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를 내기 위해서는 먼저 그 화를 자기 자신에게 정당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 화가 정당한 것이고, 그럴 만한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확신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화가 날 때 마음속에서 일종의 재판을 벌이는 것과 같다.

당신의 마음속에서 그 피고인은 재판장의 피고석에 서 있다. 당신이 검사이다. 당신은 그가 유죄라는 것을 알지만, 공정을 기하기 위해 재판관인 당신의 양심에게 먼저 그것을 입증해야 한다. 당신은 그가 당신에게 저지른 잘못들을 낱낱이 열거하기 시작한다. 피고의 행위 뒤에 감추어진 온갖 종류의 악의. 이중성, 극도의 잔인성을 주장한다. 그에게 인정을 베풀 가치가 없음을 당신의 양심에게 확신시키기 위해 당신른 그가 과거에 당신에게 저질렀던 많은 다른 잘못들을 들추어낸다.
실제 법정에서는 피고 측 역시 발언권을 가진 변호사가 있다. 하지만 마음속 법정에서 당신은 줄곧 자신의 화를 정당화시키기에 바쁘다. 감상적인 변명이나 믿음이 안 가는 해명, 용서를 비는 구차한 간청 따위는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 상대방 변호사에게는 발언권도 주지 않는다. 일방적인 논쟁을 통해 당신은 유죄를 확정해 나간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양심은 망치로 내리치면서 ‘유죄!’를 선언한다. 이제 당신은 그에게 화를 내는 것이 정당하다고 느낀다.

화를 내는 대부분의 경우는 기대가 무너진 데서 촉발된다. 우리는 때로 어떤 일에 너무 많이 집착하기 때문에 원하는 결과가 찾아오지 않으면 화를 낸다. 모든 원하는 결과는 미래에 대한 기대이며 예측이다.
지금쯤 우리는 미래가 불확실하며 예측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미래에 대한 기대, 다시 말해 자신이 원하는 결과에 너무 의존하는 것은 많은 문제를 불러온다.

문제는 화를 낼 때 우리가 화를 즐긴다는 것이다. 화에는 중독성이 있고 묘한 쾌감이 있다. 그리고 우리 인간은 쾌감을 주는 것을 쉽게 버리지 못한다. 그러나 화에는 위험도 뒤따르며, 그 결과는 쾌감의 정도를 능가한다.
때로는 당신의 배우자가 ‘분노를 먹고 사는 악마’가 될 수도 있다. 배우자에게 화를 내보라. 그러면 그는 더 나빠질 것이다. 더 독해지고, 더 냄새가 나고, 언어 사용에 있어서도 더 공격적이 된다. 당신이 그에게 화를 낼 때마다, 심지어 생각 속에서 화를 내도, 문제는 한 뼘씩 커져 간다.

고통 역시 ‘분노를 먹고 사는 악마’이다. 우리가 마음속으로 화를 내면서 ‘고통이여, 어서 물러가라! 이곳은 네가 있을 자리가 아니야!’ 하고 소리칠 때마다 고통은 몇 센티미터씩 더 커지고, 여러 방식으로 나빠진다. 고통처럼 공격적이고 기분 나쁜 대상을 친절히 대하기는 힘든 일이다. 하지만 우리 삶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을 때가 종종 있다. 앞에서 말항 내 치통의 경우처럼, 우리가 진심으로 마음을 열고 고통을 환영할 때, 그것은 작어지며 문제가 줄어들고 때로는 완전히 사라지기까지 한다.
몇몇 암의 경우도 우리의 몸, 우리의 왕좌에 추하고 불쾌한 괴물의 모습으로 앉아 있는 ‘분노를 먹고 사는 악마’이다. 그 괴물에게 “이곳에서 썩 나가! 네가 있을 곳이 아냐!” 하고 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다른 모든 방법이 실패했을 때, 또는 어쩌면 그 전에라도 우리는 ‘너를 환영한다’ 하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떤 암들은 스트레스를 먹고 산다. 그렇기 때문에 그 병들은 ‘분노를 먹고 사는 악마’인 것이다. 그런 종류의 암들은 ‘왕궁의 왕’이 용기 있게 “암이여, 네가 무엇을 하든 내 마음의 문은 너에게 활짝 열려 있다. 들어오라!” 하고 말할 때 훨씬 순종적인 태도로 반응한다.

분노는 관계를 파괴하고 우리를 주위 사람들로부터 갈라놓는다. 여러 해 동안 사이좋게 지내다가 한 번의 실수로 심한 상처를 입고 화를 내며 영원히 관계를 끝내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우리가 함께한 그 모든 아름다운 순간들(998개의 잘 쌓은 벽돌들)은 세어 보지도 않는다. 오로지 한 번의 끔찍한 실수(두 개의 잘못 놓인 벽돌)만을 보고 전체를 파괴하는 것이다. 그것은 공정한 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