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이 장군이 쓴 시
< 백두산의 돌은 칼을 갈아 다하고
두만강의 물은 말을 먹여 없애리
사나이 스무살에 나라평정 못 하면
훗날 누가 대장부라 하겠나 >

남이 장군
태종 이방원의 외손자로 17살에 무관 장원 급제를 하며
이시애의 난, 여진족 정벌을 행했다.
조선시대 무신 중 신앙의 대상으로 추앙받는 이들이 몇 있는데
그 중 한명이 세조 시절 남이 장군이다.
세조의 총애를 받아 26세 나이로 병조판서에 올랐다.
하지만 세조가 죽자 평소 남이장군에 승진과 세력 확장을 못마땅하게 여긴 한명회, 신숙주, 유자광의 모함으로 처형 됐으며 그의 식솔들은 노비가 되었다.

한명회 / 신숙주
이 두사람은 세조가 죽고 예종이 즉위하자 남이장군은 병조판서를 수행할 능력이 없다며 비판을 하였고 살아생전 세조가 남이 장군을 예뻐하는것에 탐탁치 않았던 예종은 아무런 근거 없이 그를 병조판서 자리에 해임하였다.

유자광
남이장군이 고초를 겪는 것을 본 유자광은 기회로 삼아 < 사나이 스무살에 나라평정 못 하면 훗날 누가 대장부라 하겠나> 남이 장군이 쓴 시의 부분을 트집 잡아 이것은 역모라 하며 예종에게 모함 했다.

예종
예종은 원래 남이 장군을 좋아하지 않았다. 남이는 무예에 뛰어나고 강직한 성격으로 알려졌으며 세조의 사랑을 독차지 했다. 아들 예종은 그때문에 그를 시기하고 질투 했다.

남이장군의 묘
남이장군은 공주와 간음하였다는 소문이 날조 되어 크게 곤혹을 치뤘는데 이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 처형 당했다.
젊은 나이에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죽은 남이장군은 순조때 신하들의 상소로 복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