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신 수습 금지’ 엄명 어긴 엄흥도 영월 떠나 숨어 지내…사후 사육신과 함께 창절사에 배향
[일요신문] 영화 ‘왕과 사는 남자’를 관람한 관객들이 극장을 나서며 가장 궁금해 한 부분은 그 이후 이야기다. 시신을 거두는 자가 있다면 삼족을 멸한다는 엄명을 어긴 엄흥도(유해진 분)와 그의 아들 태산(김민 분)은 어떻게 됐을까. 또 윤노인(오달수 분), 막동아범(이준혁 분)과 막동어멈(김수진 분) 등 광천골 사람들은 어떻게 됐을까.
물론 영화 속 캐릭터는 상상으로 창조된 인물이 많다. 다만 실존 인물인 엄흥도, 그리고 당시 영월 사람들에 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공식 기록과 각종 민간 편찬물, 야사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기사에는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엄흥도의 존재가 공식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중종실록'이다. 사진=영화 ‘왕과 사는 남자’ 스틸컷
엄흥도에 대한 공식 기록은 단종이 사망(1457년)하고 60여 년이 흐른 1516년(중종 11년)에 처음 등장한다. ‘중종실록’에는 어명을 받고 노산군의 묘를 찾아 제사를 지낸 뒤 돌아온 우승지 신창이 “고을 아전으로 이름이 엄흥도라는 자가 곡하며 관을 갖추어 장사 지냈다”고 보고한 내용이 나온다. 노산군은 단종의 사망 당시 신분으로, 세조는 단종을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보내며 노산군으로 강봉(벼슬의 품계나 녹봉을 낮추는 처분)했다.
아전은 조선 시대에 중앙과 지방 관청에 소속돼 행정 실무를 담당하던 중인 계층의 하급 관리다. 엄흥도는 ‘호장’으로도 알려져 있다. 조선 전기에는 아전들 가운데 최고위직을 호장이라고 불렀다. 엄흥도는 강원도 영월의 호장인 아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에서는 호장이 아닌 영월 산골 마을 광천골 촌장으로 묘사된다.
‘아성잡설’ 등 야사에는 더 구체적인 내용이 나온다. 노산군의 시신을 수습해 눈이 쌓인 산속으로 도망가던 엄흥도 때문에 잠을 자던 노루 한 마리가 깜짝 놀라 달아났고, 눈이 쌓이지 않아 그 자리에 시신을 암장했다고 한다. 영화에는 엄흥도가 노루를 사냥하려는 장면, 노루골이라는 마을을 다녀온 뒤 자신의 마을도 유배지가 될 수 있도록 애쓰는 장면 등에서 ‘노루’가 자주 등장하는데, 이런 야사 때문으로 보인다.
세조는 ‘노산군의 시신을 거두는 자가 있다면 삼족을 멸한다’는 엄명을 내렸다. 야사에는 엄흥도는 노모를 위해 미리 준비해 두었던 관과 수의로 노산군의 장사를 치른 뒤 영월을 떠나 종적을 감췄다고 한다.
KPI뉴스에 따르면 1900년과 1902년 예천과 울산에 살고 있던 엄흥도 후손들 사이에서 종가 혈통 경쟁이 벌어졌다고 한다. 실제로 예천과 울산 등에 영월 엄씨 집성촌이 형성됐다. 영월을 떠난 엄흥도가 ‘삼족을 멸한다’는 엄명에 가문을 지키기 위해 가족을 다른 지역으로 흩어지게 했기 때문이다. 엄흥도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를 예천, 셋째를 울산으로 보낸 것으로 전해진다. 엄흥도는 둘째 아들과 함께 군위로 떠났다고 한다. 영화에는 엄흥도에게 ‘태산’이라는 아들 한 명만 나오는데, 태산은 영월을 떠나 다른 지역에서 숨어 지냈을 것으로 보인다.
엄흥도는 군위에서 생을 마감했다. 묘소는 군위군 산성면 화본리에 위치해 있다. 숙종 24년(1698년) 노산군이 단종으로 복위되면서 엄흥도는 공조좌랑(정6품)으로 추증(사후에 관료의 품계나 직급을 높이거나 관직 없이 죽은 사람에게 관직을 내리는 일)됐고, 이후 사육신과 함께 영월의 창절사에 배향됐다. 영조 때는 공조참의(정3품)로, 다시 공조참판(종2품)으로 추증됐다. 순조 33년(1833년)에는 공조판서(정2품)로 추증됐고, 고종 13년(1876년)에 ‘충의’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영월 산골마을 광천골 사람들은 단종 사후에도 무탈하게 지낸 것으로 보인다. 사진=영화 ‘왕과 사는 남자’ 스틸컷
영월 산골마을 광천골 사람들도 무탈하게 잘 지낸 것으로 보인다. 영화 속 캐릭터는 창조된 인물들이지만 실제 당시 영월 사람들도 단종의 죽음을 매우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앞서 소개한 ‘중종실록’에 나오는 우승지 신창의 보고 내용에도 “고을 사람들이 지금까지 슬퍼하고 있다”는 내용이 나온다.
야사에 따르면 노산군 시신과 엄흥도 식솔이 사라지자 관에서 엄흥도 일가를 찾아 나섰지만 이들의 행방을 알고 있는 마을 사람들이 꽤 있었을 것임에도 아무도 관에 고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 마을 사람들은 노산군의 묘 역시 왕릉이라 부르며 그 위치를 알고 있었다고 한다. ‘중종실록’에 나오는 우승지 신창의 보고에도 “겨우 2척 높이의 무덤이지만 고을 사람들은 이를 ‘군왕묘’라고 불렀고, 비록 어린아이도 능히 식별하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단종의 죽음에 대해서는 기록마다 내용이 엇갈린다. ‘세조실록’에는 노산군이 스스로 목을 매 자결했다고 기록돼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선조실록’에 세조가 영월에 사약을 보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다른 기록을 보면 단종이 사약을 먹지 않고 하인 등에 의해 죽었다는 기록이 더 많다. ‘연려실기술’에는 노산군을 모시던 ‘통인’이 활줄을 이용해 노산군을 사망에 이르게 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통인은 시중을 드는 관청의 하급 실무 인력이다. 실존 인물인 엄흥도와 노산군이 영월에서 깊은 인연을 맺었다는 기록도 있다. 사진=영화 ‘왕과 사는 남자’ 스틸컷
영화 속 ‘광천골 촌장’ 엄흥도는 영월 호장 엄흥도와 통인을 더해서 창조된 인물에 가깝다. 엄흥도와 노산군이 영월 유배지에서 만나 깊은 인연을 맺는 과정이 영화의 중심인데 대부분 영화적 상상력을 통해 창작된 내용이다.
실존 인물인 ‘영월 호장’ 엄흥도와 노산군이 영월에서 깊은 인연을 맺었다는 기록도 있다. 순조 17년(1817년) 엄흥도의 후손들이 편찬한 ‘충의공엄선생실기’와 1900년에 엄흥도의 후손 엄주호가 고종에게 올린 상소문 등에 관련 내용이 담겨 있다.
노산군이 사육신을 만나는 꿈을 꾼 뒤 슬픔을 감추지 못하고 통곡했는데 산마루에 있던 엄흥도가 그 소리를 듣고 찾아가 노산군을 만나게 됐다는 내용이다. 그렇게 교류가 시작돼 거의 매일 만났다고 한다. 다만 이런 내용은 영월엄씨 가문 내에서 구전과 족보 등으로 전승돼 내려온 내용을 후대에서 집필한 것이라는 사실관계 확인에는 어느 정도 한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