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하우 강제수용소는 나치 독일이 1933년부터 운영한 첫 번째 강제수용소로, 정치범, 유대인, 집시, 동성애자, 장애인 등 수많은 희생자가 수용, 학살된 곳이다.
부속시설까지 포함해서 최소 3만명이 굶주림, 질병, 학대 등으로 죽었다고 한다.
1945년 4월 29일, 다하우 강제수용소가 미 육군 미군 제45보병사단과 제42보병사단에 의해서 해방되었고 3만 2천명에 달하는 수감자들이 자유를 되찾았다.
해방 며칠 전에도 SS는 증거인멸을 위해 7000명을 강제로 행진시켰고 천명이 넘게 굶주림이나 탈진, 총살로 죽었는데, 수용소를 지키던 경비병들은 결국 잠깐 저항하다가 항복하였다.
미군이 수용소에 진입하기 직전, 그들이 처음 마주한 것은 수천 구의 시신이 쌓여 있는 '죽음의 열차'였다. 부헨발트 수용소에서 열차 안로 제대로 된 물과 음식 없이 끌려왔다가 굶어 죽은 사람들이었다.
수용소 곳곳의 수많은 시체들과 굶주림과 질병으로 참혹하게 방치된 수감자들의 모습을 목격한 미군은 깊은 충격과 분노에 빠졌다.
분노한 미군 병사들에 의해 항복한 수십 명의 SS 경비병들이 벽에 세워진 채 기관총 등으로 사살되었다.
조사에 의하면 석탄 하역장에서 16명이 총살되었고, B 감시탑에서 17명이 사살되었으며 그 외에도 여러명이 미군에게 살해당하거나 수감자들에게 맞아 죽었다. 치료를 거부한 군의관들도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 수감자들도 참여해 경비병들을 주먹, 발길질, 삽 등으로 구타해 살해했다. 몇명은 변장해서 도망가려고 했지만 이내 붙잡혀 맞아 죽었다고 한다.
최소 30에서 50명 사이의 경비병들이 미군과 수감자들에게 보복으로 살해당한 것으로 추측된다. (300명이라는 과장된 기록도 있다.) 이 중에는 당시 수용소를 맡은 지휘관이었던 하인리히 비커도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미군에서는 사건을 조사하고 군사재판을 고려했으나 조지 S. 패튼 장군은 상황을 고려해서 처벌하지 않겠다며 기소를 즉각 취소했다고 한다.
"이미 이 혐의들에 대해 조사를 시켰네. 전부 말도 안 되는 헛소리들이야. 자네와 자네 부하들에 관한 이 빌어먹을 서류들을 내 손으로 다 찢어버리겠네." - 패튼
어차피 죽을 놈들 빨리 보내줬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