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n.news.naver.com/article/087/0001171907
https://n.news.naver.com/article/087/0001173571
https://n.news.naver.com/article/087/0001176108

단종이 폐위될 당시의 시대적 배경은 어린 국왕의 즉위와 그를 둘러싼 권력 다툼, 그리고 세조(수양대군)의 왕위 찬탈 과정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은 조선 초기의 정치적 불안정 속에서 만들어졌다. 단종은 1441년(세종 23년)에 태어나 여덟살 되던 해인 1448년(세종 30년), 세종에 의해 왕세손으로 책봉된다. 세종은 건강이 좋지 않은 아들 문종의 뒤를 이을 적통을 확실히 하기 위해 일찌감치 단종을 왕세손으로 세워 왕위 계승 구도를 정리한 것이다. “생각하건대 원손(元孫) 이홍위(李弘暐)는 천자(天資·타고난 자질)가 숙성하고 품성(稟性)이 영특하고 밝은데, 올해에는 스승에게 나아가도 되겠으니 너를 명하여 왕세손(王世孫)을 삼는다. (세종실록120권, 세종 30년 4월 3일)”

하지만 문종은 즉위 2년만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 단종은 아버지 문종의 죽음을 뒤로하고 열두살, 어린 나이에 임금의 자리에 오른다. 즉위 직후 단종은 정치를 대신들에게 맡기라는 교서를 반포하면서 모든 사무를 의정부의 정승들에게 의지한다. 특히 모든 조치는 의정부와 육조가 의논해 행하고, 육조에서 국왕에게 직접 보고하던 것을 의정부를 거쳐 보고하게 했다. 주요 관리의 인사 또한 의정부와 의논해 결정했다.
“어린 나이에 외로이 상중에 있으면서 서정(庶政·국가의 여러 방면에 걸친 행정·정무) 만기(萬機·임금이 보는 여러 가지 정무)를 조처할 바를 알지 못하니(중략)…모든 사무를 매양 대신에게 물어 한결같이 열성(列聖·역대 임금)의 헌장(憲章)에 따라서 간난(艱難·몹시 힘들고 고생스러움)을 크게 구제하기를 바라니…(단종실록1권, 단종 즉위년 5월 18일)”

대신들의 목소리가 날로 높아지고 왕권이 약화되면서 비극은 잉태된다. 단종은 아버지 문종의 죽음에 앞서 어머니(현덕왕후)마저 자신을 출산한 후 산후병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말그대로 고아 신세였다. 그의 뒷배가 되어줄 세력은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김종서를 비롯해 집현전 학사 출신인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신숙주, 이개, 유성원 등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대신들이 추천하는 인물에 황표를 붙여 왕에게 올리면 왕이 이를 낙점하는 ‘황표정사’라는 일이 이뤄지면서 비난을 받기도 했다. 당시 왕가 종친들의 위세도 상당했는데 세종의 형인 양녕대군이 생존해 있는데다 세종의 둘째아들 수양대군과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까지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이들 중 수양대군은 조카 단종 지키기 대신 권력 찬탈을 선택한다. 정권 장악을 위한 계유정난(1453년)은 그렇게 시작된다. 형 문종이 세상을 떠난지 불과 1년만의 일이었다.
계유정난(1453년)으로 김종서와 황보인 등 조정의 원로들이 숙청을 당하고 수양대군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조선의 운명은 소용돌이쳤다. 단종은 왕위에 있었으나 실권은 수양대군에게 있었다. 수양대군은 영의정, 이조판서, 병조판서 등 핵심 요직을 모두 독점하며 사실상 ‘무관의 제왕’으로 군림했다. 단종의 주변에는 그를 지켜줄 세력이 사실상 전무했다. 둘째 숙부 안평대군은 강화도로 유배되어 사사됐고, 단종의 측근들은 계속해서 제거됐다. 결국 1455년(단종 3년) 윤 6월, 견디다 못한 단종은 첫째 숙부 수양대군에게 옥새를 넘기며 양위 의사를 밝힌다. 수양대군은 겉으로는 울면서 사양하는 척했으나 이내 이를 받아들여 조선 제7대 왕 세조로 등극하기에 이른다. “노산군이 일어나 서니, 세조가 엎드려 울면서 굳게 사양하였다. 노산군이 손으로 대보(옥새)를 잡아 세조에게 전해 주니, 세조가 더 사양하지 못하고 이를 받고는 오히려 엎드려 있으니(중략)…주상(主上)을 높여 상왕(上王)으로 받들게 되었다.(세조실록1권, 세조 1년 윤6월 11일)” 이로써 15세의 단종은 삼촌에게 하릴없이 자리를 빼앗긴 채, 조선 역사상 가장 어린 상왕이 돼 수강궁(현 창경궁 일대)으로 물러나게 된다.

이같은 세조의 즉위 과정은 명분과 정통성이 결여돼 있었다. 이에 반발한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등 집현전 출신 학자들은 세조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단종 복위를 은밀히 계획했다. 기회는 1456년 6월 창덕궁에서 열릴 예정인 명나라 사신과의 연회였다. 성삼문의 아버지인 성승과 유응부가 왕의 호위 무사인 ‘별운검(別雲劍·큰 칼을 차고 임금을 옆에서 모시던 무관의 임시 벼슬)’으로 선정됐기 때문이다. 이들의 계획은 연회 도중 별운검들이 세조와 그 측근들을 처단하고 상왕 단종을 다시 복위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거사를 함께 도모하던 김질이 두려움을 느끼고 장인 정창손에게 사실을 털어놓으며 세조에게 밀고한다. 이를 접한 세조는 성삼문, 박팽년 등 주동자들을 친국(임금이 직접 심문함)하며 잔혹하게 고문한다. 이 과정에서 박팽년은 “성승·유응부·박쟁이 모두 별운검(別雲劍)이 되었으니,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어제 연회에 그 일을 하고자 하였으나 마침 장소가 좁다 하여 운검(雲劍)을 없앤 까닭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세조실록4권, 세조 2년 6월 2일)” 라며 거사 계획을 털어 놓는다. 눈치빠른 한명회가 무사들의 연회장 입장을 막아서면서 단종을 다시 왕좌에 올리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이 사건의 여파는 상왕 단종에게까지 미쳤다. 세조를 중심으로 한 공신 세력들은 단종 복위 운동의 싹을 잘라버리기 위해 단종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결국 단종은 상왕의 지위를 박탈당하고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어 영월 청령포로 유배 보내지게 된다. 세조실록은 유배지의 구체 지명을 상세히 남기지 않았고, 후대에 ‘청령포’ 서사가 기억과 기록으로 덧씌워지며 확장된다. “단종 대왕께서 임금의 자리를 물려준 다음 해인 병자년(1456)에 영월 청령포에 옮겨 갔을 때는 마침 늦은 봄이었습니다. (중략) 깜빡 잠이 들었는데 갑자기 사육신(死六臣)이 꿈에 나타나서 마치 살았을 때와 같이 억울한 사정을 하소하였다고 합니다.(고종실록40권, 고종 37년 5월 11일)” 영화 ‘왕과 사는 남자’는 이렇게 시작된다.
세조 3년(1457년) 6월, 상왕에서 노산군으로 강등된 단종은 유배지인 영월로 떠난다. 조선왕조실록은 이를 매우 간단하게 기록하고 있다. “노산군(魯山君)이 영월로 떠나 가니, 임금이 환관 안노(安璐)에게 명하여 화양정에서 전송하게 했다.(세조실록8권, 세조 3년 6월 22일)” 단종은 자신을 배웅하러 온 안노에게 “성삼문의 역모를 나도 알고 있었으나 아뢰지 못하였다. 이것이 나의 죄”라며 체념 섞인 자책을 남겼다.
단종이 영월로 내려간 사이, 순흥에 유배돼 있던 단종의 숙부 금성대군(1426~1457·이유)은 또 다른 반전을 꾀하고 있었다. 그는 순흥 부사 이보흠과 결탁해 영천과 안동의 군사를 모아 단종을 복위시킨다는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그는 “군주가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 하는데, 내가 어찌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겠는가(세조실록8권, 세조 3년 7월 3일)”라며 안동에 있는 자신의 가동들까지 합세해 병사를 모으려 했다. 하지만 이보흠이 금성대군의 역모를 고발하면서 두 번째 복위 운동은 허망하게 끝나게 된다.
이 사건은 단종의 죽음을 재촉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양녕대군과 영의정 정인지 등 벼슬아치들은 “노산군이 종사에 죄를 지었고, 금성대군이 불궤를 도모했다”며 끊임없이 이들의 처단을 주청했다. 결국 세조는 금성대군에게 사약을 내리고 관련자들을 처벌한다. 조선왕조실록은 이때의 상황을 “노산군이 이를 듣고 또한 스스로 목매어서 졸(卒)하니, 예(禮)로써 장사지냈다(세조실록9권, 세조 3년 10월 21일)”고 짧고 건조하게 기록하고 있다.

당대기록(세조실록)에는 단종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돼 있다. 하지만 영화 ‘왕과 사는 남자’는 단종의 죽음을 후대의 기록(숙종실록·숙종실록33권, 숙종 25년 1월 2일)이나 야사에서 가져오고 있다. 특히 야사는 단종의 최후를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연려실기술(제4권·단종조고사본말)’에 따르면, 금부도사 왕방연이 사약을 들고 영월에 도착했지만 차마 들어가지 못하고 엎드려 울기만 했다고 했다. 이때 항상 단종을 모시던 한 통인(공생)이 자청해 단종이 앉은 좌석 뒤의 창문으로 활줄을 걸어 당겨 목을 졸랐다는 것이다. 17세 단종이 세상을 떠난 직후, 목을 조른 통인은 아홉 구멍에서 피를 쏟으며 즉사했고, 맹렬한 폭풍우가 몰아쳐 지척을 분간할 수 없었다고 기록돼 있다. 시녀와 시종들 역시 영월 동강에 몸을 던져 둥둥 뜬 시체가 강을 가득 메웠다고 한다.

단종의 억울한 죽음은 훗날 전설로까지 이어졌다. ‘금계필담’에는 단종 승하 후 부임하는 영월 부사들이 연이어 급사하는 기현상이 벌어졌다고 전한다. 담력 있는 한 신임 부사가 부임 첫날 밤, 곤룡포를 입은 단종의 혼령을 만나게 된다. 혼령은 “아직도 그 활줄이 내 목에 매어져 있으니 아픔을 참을 수 없다”라며 고통을 호소했다. 이에 부사는 과거 호장이었던 엄흥도를 불러내어, 동강에 버려진 뒤 남몰래 모셔두었던 단종의 옥체를 찾아갔다. 실제로 관을 열어보니 단종의 목에 활줄이 그대로 감겨있었고, 부사가 즉시 이를 풀고 예를 갖춰 장사지낸 것이 오늘날의 장릉(莊陵)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