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는 즉위 이후에 할머니 인목왕후(소성대비)와 고모 정명공주를 후하게 대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들 모녀를 지속적으로 감시했다. 그 원인은 인목왕후가 정치적 식견이나 처세에 능숙하지 못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여러모로 소시민적인 인물이었던 그녀는 유일하게 살아남은 딸 정명공주와 하나뿐인 사위 홍주원에게 줄 땅과 재물을 지속적으로 요구했고, 국왕만이 탈 수 있는 어구마를 사위에게 내려주며 인조의 권위를 슬슬 긁어대기 시작했다. 광해군 폐위의 명분 중 하나가 폐모살제이고 인조의 왕위를 인정해 준 사람으로 일단 숙여야 하는 입장이다보니, 겉으로는 늘 인목왕후를 우대했지만, 인조라고 그런 행동들이 기꺼울 리가 없었다. 결국 소성대비 사후에 정명공주에게 화살이 날아가게 된다.
1632년(인조 10년)에 소성대비가 죽은 지 얼마 뒤, 인조는 가벼운 병에 걸렸다. 그런데 이때 "정명공주가 저주 굿으로 왕을 저주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고, 그날부터 정명공주에 대한 감시와 경계가 강화되었다. 옛날 사람이라 미신을 잘 믿었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기물 몇 개 묻는 걸로 간단히 조작할 수 있는 굿과 저주는 왕실의 여인들을 역모에 엮어 넣을 때 가장 손쉽게 쓰이는 방법이다. 광해군 시기 대북이 칠서의 옥을 꾸몄을 때 그러했고, 뒷날 인조가 맏며느리 민회빈 강씨를 제거할 때도 그랬다.
인조는 자신의 병의 원인으로 정명공주로 지목했으나, 최명길 등은 "(인조)반정의 명분을 위해서라도 정명공주를 처벌해서 안 된다"고 주장해서 일단 정명공주는 위기를 넘겼다. 그러나 그녀는 인조가 죽을 때까지 감시를 받아야 했다. 그래서 더 이상 글을 쓰지 않고, 여염집 여인들처럼 바느질에만 몰두하며 숙이고 숨죽은 듯이 지냈다.
이 숨 막히는 감시는 1649년(인조 27년), 인조가 죽으면서 비로소 풀어졌으나 완전히 풀리지는 않았다. 인조의 아들 효종도 정명공주를 견제했고, 심지어 그녀의 궁녀를 죽이기까지 했다. 정명공주가 위협 없이 온전히 어른으로 대접 받은 것은 정통성으로는 누구도 비길 바가 없었던 숙종대에 이르러서 였다. 정명공주가 시집간 풍산 홍씨 가문은 홍봉한, 혜경궁 홍씨, 홍국영 등 영조와 정조 때 권력의 실세가 된다.
인조는 광해군의 사망 소식을 전해듣고 나름 조의를 표했고 의외로 광해군의 장례에도 꽤나 신경을 써줬다. 이미 쫓겨난지 20년 가까이 지났고 죽은 사람 악독하게 대해봤자 별 소용없다는 생각이라도 들었는지, 명목상 '유배지 죄인'이 죽은 것임에도 고관대작이 죽었을 때처럼 3일간 조회를 정지했다. 심지어 인조는 아예 소선(생선이나 고기가 들어가지 않은 상차림. 태종이 세종에게 소선을 하지 말라고 유언을 남겼던 일화는 유명)까지 하려고 했다가, 신하들이 너무 과하다고 반대하여 하지 않았다. 인조가 소선까지 하려 했다는 말은 달리 바꿔 말하면 광해군을 '폐주'가 아닌 '선왕'으로 취급해줬다는 의미이며 반정 당시 폐모살제를 외치며 광해군을 임금으로도 여기지 않던 모습과 비교하면 달라진 취급을 엿볼 수 있다.
사실 인조는 20년 간 임금 노릇하면서 속된 말로 현타가 많이 왔을 것이다. 우선 폐모살제의 명분이었던 인목왕후와 그 딸 정명공주 부부의 한심한 처세술을 보면서, '영창대군이 살아있을 때는 오죽했겠나.' 싶은 생각도 들었을 테고, 국제사회의 냉혹한 법칙을 무시하고 명분만 쫒았다가 두 번의 호란으로 굴욕이란 굴욕은 다 당해보면서 광해군에게 일종의 동병상련 같은 마음이 들었을 듯. 실제로 인조는 인목왕후가 승하하자마자 정명공주 내외를 철저하게 견제했고, 이 부부는 철저하게 숨죽여 살아야 했다. 여기에 더해 좋든 싫든 자기 삼촌이기도 하고 집안 어른이기도 하니 인조 입장에서도 모질게 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물론 폐위된 군주에게 조회까지 정지해가며 예우해준걸 보면 사심도 어느정도 있긴 한 모양이다.
즉위 이후 본인의 정통성 유지를 위해 자기보다 나이가 어리고 처세에 미숙한 어머니 인목왕후를 견제했던 광해군
즉위 이후 본인의 권위를 긁어대는 할머니 인목왕후 때문에 할머니 사후 자기보다 나이어린 고모 정명공주를 견제했던 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