입을 열어야만 했다.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법정에서 나치 전범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것처럼, 필자는 지난 10년간 가해국 대한민국의 법정에서 피고 대한민국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지금도 학살 당시를 생생히 기억하며 울부짖는 피해자들 앞에서 ‘선진국’ 대한민국은 온갖 법기술을 동원하며 부인했다. ‘학살을 듣는 법정’은 ‘학살을 부인하는 법정’이었다.




빛나는 민주주의 국가의 지독한 부인



‘부인’은 국가범죄, 국가폭력 사건들의 일반적 양상이긴 하다. 권력이 자행한 범죄이기에 그 권력의 영향력이 유지되는 한 꽤 오랜 시간 진실이 은폐되고 책임을 따져 묻기도 어렵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아니다. 민주화 이후 대한민국은 세계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손색없을 만큼 과거의 국가폭력 문제를 대면했다. 제주 4·3, 한국전쟁 시기 민간인 학살, 광주 5·18은 물론, 권위주의 정권 시기 의문사·고문·불법구금 문제의 진실을 밝혀냈다. 대통령이 사과하고, 재심 무죄가 이어졌으며, 수십만 피해자의 명예회복을 위한 제도 마련과 실천이 쌓여갔다.

이뿐만이 아니다. 길게는 식민지 시기 강제동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위한 운동과 제도 마련이 수십 년째 이어지고 있다. 가깝게는 2000년대 국가폭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출범한 진실화해위원회가 1, 2기를 넘어 2026년 3기까지 이어지고 있다. 앞으로도 수년간 집단수용시설, 국외입양 등 미처 온전히 살피지 못한 국가폭력 문제의 해결을 다짐하고 있다.

그런 대한민국이 유독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문제만큼은 집요하고 지독하게 ‘부인’한다. 학살 조사 자료를 공개하라는 법원 판결이 이어지자, 국가정보원은 죽은 사람의 사생활을 보호해야 한다는 기적의 논리를 만들어서 정보를 숨긴다. 피해자 103명이 ‘베트남은 사과를 원하지 않는다’는 한국 정부의 면피용 논리를 반박하며 자신의 이름과 얼굴을 걸고 ‘사과하라’는 청원을 제기하자 국방부는 ‘안타깝다, 진실이 꼭 밝혀지길 희망한다’는 위선을 떨면서 ‘그런데 우리는 아무것도 못하겠다, 안 하겠다’ 말한다.

한국전쟁 시기 민간인 학살은 조사하면서, 베트남전쟁 시기 민간인 학살은 조사할 수 없단다. 이유가 궁색하니 ‘피해자가 외국인이라 안 된다’며 법령에도 없는 피해자 국적을 핑계 댄다. 재판에서는 참전군인의 진술을 조작해 제출하고 전쟁 시기 한국과 남베트남 정부 사이에 체결한 약정의 중요한 부분을 누락해 재판부를 속이려고까지 한다. 대법원을 상대로는 “피해자들이 이기면 후대에 막대한 빚더미를 안기는 꼴”이라고 협박한다. 힘겹게 학살을 고백한 참전군인들이 ‘백 명의 베트콩을 놓쳐도 한 명의 양민을 보호한다는 지침을 들은 적도 교육받은 적도 없다’ ‘누군가 민간인을 죽여서는 안 된다, 강간해서는 안 된다 한마디만 했다면 안 그랬을 것이다’ 증언하면 ‘일개 사병이 뭘 아느냐’고 따진다.

이건 ‘악’이다. 학살이라는 과거의 끔찍한 악과는 별개로, 부인이라는 장기적이고 구조적이며, 무엇보다 현재 대한민국의 공식적 제도 속에서 평범하고 성실하게 진행 중인 악이다.



대한민국은 언제든 다시 폭주할 수 있다



부인이라는 악은 어떤 땅에서 자라는가? 피해자의 취약한 자원동원 능력(현지 조직 부재 등), 피해국(베트남)의 피해자 외면, 가해국인 한국 사회의 무관심, 우리 안에 팽배한 부인 정당화 담론(‘베트남이 사과를 원하지 않는다’ ‘게릴라전의 특수성’) 등의 조건 속에서 악을 부인하는 또 다른 악은 지속될 수 있다.

베트남전 피해자가 참전국을 상대로 여러 소송을 제기한 사례는 세계에서 유일하다. 이 세계사적인 재판을 참관하며 기록한 언론은 없었다. 많은 기자가 안타까워하며 기사화하지 못한 사정을 말했다. “데스크에서 너무 뻔하다고 하네요.” 피고 대한민국이 거짓말로 범벅이 된 주장과 서면을 마음껏 제출할 수 있는 이유는 본인들이 책임져야 할 학살을 뻔하고 지루하게 느끼는 사회에 있었다.

‘악의 지속성’은 징후적이다. 국가폭력 청산 1등 나라 대한민국이 언제든 다시 폭주할 수 있다는 경고, 피해자를 타자화할 수 있다면 문명의 시스템은 언제든 방향을 바꿔 폭력의 도구로 작동할 수 있다는 경고이기 때문이다. 연재를 통해 이 경고를 더 많은 이와 나누고자 했다. 함께 부끄럽길 바랐다. 고통스러운 방청석에 앉아줘서 감사했다.

 

임재성 변호사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36/0000053199?sid=102

목록 스크랩 (0)
댓글 14
댓글 더 보기
새 댓글 확인하기

번호 카테고리 제목 날짜 조회
이벤트 공지 💙[쿤달X더쿠💙] 뽀송뽀송한 앞머리를 위한 치트키! 쿤달 드라이샴푸 체험 이벤트 (100인) 284 02.24 22,444
공지 [공지] 언금 공지 해제 24.12.06 4,842,320
공지 📢📢【매우중요】 비밀번호 변경 권장 (현재 팝업 알림중) 24.04.09 11,760,232
공지 공지가 길다면 한번씩 눌러서 읽어주시면 됩니다. 23.11.01 12,831,861
공지 ◤더쿠 이용 규칙◢ [스퀘어 정치글은 정치 카테고리에] 20.04.29 35,081,665
공지 정치 [스퀘어게시판 정치 카테고리 추가 및 정치 제외 기능 추가] 25.07.22 1,059,988
공지 정보 더쿠 모바일에서 유튜브 링크 올릴때 주의할 점 782 21.08.23 8,502,260
공지 정보 나는 더쿠에서 움짤을 한 번이라도 올려본 적이 있다 🙋‍♀️ 268 20.09.29 7,421,037
공지 팁/유용/추천 더쿠에 쉽게 동영상을 올려보자 ! 3600 20.05.17 8,627,149
공지 팁/유용/추천 슬기로운 더쿠생활 : 더쿠 이용팁 4016 20.04.30 8,516,208
공지 팁/유용/추천 ◤스퀘어 공지◢ [9. 스퀘어 저격판 사용 금지(무통보 차단임)] 1236 18.08.31 14,387,915
모든 공지 확인하기()
3003741 이슈 반응 좋은 포켓몬센터 New 굿즈 16:08 2
3003740 이슈 방송 본 사람들이 군수로 착각했다는 '6시내고향' 시절 전현무 16:08 44
3003739 이슈 포모와 정병러들 속출시키는 삼성전자, 하이닉스 4 16:06 450
3003738 기사/뉴스 [속보]강남3구·용산 아파트값 2년 만에 꺾였다 3 16:06 252
3003737 이슈 실시간 곱버스 근황................jpg 16 16:05 1,010
3003736 기사/뉴스 “살다보니 파바가 빵값도 내리네요”…파리바게뜨, 11종 가격 전격 인하 3 16:05 159
3003735 이슈 김숙네 집수리하다가🛠️ 절교한 썰 푼다..💢 우당탕탕 쑥이네 공사 일지🫠<예측불가 예고> 16:04 177
3003734 정보 피부 좋은 사람들은 다 쓴다는 재생크림 6가지 29 16:02 1,591
3003733 기사/뉴스 [속보] 한전, 작년 영업이익 13.5조…창사 이래 역대 최대 5 16:01 594
3003732 이슈 대출하면서 주식하고 싶은데 해도될까? 소액이어도 뭐 괜찮을거같은데 쨋든 장 좋으니 원금은 보장하겠지 11 16:01 981
3003731 유머 ??? : 지훈아 그런 생각을 해야돼 니가 이번에 유퀴즈 나가는데 나도 공을 세운거라는 생각 12 16:00 839
3003730 이슈 오늘 출시된 이디야 우리 땅에서 온 봄맞이 신메뉴 3종 가격 & 영양정보 3 16:00 525
3003729 유머 물에 머리만 동동 떠 있는 아기 2 15:58 681
3003728 이슈 공항에서 만난 외국아이가 우리애를 좋아한다.... 왜일까? 14 15:56 2,612
3003727 기사/뉴스 [속보] 코스피, 6307.27 마감… 하루 만에 6200·6300선 돌파 33 15:55 1,027
3003726 정보 매일유업 피크닉 신제품 스위트레몬 출시 15 15:53 1,719
3003725 이슈 대학 입학 앞둔 최명빈 컨셉포토.jpg 4 15:53 807
3003724 이슈 한국 버츄얼 시장에서 극히 드문 빨간약 삼키고 데뷔하는 버츄얼 여돌 43 15:49 2,781
3003723 이슈 버블시작멘트 이런 길이 살면서 처음봐 8 15:47 1,898
3003722 이슈 요즘 샤갈!을 많이 써서 올려보는 포레스텔라 - 샤갈스 드림(Chagall's Dream) 4 15:45 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