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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 “학살 생존자 103명이 대한민국 정부의 사과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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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26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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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진상 규명 운동 속에서 목도한 것은 두 가지 ‘악’이었다. 전쟁 시기 학살이 하나의 악이었다면, 이후 계속되는 부인(denial)과 무책임은 또 다른 악이었다. ‘학살을 듣는 법정’ 연재 마지막 회는 이 운동 속에서 마주한 ‘악의 지속성’에 대한 이야기다.



악의 평범성, 그리고 악의 지속성



한나 아렌트가 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법정 르포다. 나치 독일의 고위 관료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은 패전 뒤 독일에서 탈출해 잠적했지만, 1960년 아르헨티나에서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에 체포됐고 이후 이스라엘 법정에서 재판받았다. 유대인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이 세기의 재판을 목격하고 기록한 책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다.

아렌트가 피고인석에 앉은 아이히만의 이야기를 들으며 도출한 하나의 결론은 수백만 유대인을 절멸에 이르게 한 ‘악’의 메커니즘은 ‘무사유’(사유의 불능)였다는 것이다. 아렌트가 목격한 아이히만은 피에 굶주린 악마가 아니라 출세를 위해 성실하게 업무를 수행한 공무원이었다. 아이히만은 유대인의 추방과 학살을 위한 결정적 업무를 했지만, 아무런 사유 없이 근면하게 일했고(죽였고), 그 결과 유례없는 범죄자가 됐다는 것이 아렌트의 분석이었다. ‘악의 평범성’이라는 명제는 이렇게 탄생했다.

1999년 한겨레21의 ‘아, 몸서리쳐지는 한국군!’이라는 기사로 시작된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진상 규명 운동은 2015년 피해자의 최초 한국 방문을 계기로 제도적 활동으로 확장돼나갔다. 피해자의 변호사들은 국가정보원이 보관한 학살 자료의 공개를 청구했고, 대통령을 상대로 100명 넘는 피해자가 직접 청원서를 작성해 제출했다. 이후 퐁니마을 학살은 국가배상소송을, 하미마을 학살은 진실 규명을 요구하는 소송을 시작해 지금도 진행 중이다. 모두 이 연재에서 다룬 내용이다.

제도적 활동의 힘은 길든 짧든 권력에서 ‘답’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베트남전 이후 수십 년을, 1999년 공론화 이후로만 해도 15년을 침묵하던 대한민국은 비로소 ‘피고’석에 앉혀졌고 입을 열어야만 했다.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법정에서 나치 전범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것처럼, 필자는 지난 10년간 가해국 대한민국의 법정에서 피고 대한민국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지금도 학살 당시를 생생히 기억하며 울부짖는 피해자들 앞에서 ‘선진국’ 대한민국은 온갖 법기술을 동원하며 부인했다. ‘학살을 듣는 법정’은 ‘학살을 부인하는 법정’이었다.




빛나는 민주주의 국가의 지독한 부인



‘부인’은 국가범죄, 국가폭력 사건들의 일반적 양상이긴 하다. 권력이 자행한 범죄이기에 그 권력의 영향력이 유지되는 한 꽤 오랜 시간 진실이 은폐되고 책임을 따져 묻기도 어렵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아니다. 민주화 이후 대한민국은 세계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손색없을 만큼 과거의 국가폭력 문제를 대면했다. 제주 4·3, 한국전쟁 시기 민간인 학살, 광주 5·18은 물론, 권위주의 정권 시기 의문사·고문·불법구금 문제의 진실을 밝혀냈다. 대통령이 사과하고, 재심 무죄가 이어졌으며, 수십만 피해자의 명예회복을 위한 제도 마련과 실천이 쌓여갔다.

이뿐만이 아니다. 길게는 식민지 시기 강제동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위한 운동과 제도 마련이 수십 년째 이어지고 있다. 가깝게는 2000년대 국가폭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출범한 진실화해위원회가 1, 2기를 넘어 2026년 3기까지 이어지고 있다. 앞으로도 수년간 집단수용시설, 국외입양 등 미처 온전히 살피지 못한 국가폭력 문제의 해결을 다짐하고 있다.

그런 대한민국이 유독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문제만큼은 집요하고 지독하게 ‘부인’한다. 학살 조사 자료를 공개하라는 법원 판결이 이어지자, 국가정보원은 죽은 사람의 사생활을 보호해야 한다는 기적의 논리를 만들어서 정보를 숨긴다. 피해자 103명이 ‘베트남은 사과를 원하지 않는다’는 한국 정부의 면피용 논리를 반박하며 자신의 이름과 얼굴을 걸고 ‘사과하라’는 청원을 제기하자 국방부는 ‘안타깝다, 진실이 꼭 밝혀지길 희망한다’는 위선을 떨면서 ‘그런데 우리는 아무것도 못하겠다, 안 하겠다’ 말한다.

한국전쟁 시기 민간인 학살은 조사하면서, 베트남전쟁 시기 민간인 학살은 조사할 수 없단다. 이유가 궁색하니 ‘피해자가 외국인이라 안 된다’며 법령에도 없는 피해자 국적을 핑계 댄다. 재판에서는 참전군인의 진술을 조작해 제출하고 전쟁 시기 한국과 남베트남 정부 사이에 체결한 약정의 중요한 부분을 누락해 재판부를 속이려고까지 한다. 대법원을 상대로는 “피해자들이 이기면 후대에 막대한 빚더미를 안기는 꼴”이라고 협박한다. 힘겹게 학살을 고백한 참전군인들이 ‘백 명의 베트콩을 놓쳐도 한 명의 양민을 보호한다는 지침을 들은 적도 교육받은 적도 없다’ ‘누군가 민간인을 죽여서는 안 된다, 강간해서는 안 된다 한마디만 했다면 안 그랬을 것이다’ 증언하면 ‘일개 사병이 뭘 아느냐’고 따진다.

이건 ‘악’이다. 학살이라는 과거의 끔찍한 악과는 별개로, 부인이라는 장기적이고 구조적이며, 무엇보다 현재 대한민국의 공식적 제도 속에서 평범하고 성실하게 진행 중인 악이다.



대한민국은 언제든 다시 폭주할 수 있다



부인이라는 악은 어떤 땅에서 자라는가? 피해자의 취약한 자원동원 능력(현지 조직 부재 등), 피해국(베트남)의 피해자 외면, 가해국인 한국 사회의 무관심, 우리 안에 팽배한 부인 정당화 담론(‘베트남이 사과를 원하지 않는다’ ‘게릴라전의 특수성’) 등의 조건 속에서 악을 부인하는 또 다른 악은 지속될 수 있다.

베트남전 피해자가 참전국을 상대로 여러 소송을 제기한 사례는 세계에서 유일하다. 이 세계사적인 재판을 참관하며 기록한 언론은 없었다. 많은 기자가 안타까워하며 기사화하지 못한 사정을 말했다. “데스크에서 너무 뻔하다고 하네요.” 피고 대한민국이 거짓말로 범벅이 된 주장과 서면을 마음껏 제출할 수 있는 이유는 본인들이 책임져야 할 학살을 뻔하고 지루하게 느끼는 사회에 있었다.

‘악의 지속성’은 징후적이다. 국가폭력 청산 1등 나라 대한민국이 언제든 다시 폭주할 수 있다는 경고, 피해자를 타자화할 수 있다면 문명의 시스템은 언제든 방향을 바꿔 폭력의 도구로 작동할 수 있다는 경고이기 때문이다. 연재를 통해 이 경고를 더 많은 이와 나누고자 했다. 함께 부끄럽길 바랐다. 고통스러운 방청석에 앉아줘서 감사했다.

 

임재성 변호사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36/0000053199?sid=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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