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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에 의해 폐위, 시해된 단종의 시신을 거두는 일은 당시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금기(禁忌)였다. 시신에 손을 대는 순간 삼족이 멸하리라는 공포가 영월 땅을 짓눌렀다.
하지만 엄흥도는 밤의 어둠을 틈타 왕의 시신을 수습했다. 칼을 든 군사도, 녹을 먹는 관료도 아닌 한 명의 민초가 왕권의 폭력이 남긴 비극을 온몸으로 받아낸 것이다.
그의 충절은 일회성 용기에 그치지 않았다. 엄흥도는 가솔을 이끌고 깊은 은거를 택했다. 족보마저 없애며 세상과 절연한 채 스스로를 지웠다. 흥미로운 점은 당시 마을 사람들의 태도다. 관청이 사라진 그들의 행방을 쫓았으나, 주민들은 그들이 어디에 숨었는지 짐작하면서도 끝내 함구했다.
역사 정의의 회복은 200여 년 후에 찾아왔다. 숙종 대에 이르러 단종이 복위되자 엄흥도 역시 공조판서로 추증되며 ‘충의(忠義)’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가 밤새 눈물을 흘리며 시신을 안장했던 자리는 오늘날의 ‘장릉’(莊陵)이 되었고, 그의 이름은 그 능역의 수호자로 영원히 각인되었다.
놀라운 것은 이 ‘수습과 의리’의 정신이 가문의 전통을 타고 현대까지 이어졌다는 사실이다. 엄흥도의 직계 후손 엄항섭(嚴恒燮)은 일제강점기 임시정부에서 김구 선생의 곁을 끝까지 지키며 항일 투쟁의 중심에 섰다.
또 다른 후손 산악인 엄홍길은 히말라야의 차가운 눈 속에 갇힌 동료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목숨을 건 ‘휴먼원정대’를 이끌었다. 가문의 윤리가 시대에 따라 항일 정신으로, 또 동료애적 인본주의로 변주되며 생명력을 이어온 것이다.
역사는 대개 승자의 기록을 화려하게 장식하지만, 엄흥도의 선택은 패자의 마지막을 지켜낸 자가 쓴 소리 없는 기록이다.
그는 격문을 쓰지도, 창칼을 휘두르지도 않았다. 다만 버려진 시신을 정성껏 거두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 가장 인간적인 행위가 왕권의 폭압에 맞선 가장 강력한 저항이 되었고, 오늘날 우리에게 참된 충(忠)과 의(義)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