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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민주평화론의 한계: 선택된 기억과 잊혀진 전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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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1.27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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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End of Democratic Peace: Selected Memories and Forgotten W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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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fmkorea.com/9422684717 능력주의의 위기: 승자의 오만과 패자의 굴욕을 넘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재임 기간은 전 세계 외교가에 거대한 파열음을 남기고 있다. 우호국과 동맹국을 가리지 않고 쏟아부었던 무차별적인 관세 폭탄, 덴마크 자치령인 그린란드 매입 의사가 거절당하자 그린란드를 침공하여 합병하겠다고 공개적으로 밝힌 사례 등이 대표적이다. 전통적인 우방에 대한 배려가 실종된 이 소란스러운 과정 속에서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힘을 잃고 무너져 내린 사상이 하나 있다. 바로 '민주주의 국가끼리는 서로 싸우지 않는다'는 오랜 믿음, 즉 "민주평화론(Democratic Peace Theory)"이다.
 
한국과 유럽을 비롯한 서방 세계의 시민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다. "어떻게 민주주의 시스템을 갖춘 국가가 동맹에게 이럴 수 있는가"라는 배신감 섞인 물음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대중적 충격과 달리, 국제정치학계의 기류는 사뭇 달랐다. 학계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민주평화론의 논리적 허점을 지적해 왔으며, 더 나아가 민주주의라는 정치 체제 자체의 배타성과 공격성에 대해 굉장히 냉정하게 평가해 왔기 때문이다. 즉, 트럼프의 행보는 설명 불가능한 기행이라기 보다는, 그동안 이상론에 가려져 있던 민주주의 국가의 이기적인 민낯이 드러난 사례에 가까웠다.
 
'민주국가는 선하며 평화적'이라는 막연한 신화는 이제 유효하지 않다. 감정적인 억울함을 넘어 냉철한 현실 인식이 필요한 시점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그동안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민주평화론에 대한 학계의 냉정한 비판들을 정리해 보도록 하겠다.

60005.jpg 민주평화론의 한계: 선택된 기억과 잊혀진 전쟁들

[https://press.umich.edu/isbn/9780472083435]
[Anthony Downs, An Economic Theory of Democracy (Harper, 1957) 유권자는 한 표가 결과를 바꿀 확률이 거의 0에 가깝기 때문에, 정치 정보를 수집하는 데 큰 비용을 들일 유인이 없다는 다운스의 주장과 이후 축적된 정보·참여 연구를 정리하였다. 유권자 무지, 낮은 투표율, 정보 비용 문제를 다양한 사례와 모형으로 검토한다.]
[Kyklos_01/01_003-124_3AK]
[Bryan Caplan, “Rational Ignorance versus Rational Irrationality.” 유권자는 무지할 뿐 아니라,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 믿으려는 합리적 비이성(rational irrationality)까지 보인다고 주장한다.]
[Book Review: Christopher H Achen and Larry M Bartels, Democracy for Realists: Why Elections Do Not Produce Responsive Government - Spiro Metaxas, 2017]
[이른바 “국민이 정책을 평가하고 책임을 묻는다”는 포크 이론(folk theory)를 정면 비판한다. 유권자의 정당 선택은 정책보다 사회적 정체성(계층, 인종, 종교, 지역) 에 크게 좌우된다.]
[https://www.amazon.com/Democracy-Realists-Elections-Responsive-Government/dp/0691178240]
[크리스토퍼 에이컨 & 래리 바텔스 (C. Achen & L. Bartels) 현실주의자를 위한 민주주의 Democracy for Realists) (2016)]
[맹목적 회고 투표 (Blind Retrospection): 1916년 뉴저지 상어 습격 사건, 가뭄, 홍수 등 정부의 책임이 아닌 자연재해에도 유권자들이 집권당을 응징한다고 한다. 유권자는 미래를 보고 투표(전망적 투표)하는 게 아니라, 현재 자신의 기분이 나쁘면 무조건 집권당을 심판(회고적 투표)하는 경향이 있으며, 이는 민주적 책임성(Accountability)이 작동하지 않음을 시사한다.]
[https://www.amazon.com/Uncivil-Agreement-Politics-Became-Identity/dp/022652454X]
[릴리아나 메이슨 (Lilliana Mason)의 무례한 합의 (Uncivil Agreement) (2018) "왜 정책에 동의하면서도 상대 당을 혐오하는가?"를 다룬다. 메이슨은 현대 유권자의 투표 행위가 정책 선호가 아니라 '사회적 정체성(인종, 종교, 지역 등)'이 하나로 겹쳐지면서(Sorting) 발생한다고 분석한다. "내가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대방을 박살 내기 위해서" 투표하는 현상을 설명하며, 정치가 정책 대결이 아닌 '부족 전쟁'이 된 원인을 규명한다.]
[Erosion or decay? Conceptualizing causes and mechanisms of democratic regression]
[민주주의 후퇴 메커니즘을 정리하면서, 정당 시스템의 극단화·대표성 붕괴·포퓰리즘을 주요 요소로 다룬다.]

민주평화론은 사실 두 가지 주장을 포함한다. 첫째, 민주국가끼리는 서로 전쟁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는 1945년 이후 데이터에서 어느 정도 통계적 상관관계를 보인다. 둘째, 민주국가는 전반적으로 평화적이라는 주장—이는 수많은 반례로 완전히 반박된다. 이 글은 첫 번째 주장이 왜 인과관계가 아닌 허위 상관관계인지, 그리고 두 번째 주장이 왜 역사적으로 거짓인지를 모두 설명해 보도록 하겠다.
 
합리적 유권자는 없다: 선거의 한계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민주주의의 꽃이라 불리는 '선거' 그 자체에 있다. 우리는 흔히 유권자가 국가의 이익과 자신의 이익을 꼼꼼히 따져보고 가장 합리적인 후보에게 투표할 것이라 가정하지만, 현대 정치학의 연구 결과들은 이러한 믿음을 산산조각 낸 지 오래다. 경제학자 앤서니 다운스(Anthony Downs)는 이미 1957년 그의 저서 《민주주의의 경제적 이론》에서 '합리적 무지(Rational Ignorance)'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한 명의 유권자가 복잡한 정책을 공부하기 위해 들이는 시간과 비용에 비해, 내 표가 선거 결과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확률은 0에 수렴한다. 따라서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골치 아픈 정치를 공부하는 대신 '아무나' 찍는 것이야말로 가장 경제적이고 합리적인 선택이 된다. 역설적이게도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는 시민은 '현명한 주권자'가 아니라, 비용 대비 편익 계산에 실패한 '바보'가 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공부하지 않은 유권자는 무엇을 보고 투표하는가? 그들은 자신의 이익조차 대변하지 못한다. 크리스토퍼 에이컨과 래리 바텔스는 그들의 저서 《현실주의자를 위한 민주주의》에서 유권자들이 정책적 지향점보다는 '사회적 정체성'이나 선거 직전의 '순간적 감정'에 휘둘린다고 지적한다. 유권자들은 마치 스포츠 팀을 응원하듯 투표하며, 심지어 가뭄이나 상어의 출몰 같은 정부가 통제할 수 없는 재난에 대해서도 집권당에 분풀이성 투표를 한다. 선거 캠페인 역시 이 점을 파고든다. 이성적인 정책 토론보다는 유권자 집단의 트라우마나 공포를 자극하는 후보가 승리하게 된다. 즉, 선거는 '누가 더 나은 해법을 가졌는가'를 가리는 장이 아니라, '누가 더 대중의 분노를 잘 자극하는가'를 겨루는 감정의 전쟁터로 변질되었다.
 
더 심각한 것은 다수결 제도가 필연적으로 불러오는 '대표성의 왜곡'이다. 승자독식 하에서 정치는 양당제로 수렴하기 마련이다. 여기서 후보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전체 유권자의 지지가 아니라, 당내 경선 승리를 위한 '정당 지지층의 절반+1표'다. 산술적으로 전체 유권자의 50%가 지지하는 정당이라면, 그중 25%만 확보해도 후보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현실은 더 암울하다. 정치 혐오로 인한 투표 포기층을 고려하면, 실제로는 전체 유권자의 10~15%에 불과한 강성 지지층(팬덤)만 장악하면 국가의 지도자 후보가 된다.
 
이 과정에서 과거 정치학의 정설이었던 '중위 투표자 정리(Median Voter Theorem)'—선거 승리를 위해 후보들이 점차 온건한 중도층으로 이동한다는 이론—는 설 자리를 잃었다. 10~15%의 강성 지지층은 타협 없는 선명성을 요구하고, 정치인은 재선과 공천을 위해 이들의 극단적인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결국 민주주의 시스템은 구조적으로 온건하고 평화적인 다수의 침묵보다는, 공격적이고 배타적인 소수의 목소리가 과대 대표되는 방향으로 진화해 왔다. 각종 '스트롱맨'의 등장은 민주주의의 오류가 아니라, 이러한 선거 공학이 낳은 필연적 결과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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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Crusade)이 된 외교: 책임지지 않는 지도자와 회색지대 전쟁
 
선거라는 불완전한 제도를 통과해 권력을 잡은 지도자 역시 민주평화론이 기대하는 '이성적 중재자'와는 거리가 멀다. 재선을 최고의 목표로 삼는 정치인은 외부의 적을 설정하고 갈등을 증폭시키라는 유권자의 압력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트럼프 행정부 당시 미네소타 등지에서 벌어진 불법체류자 단속(ICE) 강화나 전 세계를 상대로 한 관세 전쟁, 전통적 우방인 유럽과의 거친 설전은 지도자 개인의 기행이라기보다 지지층 결집을 위한 고도의 정치적 계산이었다. 지도자가 온건한 타협을 시도하는 순간, 국내 여론은 그를 '나약한 배신자'로 낙인찍기 때문이다. 국내 지지율이 떨어질 때 외부의 적을 만들어 내부를 결속시키는 '관심 전환용 분쟁(Diversionary Conflict)'의 유혹 앞에서, 선거를 앞둔 민주 국가의 지도자는 취약성을 노출할 수밖에 없다.
 
이 과정에서 민주주의 국가의 대외 갈등은 필연적으로 타협 불가능한 '도덕적 성전(Crusade)'으로 변질된다. 독재 국가의 지도자는 영토나 금전적 보상 등 이익(Interest)이 맞으면 언제든 거래를 하고 전쟁을 멈출 수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 지도자는 자국민을 설득하고 전쟁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상대국을 '악(Evil)'으로 규정해야만 한다. 악과는 타협할 수 없기에 전쟁은 끝장을 볼 때까지 계속된다. 19세기 사상가 알렉시 드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은 일찍이 "민주주의 국가는 전쟁을 시작하기는 어렵지만, 한번 시작하면 멈추기는 훨씬 더 어렵다"고 경고했다. 상대를 악마화한 뒤에 맺는 평화협정은 유권자들에게 패배로 비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민주주의의 자랑인 '의회'와 '제도'가 지도자의 독단을 막을 수 있을까? 역사는 '아니오'라고 답한다. 민주평화론자들은 전쟁을 일으키는 결정에 복잡한 절차가 필요해 전쟁이 억제된다고 주장하지만, 실제 현대사에서 대부분의 무력 충돌은 행정부의 "선 조치 후 승인"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아서 슐레진저 주니어(Arthur Schlesinger Jr.)가 그의 저서 《제왕적 대통령》에서 지적했듯, 현대의 대통령은 의회의 선전포고 권한을 우회하여 사실상의 전쟁을 수행한다. 의회는 이미 파병된 군인의 안전과 애국심을 볼모로 잡힌 채 사후적으로 예산을 승인하는 거수기로 전락하기 일수다.
 
더욱 모순적인 것은 전쟁 실패에 대한 '책임의 비대칭성'이다. 칸트(Kant)를 비롯한 고전적 평화론자들은 민주 국가의 지도자가 전쟁의 참화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두려워해 평화를 택할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이라크 전쟁을 일으킨 조지 W. 부시와 토니 블레어를 보라. 그들은 수많은 사상자를 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지지율 하락이나 정계 은퇴 정도의 '명예로운' 불이익만을 겪었다. 반면, 사담 후세인이나 무아마르 카다피 같은 독재자들은 전쟁 패배 시 자신의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 역설적이게도 생존 본능만 따지고 보면, 전쟁을 더 두려워하고 신중해야 할 쪽은 민주 국가의 대통령이 아니라 독재자들이다.
 
보이지 않는 전쟁: 비밀 공작과 폭력의 외주화
 
민주평화론이 가진 또 하나의 치명적 결함은 '대규모 병력이 충돌하는 전면전'만을 전쟁으로 규정함으로써, 현대의 은밀하고 교묘한 분쟁들을 의도적으로 소거한다는 점이다. 민주주의 국가의 지도자들은 전쟁에 따른 여론의 역풍과 정치적 비용을 피하기 위해, 공식적인 선전포고 대신 정보기관(CIA 등)을 앞세운 '비밀 공작(Covert Action)'이나 '쿠데타 사주'라는 우회로를 통해 타 민주국가의 정권을 전복시켜 왔다. 특히 1953년 이란의 모사데크, 1954년 과테말라의 아르벤스, 1973년 칠레의 아옌데 정권은 모두 합법적인 선거를 통해 선출된 민주 정부였으나, '민주주의의 수호자'를 자처한 미국에 의해 무참히 전복되었다. 이는 민주평화론을 지탱하는 두 가지 핵심 기둥인 '규범적 설명'과 '제도적 설명'을 동시에 무너뜨리는 결정적 반례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민주평화론자들은 "민주국가는 대화와 타협의 규범을 공유하므로 싸우지 않는다"고 주장하지만, 미국은 칠레 국민이 선출한 아옌데 대통령을 무력으로 축출함으로써 상대의 민주적 정당성을 짓밟았다(규범의 실패). 또한 "의회와 언론의 견제가 지도자의 독단을 막는다"는 주장 역시, 의회의 감시망을 벗어나 은밀하게 수행된 CIA의 공작 앞에서 무력화되었다(제도의 실패). 결국 "공개적인 전쟁은 하지 않지만, 은밀한 전복은 서슴지 않는다"는 것은 평화의 증거가 아니다. 그것은 단지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전쟁터를 옮긴 '폭력의 아웃소싱'일 뿐이다.
또한 오늘날의 민주 국가들은 피 흘리는 전쟁 대신 드론 공격, 사이버 테러, 선거 개입, 그리고 경제를 무기화한 관세 폭탄과 같은 '회색지대(Gray Zone)' 분쟁을 끊임없이 벌이고 있다. 기후위기 대응과 같은 인류 생존의 문제조차 자국 우선주의 선거 공약 앞에서는 헌신짝처럼 버려진다. 직접적인 사상자가 적다는 이유만으로 민주주의 국가 간의 관계를 '평화'라고 부르는 것은, 총성 없는 전쟁터에서 벌어지는 현실에 눈을 감는 지적 태만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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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민주주의가 아니라서 그렇다"?
 
민주평화론에 대한 최근 비판은, 이 이론이 “민주주의는 본질적으로 평화적”이라는 가설을 방어하기 위해 개념과 정의를 사후적으로 비틀고 있다는 점을 정조준한다. 전쟁·내전·분리 독립이 민주주의 과정과 결합해 나타난 수많은 사례들이 있음에도, 이를 모두 “아직 진짜 민주주의가 아니라서 생긴 예외”로 처리하는 태도는 순환 논리이자 책임 회피라는 지적이다.
 
‘진정한 민주주의’라는 순환 논리
 
민주평화론을 옹호하는 쪽에서는, 민주주의 국가 사이에서 전쟁이 발생할 때마다 “그 체제는 아직 공고화되지 않은 전환기 민주주의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해 왔다. 그러나 비판적 연구들은 이것이 전형적인 순환 논리와 “진정한 스코틀랜드인 오류”에 해당한다고 본다. 즉,  “성숙한 민주주의끼리는 싸우지 않는다.” 민주주의 국가로 분류되던 두 나라가 전쟁을 벌였다. “그렇다면 그 나라들은 진정한 민주주의가 아니었던 셈”이라고, 사후적으로 ‘민주주의’의 정의를 수정한다. 이렇게 되면 “민주국가는 평화롭다”는 명제는 반증 가능성을 잃고, 이론이 아니라 신념에 가까워진다. 동시에, 민주주의 제도 자체가 내포한 배제·폭력의 가능성, 그리고 다수결이 만들어내는 폭력과 분쟁을 제대로 다루지 않는다는 비판 또한 거세지고 있다.
 
선진국의 내전과 대리전: 북아일랜드의 비극
 
이러한 '정의의 조작'이 얼마나 기만적인지는 영국과 아일랜드 사이에 끼어 있던 북아일랜드 분쟁(The Troubles)의 사례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민주평화론자들은 영국과 아일랜드가 전쟁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만, 1960년대 말부터 1998년 벨파스트 협정까지 이어진 이 참극은 사실상 두 선진 민주주의 국가가 얽힌 '저강도 전쟁'이자 '내전'이었다. 영국 정규군이 투입되어 시가전을 벌였고, 3,500명이 넘는 사망자와 4만 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아일랜드 정부 역시 공식적으로는 평화를 외쳤으나, 내부적으로는 북아일랜드 무장세력에게 무기를 지원하려다 발각된 '무기 밀반입 사건(Arms Crisis)'이 터지는 등 분쟁의 당사자로서 깊숙이 개입해 있었다.
 
민주평화론자들은 결국 평화협정으로 마무리되었으니 "민주적으로 해결된 사례"라고 포장하려 든다. 하지만 공식적인 선전포고(Declaration of War)가 없었다는 이유만으로, 30년 가까이 이어진 총격전과 폭탄 테러, 그리고 수천 명의 희생자를 '평화'의 범주에 넣는 것이 과연 온당한가? 선진 민주주의 시스템조차 민족과 종교가 얽힌 내부 갈등 앞에서는 무력했고, 투표함보다는 총알이 더 빠른 해결책으로 통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서야, 이 비극을 단순한 '치안 문제'로 격하시킬 수는 없다.
 
나토 동맹국 간의 포격전: 대구 전쟁(Cod Wars)
 
영국과 아이슬란드 사이에서 벌어진 소위 '대구 전쟁(Cod Wars)'은 민주평화론의 맹점을 찌르는 또 다른 결정적 사례다. 1950년대부터 70년대까지 수차례 이어진 이 분쟁은 단순한 어업권 협상을 넘어, 양국이 해군 함정과 무장 경비함을 동원해 바다 위에서 물리적으로 충돌한 명백한 '군사적 대치'였다. 둘 다 나토(NATO)의 핵심 회원국이자 의회 민주주의가 정착된 선진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국의 경제적 이익(대구 어장)을 지키기 위해 상대 선박을 고의로 들이받고(Ramming), 그물을 끊어버리며, 실탄 위협 사격까지 가했다. 아이슬란드는 심지어 영국과의 국교 단절과 나토 탈퇴 카드까지 꺼내 들며 벼랑 끝 전술을 구사했다. 이는 민주 국가끼리도 국익, 특히 '먹고사는 문제' 앞에서는 '민주적 규범'을 집어던지고 얼마든지 무력을 동원해 멱살잡이를 할 수 있음을 보여준 실례다.
 
민주평화론자들은 이 명백한 무력 충돌 사례 역시 "전사자가 거의 발생하지 않았으므로(1,000명 미만) 학술적 정의상 전쟁이 아니다"라며 통계 데이터에서 슬그머니 제외하려 든다. 그러나 이는 전형적인 '골대 옮기기'이자 통계 조작이다. 정규군(해군)이 투입되어 수십 차례 선박이 충돌하고 외교 관계가 파탄 직전까지 갔던 사건을, 단지 '운 좋게 사람이 덜 죽었다'는 이유만으로 '평화로운 상태'로 분류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가? 만약 이 정도 규모의 군사적 충돌이 비민주 국가 사이에서 벌어졌다면, 학계는 주저 없이 이를 심각한 '국제 분쟁'이나 '국지전'으로 규정했을 것이다. 대구 전쟁은 민주주의 국가가 '착해서' 싸우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전면전으로 얻을 이익보다 손해가 더 클 때만 계산기를 두드려 '확전'을 자제할 뿐이라는 냉혹한 현실주의적 명제를 증명한다.
 
소거법으로 지켜낸 평화: 에콰도르와 페루의 정규전
 
눈을 중남미로 돌리면, 민주평화론의 방어 논리는 더욱 궁색해진다. 1995년 에콰도르와 페루 사이에서 벌어진 '세네파 전쟁(Cenepa War)'은 명백히 민주적 절차로 선출된 정부를 가진 두 국가가 벌인 정규전이었다. 국지전 수준을 넘어 공군력과 포병이 동원된 이 전쟁 앞에서, 민주평화론자들은 또다시 "남미의 민주주의는 아직 미성숙하고, 군부의 입김이 강했으므로 진정한 민주주의가 아니다"라는 핑계를 꺼내 들었다. 엄연히 선거로 뽑힌 대통령이 통치하고 있었음에도, 전쟁이 났으니 '진짜'가 아니라는 식이다.
 
이런 식의 논리라면 민주평화론은 무적이다. 비밀 공작으로 타국 정권을 전복시킨 미국은 '예외적 일탈'이라서 논외로 치고, 내전을 겪은 영국은 '국내 문제'라며 제외하고, 정규전을 벌인 중남미 국가들은 '수준 미달'이라며 배제해 버린다. 이렇게 입맛에 맞지 않는 반례들을 하나씩 '가짜 민주주의'나 '예외'로 낙인찍어 데이터에서 지워버리고 나면, 대체 지구상에 남는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는 누구란 말인가? 이는 현실을 설명하는 이론이 아니라, 자신들이 원하는 결론인 '평화'가 나올 때까지 데이터를 조작하는 통계적 속임수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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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와 ‘다수의 폭력’: 마이클 만의 논지
 
마이클 만은 민주주의를 본질적으로 평화적·인권 친화적인 체제로 보는 시각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그의 핵심 주장은, 인종청소·내전·대량 학살의 상당수가 오히려 민주화 과정, 특히 “누가 진정한 국민인가”를 둘러싼 투쟁과 맞물려 발생했다는 것이다. 그가 정리한 흐름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선거와 다수결은 특정 집단에게 “우리가 인구학적·정치적으로 다수가 될 수만 있다면, 영구 집권이 가능하다”는 유혹을 제공한다. 따라서 집권 엘리트는 소수를 국경이나 주/선거구 경계 밖으로 밀어내거나, "우리 시민이 아니다" 라고 은근슬쩍 배제하거나, 최악의 경우 폭력을 통해 제거하려는 전략을 택할 수 있다. 반대로, 미래에 영구적 소수로 전락할 것을 두려워하는 집단은, "이대로 가면 내가 찍는 후보는 항상 낙선만 하고, 당선된다고 해도 평생 야당만 된다" 라는 위기감에 “판 자체를 엎는” 선택—분리독립 시도, 내전, 외부 개입 요청—을 택하게 된다.
 
이 관점에서 보면, 민주주의는 단지 잘못 설계된 몇몇 예외 사례에서만 폭력을 낳는 것이 아니라, “국민/비국민, 다수/소수”를 가르는 과정 자체가 근본적으로 폭력적이라는 중요한 한계가 드러날 수밖에 없다. 다수결은 갈등 조정의 도구이면서 동시에, 특정 집단에게는 “영원한 2등 시민”이 되는 것을 강요하게 되는 것이다.
 
남북전쟁·인도-파키스탄·유고·분리독립 운동의 공통 패턴

이런 메커니즘은 역사적 사례들에서 반복적으로 관찰된다. 첫번째로 미국 남북전쟁을 꼽을 수 있다. 남부 엘리트는 링컨의 집권과 공화당의 부상을, 자신들의 경제·사회 체제가 연방 안에서 소수로 전락하는 전환점으로 인식했다. “연방 안에서 민주적 절차를 수용하면 영구적으로 우리는 다수결에서 밀려날 것이다”는 공포가 분리독립 시도로 이어졌다. 또한 인도–파키스탄 분할도 중요한 사례로 연구된다. 대규모 선거와 의회 정치가 도입되는 과정에서, 무슬림 엘리트는 거대한 다수 힌두교도 속에서 영구적 소수로 남을 것이라는 공포를 키웠고, 이는 수백만명에 달하는 대규모 유혈 사태와 분단으로 이어졌다. 세번째로 유고슬라비아 해체를 꼽을 수 있다. 공산체제 붕괴 후 선거 경쟁이 열리자, 각 공화국·민족 엘리트는 '우리 지역은 우리 민족이 다수니깐 민주주의를 통해 ‘자기 민족의 영구 지배’를 추구했고, 그 사이에서 경계선 갈등이 벌어졌다. 또한 그 과정에서 다수결 논리에 따라 자신들이 영구적으로 정치에서 배제되지 않을까 우려한 소수 또한 들고 일어났다. 오늘날의 카탈루냐·퀘벡·서부 캐나다(예: 앨버타) 등의 분리 움직임도, 규모와 폭력의 정도는 다르지만 “다수결 논리 속에서 특정 지역·집단이 자신들이 지속적으로 정치적인 의사결정에서 배제되는 소수로 남을 것이라는 불안"이 근본적인 원인이다.
 
이 사례들은 “민주주의가 아직 미성숙해서 겪는 성장통”이라기보다, 다수결·영토·정체성이 결합할 때 나타나는 결과라고 보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 민주주의는 갈등을 조정하는 동시에, “누가 진짜 국민인가”를 둘러싼 갈등을 폭발시킬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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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되지 않은 민주주의’와 내전: 선거가 뇌관이 된다

최근 분쟁 연구에서는 “민주주의가 부족해서 문제가 생겼다”는 추상적인 말 대신, 구체적으로 언제 어떤 종류의 선거가 폭력을 촉발하는지를 추적하는 작업이 중요해지고 있다. 여러 연구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메커니즘은 다음과 같다. 제도가 미성숙한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선거부터 도입될 때, 엘리트들은 정책 경쟁보다 민족·종파·부족 정체성을 앞세워 대중을 동원한다. 이 과정에서 선거는 정책 경쟁의 장이 아니라 “머릿수 세기”로 전락한다. 특히 다종족·다종파 국가에서는, 선거 패배가 곧 장기적인 자원 배분·안보·정체성 모두 영구적으로 다수결 논리에 따라 배제당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선거에서 패배한 집단은 다음 선거 때 경쟁을 하려는 생각보다는, 무력 동원·쿠데타·분리·외부 세력의 개입 요청 등 각종 극단적인 방법을 고민하게 된다.
 
팔레스타인 자치지역의 선거 이후 하마스와 파타 간의 분열, 리비아에서 카다피 제거 후 치러진 선거가 국가 통합이 아니라 지역·부족 기반 폭력을 심화시킨 과정, 다종파 국가들에서 정부 구성 문제가 곧 내전으로 비화한 사례들은 모두 이런 패턴의 극단적인 표출로 읽을 수 있다. 이때 선거는 갈등을 해결하기보다, 수면 아래 있던 정체성 갈등을 “이길 수밖에 없는 게임”으로 만들어 갈등을 폭발시키는 뇌관 노릇을 할 수 있다.
 
외부 개입과 국제전으로의 확장
 
내부 갈등과 선거 경쟁이 격화될수록, 국내에서 영구적 소수로 전락한다고 느끼는 집단은 자연스럽게 외부 후원자를 찾게 된다. 다수결 경쟁에서 이길 수 없다면, 국경 밖의 동족·후견국·강대국의 힘을 빌어 내부 균형을 뒤집으려 하기 때문이다. 다수파가 헌정·선거 절차를 활용해 자신의 장기적인 지배를 공고화하려 할수록, 소수파는 이를 “제도화된 배제”로 인식하고 외부 개입에 더 쉽게 기대게 된다. 외부 강대국 역시, 이런 균열을 지렛대로 활용해 영향력 확대·자원 확보·안보 완충지대 확보를 추구할 유인이 있다. 우크라이나 동부에서 나타났던 친러 성향 지역의 불안과 분노, 아프리카 신생 민주국가들에서 선거 직후 패배 집단이 인접국 동족·용병·민병대를 끌어들이는 경향, 중남미에서 내전·마약 카르텔·정치적 분열이 서방·지역 강대국의 개입과 얽혀 확전되는 패턴은 모두, “민주적 절차가 모든 갈등을 내부적으로 흡수·해결해 줄 것”이라는 기대가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지를 보여준다.
 
이때 민주평화론식 낙관주의—“선거가 치러지면 총성이 멈출 것”이라는 믿음—은, 위태로운 현실에서는 지나치게 낙관적인 가정에 가깝다. 다수결 게임의 설계, 권력 분점, 소수 보호, 연방·자치 논의, 선거 이전의 신뢰 구축 장치 등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선거만 앞세우는 것은, 불을 끄는 게 아니라 기름을 붓는 것이나 다름없다.
 
민주주의를 거부하는 약자: '보호자'로서의 독재와 중앙집권
 
민주평화론의 가장 큰 기만 중 하나는, 민주주의 도입을 반대하는 세력을 항상 '기득권'이나 '부패한 독재자'로만 규정해 왔다는 점이다. 그러나 역사책을 깊이 들춰보면 정반대인 경우가 허다하다. 오히려 사회적 약자나 소수 민족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 다수결 원칙의 도입을 결사반대하고, 차라리 황제나 식민 모국, 혹은 강력한 중앙 정부의 통제를 간절히 원했던 사례는 차고 넘친다. 이들에게 선거와 투표함은 '해방의 도구'가 아니라, 지역 다수파의 횡포와 린치를 합법화해 주는 '공포의 상자'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설은 멀리 갈 것도 없이 미국의 역사에서 발견된다. 미국 독립전쟁 당시 원주민들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외치는 백인 정착민(민주파) 대신 영국 국왕을 지지했던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왕실은 법으로 정착민들의 확장을 제한해 주었지만, 민주공화국이 들어서면 "인구수가 많은 백인들이 투표를 통해 합법적으로 땅을 뺏고 학살할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이 공포는 수십 년 뒤 앤드류 잭슨이 엘리트가 아닌 '대중 민주주의(Jacksonian Democracy)'를 표방하며 집권했을 때 현실화되었다. 압도적인 백인 다수의 지지를 등에 업은 잭슨 행정부는 법과 제도를 총동원해 원주민들을 수천 킬로미터 밖 황무지로 내몰았다. 남북전쟁 직후의 흑인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해방된 흑인들은 남부 주들의 '자치권(민주주의)' 회복을 두려워했고, 오히려 연방 군대에 의한 강압적인 군정(Military Rule)이 유지되기를 바랐다. 실제로 미군이 철수하고 민주적인 지방 자치가 부활하자마자, 다수를 점한 백인들은 투표를 통해 짐 크로우(Jim Crow) 법을 만들고 KKK를 조직해 흑인들을 다시 지옥으로 몰아넣었다.

중남미와 브라질의 역사 또한 '민주주의=선, 군주제=악'이라는 도식을 산산조각 낸다. 중남미 독립전쟁 당시 수많은 원주민 부족이 "해방자"를 자처하는 독립군에 맞서 스페인 왕실 편에 섰던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왕실의 보호가 사라진 자리를 차지한 것은 '국민 주권'을 내세운 현지 백인 지주들이었고, 이들이 세운 민주 공화국은 칠레와 아르헨티나의 마푸체족 학살과 같은 조직적인 인종 청소로 귀결되었다. 브라질의 사례는 더욱 충격적이다. 1888년 브라질 황실이 '황금법'을 통해 노예제를 전격 폐지하자, 이에 격분하여 쿠데타를 일으키고 황제를 내쫓은 주축 세력은 다름 아닌 '공화주의자(민주파)'들이었다. 지주와 기득권 세력은 "황제가 사유재산(노예)을 침해했다"며 분노했고,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계몽된 황제'를 몰아내고 민주 공화정을 수립했다. 즉, 약자들에게는 민주주의가 억압의 도구였고, 오히려 권위주의적 군주가 자유의 수호자였던 셈이다.
 
인도 건국 과정에서 벌어진 간디와 암베드카르(B. R. Ambedkar)의 치열한 논쟁은 이 문제의 본질을 꿰뚫고 있다. 간디는 인도의 전통 촌락 공동체에 기반한 '풀뿌리 민주주의'를 이상향으로 그렸다. 그러나 불가촉천민(Dalit)의 리더였던 암베드카르는 이에 격렬히 반대했다. 그는 폐쇄적인 촌락 사회에서 다수결 민주주의를 시행할 경우, 상위 카스트가 똘똘 뭉쳐 소수인 불가촉천민을 영구적으로 학대하고 착취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암베드카르에게 촌락의 자치는 곧 '지역 토호들의 독재'일 뿐이었다. 결국 그는 소수자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차라리 강력한 중앙집권적 헌법과 공권력이 지역의 '민주적 편견'을 찍어 눌러야 한다고 믿었다.
 
근현대사에서도 이러한 패턴은 반복된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말기의 유대인과 소수 민족들 역시, 배타적 민족주의로 무장한 다수파가 지배할 의회보다는 합스부르크 황제가 소수자의 권리를 더욱 잘 보호해줄 것이라고 보고 충성을 바쳤다.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 종식 과정에서 흑백 혼혈인 '컬러드(Coloured)' 계층이 보여준 투표 성향은 충격적이었다. 백인 정권하에서 차별받던 그들이었지만, 막상 민주화가 다가오자 다수 흑인(ANC)의 지배를 두려워하여 오히려 자신들을 억압했던 백인 국민당(National Party)에 표를 던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과거에는 너무 검다고 차별받았지만, 미래에는 너무 희다고 배척당할 것"이라는 공포가 민주화에 대한 저항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집트의 콥트교도나 시리아의 기독교인들이 세속 독재 정권을 '이슬람 다수파'로부터 자신들을 지켜줄 방파제로 여겼던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민주평화론은 "모든 국민은 민주주의를 원한다"고 전제하지만, '준비되지 않은 다수결' 앞에서 약자들은 민주주의를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는 가장 위험한 적으로 인식하기도 했다.
민주주의의 근본적인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
 
이 모든 논의가 말하려는 바는, 민주주의가 “원래는 평화적인데 아직 덜 발달해서 문제가 생긴 것”이라는 식의 해석이 지나치게 관대한 자기 면죄부일 수 있다는 점이다. 다수결과 국민주권이라는 민주주의의 핵심 원리는, 잘 설계된 제도·권력 분산·소수자 보호가 갖춰져 있어야 갈등을 완화할 수 있으며, 그렇지 않을 경우 다수의 영구 지배·소수 배제라는 폭력적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분쟁과 내전을 모두 “민주주의가 아직 미성숙해서 생긴 예외”로 치부하면, 제도 설계·정체성 관리·연방·자치·권력 공유 등 민주주의의 설계 문제를 놓치기 쉬운 것이다.
 
cartoon-depiction-two-nation-theory.webp 민주평화론의 한계: 선택된 기억과 잊혀진 전쟁들
 
1945년 이전의 역사 누락: 선택 편향의 오류
 
민주평화론에 대한 학계의 또 다른 핵심적 비판은, 이 이론이 1945년 이후, 즉 냉전기라는 특수한 시공간적 환경에서 추출된 데이터에 과도하게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분석의 범위를 19세기와 20세기 초반으로 확장할 경우, "민주주의 국가는 평화적"이라는 가설은 통계적 유의성을 상실하거나 심각한 반례들에 직면하게 된다.
 
실제로 1945년 이후 서구 민주국가 간의 평화는 민주주의라는 정치 체제 때문이라기보다, 냉전 동맹(NATO), 핵 억지력, 그리고 마셜 플랜을 통한 경제 통합이라는 특수한 외부 변수들이 작동한 결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반면, 영국·프랑스·미국이 내부적으로 참정권을 확대하며 민주화를 진행하던 19세기는 역설적으로 역사상 가장 공격적인 제국주의 침략과 식민 정복의 시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평화론은 "식민지는 국가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편의적인 이유를 들어 이 수많은 침략 전쟁들을 데이터에서 배제해 버린다. 이는 이론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불리한 데이터를 고의적으로 누락시키는 '선택 편향(Selection Bias)'의 전형적인 사례다.
우선 19세기 서구 열강들의 제국주의 팽창 과정은 민주평화론과 모순된다. 당시 영국, 프랑스, 미국 등은 내부적으로 선거권 확대와 의회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있었으나, 대외적으로는 가장 공격적인 침략 전쟁을 수행했다. 만약 민주주의 시스템이 본질적으로 평화를 지향한다면, 이들 국가는 식민지에도 민주적 제도를 이식했어야 논리적이다. 그러나 당시 민주 국가들은 식민지 지배를 위해 피지배국의 참정권을 철저히 배제했으며, 의회는 이러한 침략 전쟁을 승인하고 예산을 지원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는 민주주의 제도가 평화의 기제가 아니라, 제국주의적 팽창을 위한 내부 합의 기구로 작동했음을 시사한다.
 
구체적인 전쟁 사례 역시 민주평화론의 '민주 국가 간에는 전쟁을 하지 않는다' 명제를 반박한다. 1898년 발발한 미국-스페인 전쟁이 대표적이다. 당시 스페인은 헌법과 의회(Cortes), 그리고 남성 보통선거권을 갖춘 입헌 군주제 국가로서, 당시 기준으로는 민주주의 국가의 범주에 포함된다. 그러나 미국과 스페인은 쿠바와 필리핀의 지배권을 두고 전면전을 벌였으며, 이는 민주적 제도를 갖춘 국가들 사이에서도 국익이 충돌하면 전쟁이 발생한다는 명백한 사례로 꼽힌다.
 
제1차 세계대전 또한 민주평화론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지점이다. 전쟁 발발 당시 독일 제국은 성인 남성 보통선거권과 강력한 정당 정치, 그리고 제국 의회(Reichstag)를 갖춘 입헌 국가였다. 또한 당시 발칸 반도의 신생 국가들 역시 서구식 의회와 헌법을 도입한 상태였으나, 이들 간의 전쟁은 인구의 약 10%가 사망할 정도로 근현대전 사상 가장 잔혹한 양상을 띠었다. 이는 민주주의 제도가 전쟁을 억제하기는커녕, 민족주의와 결합하여 총력전을 수행하는 동력으로 작용했음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제2차 세계대전의 원인이 된 아돌프 히틀러의 집권 과정은 민주주의 제도의 근본적 취약성을 드러낸다. 히틀러는 쿠데타가 아닌, 당시 가장 선진적인 민주 헌법이라 불리던 바이마르 공화국의 합법적인 선거와 의회 절차를 통해 총리직에 올랐다. 이는 "민주주의 국가는 합리적이고 평화적인 지도자를 선출한다"는 민주평화론의 기본 가정을 무너뜨리는 강력한 반증이다. 학계는 이러한 1945년 이전의 역사적 사실들을 종합할 때, 민주주의 여부와 평화 유지 사이에는 필연적인 인과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분석한다.
 
피 묻은 분리: '과정'을 소거한 평화의 기만
 
학계는 민주평화론이 1945년 이전의 역사와 국가 형성 과정에서 발생한 폭력을 의도적으로 소거함으로써 '사후적 평화'만을 강조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마이클 만(Michael Mann) 등이 지적하듯, 현재 평화로워 보이는 서구 민주 국가들의 상당수는 과거 인종 청소, 강제 이주, 학살, 내전 등 폭력적인 수단을 통해 내부의 이질적인 요소를 제거하고 단일 민족 혹은 안정적 다수파를 형성한 후에야 비로소 갈등을 멈췄다. 즉, 민주주의 시스템이 평화를 견인한 것이 아니라, 폭력적인 '동질화' 과정이 선행된 결과로서 평화가 정착된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인 '피 묻은 과정'을 전부 삭제한 채, "결과적으로 민주화된 국가들은 평화롭게 공존한다"고 결론짓는 것은 인과관계를 심각하게 왜곡하는 것이다. 실제로 유럽의 근대사에서 이러한 폭력적 인구 조정과 학살의 역사로부터 자유로운 국가는 극히 드물다.
 
인도와 파키스탄의 사례는 이러한 '분리를 통한 평화' 논리가 얼마나 허구적인지를 보여주는 결정적인 반례다. 양국의 분리 독립 과정(Partition)은 민주적 합의가 아닌 수백만 명의 사상자를 낸 거대한 학살극이었으며, 이후에도 평화는 정착되지 않았다. 실제로 1999년 발발한 카길 전쟁(Kargil War)은 민주적 선거 제도를 갖춘 두 국가 간에 벌어진 정규전이었으며, 현재까지도 카슈미르 지역에서는 저강도 분쟁과 테러가 지속되고 있다. 민주평화론을 옹호하기 위해 분리 과정에서의 대량 학살과 카길 전쟁과 같은 명백한 교전 기록을 데이터에서 배제하고, 단순히 "분리되어 각자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평화를 주장하는 것은 학술적 타당성을 결여한 무의미한 정의에 불과하다.

60006.jpg 민주평화론의 한계: 선택된 기억과 잊혀진 전쟁들
 
선진국은 착해서 안 싸우나? 평화의 진짜 이유들
 
인과관계의 전도: 평화가 민주주의를 낳았다
 
민주평화론은 “공고한 자유민주주의 국가들끼리는 거의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통계적 관찰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민주주의라는 정치 체제가 평화를 만들어낸 원인인지, 아니면 평화롭고 안전한 환경 덕분에 민주주의라는 사치스러운 체제를 채택할 수 있었던 것인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학계는 이를 심각한 '역인과관계(Reverse Causality)'의 오류라고 지적한다.
 
아자르 가트(Azar Gat)는 근대 이후의 폭력 감소가 민주화 때문이 아니라 산업화, 부의 축적, 그리고 핵무기와 장거리 타격 수단 등 '문명화된 전쟁 비용'의 획기적 증가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즉, 강대국 간의 총력전이 사실상 자살 행위가 되어버린 공포의 균형 위에서, 민주주의 국가들 간의 평화가 '관찰'되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는 민주주의가 평화를 만든 것이 아니라, 전쟁 억지력이 작동하는 환경이 민주주의 국가들의 생존을 가능케 했음을 시사한다.
 
프셰보르스키(Przeworski) 등의 연구(2000) 역시 이러한 인과관계의 역전을 강력하게 뒷받침한다. 데이터에 따르면 민주주의가 평화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부유하고 지정학적으로 안전한 국가"가 민주화에 성공할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다. 북유럽 국가들이 민주주의를 유지하는 건 그들이 평화애호적이라서가 아니라, 지리적으로 안전하고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했으며 인구 구성이 동질적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발칸이나 중동 같은 다민족·분쟁 지역에서는 민주화 시도가 오히려 폭력을 촉발했다. 결론적으로 '안정과 평화가 민주주의를 낳은 것(안정→민주주의)'이지, 민주주의가 평화를 낳은 것이 아니다. 민주평화론은 이 명백한 선후 관계를 뒤집어, 통계적 상관관계를 인과관계로 착각한 거대한 오류일 수 있다.
 
인구·기술·경제가 만든 ‘감당 안되는 전쟁 비용’

현대 선진국 사회에서는 전쟁의 정치적·경제적 비용이 과거와 질적으로 다르게 높아졌다. 고령화와 저출산으로 인해 병력 동원의 단위가 되는 청년 한 명의 정치·경제적 가치가 상승했고, 1차 대전식 대규모 인명 손실이 국내 정치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선택이 되었다는 분석이 다수 제기된다. 정밀유도무기·위성정찰·사이버·로봇 기술의 결합은 ‘기습적인 대규모 정규전’보다 제한적 타격·위임전·하이브리드 갈등의 비중을 키웠고, 산업·금융·데이터 인프라가 상호연결된 상황에서 전쟁은 패배뿐 아니라 “승리해도 손해 보는 장사”가 되기 쉽다. 가트가 말하듯, 근대 이후에는 전쟁이 더 비싸져서 줄어든 것이 아니라, 평화 시 협력과 교역이 훨씬 더 큰 이익을 주게 되었기 때문에 폭력이 기회비용 측면에서 덜 매력적이 되었다는 해석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렇게 보면 “선진국들이 싸우지 않는 이유”는 민주주의의 도덕성보다는, 인구·기술·경제가 만든 극단적인 비용-편익 불균형 쪽에 더 가깝다.
 
‘자본주의 평화론’과 경제적 상호의존

민주평화론에 대한 학계의 대표적 대안은 자본주의/상업 평화론(capitalist peace theory) 이다. 에릭 가츠키(Erik Gartzke)는 “The Capitalist Peace”에서 대규모 패널 데이터를 사용해, 민주주의 변수보다 시장 개방·자본 이동·외교적 선호의 유사성이 분쟁 감소와 더 강한 통계적 연관을 보인다고 주장한다.
 
기본 민주평화 모형에서는 “두 나라가 모두 민주국가일수록 군사적 분쟁 가능성이 낮다”는 효과가 관찰된다. 그러나 동일한 모형에 금융시장 통합, 경제발전, 외교적 선호 유사성(예: 유엔 총회 투표 패턴) 같은 변수를 추가하면, 민주주의 효과는 약화되거나 통계적으로 유의미하지 않게 되는 반면, 시장 통합·자본 이동성 변수는 강한 분쟁 억지 효과를 보인다. 가츠키는 이 결과를 근거로 “민주주의는 평화와 공존하지만, 평화를 만들어내는 핵심 메커니즘은 성숙한 자본주의와 경제적 상호의존”이라고 결론짓는다.
 
동시에 다른 연구자들(Mousseau 등)은 민주평화가 고도의 시장경제·서비스 경제화·부유한 중산층이 있을 때 함께 나타나는 허위 상관(spurious correlation) 이 아니냐는 문제제기를 해 왔다. 글로벌 공급망이 촘촘히 얽힌 상황에서, 전쟁은 적국보다 먼저 자기 금융·무역·기술 기반을 파괴하는 행위에 가깝다는 점도 이런 분석을 뒷받침한다.
 
‘다른 수단의 전쟁’과 민주평화론의 착시
 
오늘날 선진 민주국가들이 서로 대규모 지상전·포격전을 벌이지 않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전쟁을 하지 않는다”고 보기는 어렵다. 현실주의·안보연구 문헌에서는 간접적·비무력적 압박을 점점 더 전쟁의 연장으로 다루고 있다. 특히 금융 제재, 자산 동결, 결제망(SWIFT 등) 차단 수출통제, 기술·부품·소프트웨어 수출 제한, 비자·이동 제한, 투자 규제, 정보전·사이버공격, 민간군사기업(PMC)·대리세력에 대한 무기·정보 지원을 통한 대리전(proxy war) 등이 거론된다. 이러한 수단들은 명목상 ‘평시 정책’이지만, 상대국의 경제·사회·군사 능력을 체계적으로 마비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클라우제비츠가 말한 “정책의 연속으로서의 전쟁”의 현대적 변형으로 볼 수 있다는 해석이 늘고 있다.
 
따라서 “민주국가끼리는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진술은, 총성이 들리는 방식의 전쟁에 한정하면 어느 정도 통계적 근거가 있지만, 제재·정보전·사이버·대리전까지 포함한 폭력·강압으로 확장하면 의미가 크게 흐려진다.
 
공통의 적이 사라지면 악수는 끝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 민주국가들 사이의 결속 역시 “민주적 가치의 연대”만으로 설명되기 어렵다. 냉전기에는 소련과 동구권이라는 거대하고 명확한 지정학적 위협이 존재했고, 나토(NATO)와 미·서유럽 동맹은 민주주의 수호보다는 이 '공통의 적'에 대항하기 위한 생존 공동체에 가까웠다. 최근의 국제 정세는 이러한 '위협에 의한 평화' 가설을 더욱 뚜렷하게 입증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러시아의 재래식 군사력이 예상보다 약하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서방의 견고했던 단일대오는 즉각적으로 균열을 보이기 시작했다. 러시아라는 실존적 공포가 희석되는 순간, 유럽 각국은 경제적 부담을 이유로 '우크라이나 지원 피로감(Ukraine Fatigue)'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각자도생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
 
동시에 미국이 보여주는 행보 역시 민주평화론의 가정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방증한다. 러시아가 장기간의 전쟁으로 갈수록 한계를 드러내자, 미국은 유럽을 향해 "스스로 방어하라"며 안보 공약을 철회할 듯한 고립주의적 태도를 보이거나, 덴마크와 같은 오랜 우방에게 그린란드 매입을 제안하고 거절당하자 외교적, 군사적 위협을 가하기도 했다. 이는 민주주의라는 가치가 동맹을 지탱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외부의 적에 대한 공포만이 그들을 묶어두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외부의 위협이 변하거나 각국의 셈법이 달라지는 순간, 민주 국가 간의 관계도 언제든지 힘의 논리로 바뀔 수 있다는 현실이 드러난 것이다.
신화가 가리는 것은 무엇인가

종합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945년 이후 선진 민주국가들 사이의 낮은 전쟁 빈도는, 민주주의의 도덕적 우월성보다는 핵 억지, 경제발전, 지정학적 동맹, 인구·기술·시장 같은 변수가 만든 결과일 가능성이 크다. 자본주의 평화론·상업 평화론은, 민주주의와 평화의 상관관계 상당 부분이 고도 시장경제·금융통합·경제적 상호의존으로 설명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민주화 과정에서 나타난 폭력적 분리와 전쟁 리스크는, “민주주의=평화”라는 단순 도식이 얼마나 많은 예외와 조건을 필요로 하는지를 드러낸다. 선진 민주국가들은 전차전·포격전 대신 제재·공급망 통제·사이버전·PMC를 통해 갈등을 수행하고 있으며, 이는 “전쟁의 형식”이 바뀐 것일 뿐 갈등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 드러난다.
 
이런 이유로 오늘날 학계의 다수는, “민주주의 국가는 서로 총을 겨누지 않는다”는 식의 신념을 설명이 아니라 슬로건에 가깝다고 보고, 민주주의·자본주의·지정학·기술·인구가 어떻게 상호작용할 때 폭력이 줄거나 되살아나는지를 연구하는 쪽으로 초점을 옮기고 있다.

60007.jpg 민주평화론의 한계: 선택된 기억과 잊혀진 전쟁들
 
"모든 것은 우리의 특정 정치인, 미개한 너희 탓"… 민주평화론이 주는 위험한 면죄부
 
학계가 민주평화론을 단순히 '틀린 이론'을 넘어 '위험한 사상'으로 경계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이 이론이 필연적으로 '자기합리화'와 '남 탓'의 도구로 변질되기 때문이다. "민주국가는 선하고 평화롭다"는 도덕적 우월감을 전제로 깔고 들어가면, 민주국가가 자행한 전쟁이나 학살은 시스템의 결함이 아니라 "특정 미치광이 지도자 한 명의 일탈" 혹은 "우리가 잠시 민주주의답지 못해서 생긴 예외적 사건"이라는 식의 '꼬리 자르기'로 귀결된다. 이는 국가적 차원의 범죄에 대해 집단적 책임을 회피하게 만드는 면죄부가 된다.
 
2차 세계대전 직후 독일의 태도는 전형적인 사례이다. 최신 역사학 연구들은 당시 평범한 독일인들 상당수가 전쟁 범죄와 홀로코스트를 인지하고 있었으며, 나치당의 정책에 암묵적 혹은 적극적으로 동조했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있다. 그러나 전후 독일 사회와 서구 학계는 이 모든 책임을 '아돌프 히틀러'라는 개인과 나치 수뇌부에게 전가하는 길을 택했다. "바이마르 공화국이라는 훌륭한 시스템이 히틀러라는 악마에게 속아 타락했다" 같은 말은, 당시 독일에 만연했던 전체주의적 열광과 대중의 책임을 가리는 가장 편리한 핑계가 되었다. 즉, 민주평화론의 논리는 "우리는 본래 선량한 민주 시민이었으나, 나쁜 지도자에게 기만당했을 뿐"이라는 비겁한 변명을 정당화하는 논리적 도피처를 제공한다.

역사학자 크리스토퍼 브라우닝(Christopher Browning)의 "평범한 사람들(Ordinary Men)(1992)" 연구는 민주평화론의 '히틀러 탓' 서사를 산산조각 낸다. 브라우닝은 함부르크 경찰 예비대 101대대—평균 나이 39세, 나치 입당 전 성인이었던 '평범한 아저씨들'—가 폴란드에서 1,500명의 유대인을 총살하고 38,000명을 강제수용소로 이송한 과정을 추적했다. 놀랍게도 상부는 이들에게 '거부할 권리'를 명시적으로 제공했으나, 대다수는 동료 압력과 순응을 이유로 학살에 참여했다. 이는 '나쁜 지도자'가 '선량한 국민'을 속였다는 서사가 거짓임을 증명한다. 학살은 민주주의 사회의 정상적인 사회 구조—동료애, 권위 복종, 직업 윤리—를 통해 수행되었다.
 
이러한 '책임의 외주화'는 21세기 민주주의의 심장부인 미국, 영국, 호주에서도 유사하게 반복된다. 이라크 전쟁이라는 거대한 재앙 앞에서, 서구 사회는 그 원인을 시스템의 근본적인 결함에서 찾지 않았다. 대신 조지 W. 부시 개인의 인지부조화, '네오콘(Neocon)'이라는 특정 세력의 전횡, 혹은 전쟁 찬성표를 던졌던 힐러리 클린턴 같은 개별 정치인의 오판 탓으로 돌리는 데 급급하다. 영국과 호주 등 동맹국들 역시 "미국의 압박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며 슬그머니 피해자 행세를 하며 발을 뺀다. 이라크 침공 시, 의회는 이미 배치된 군인들의 안전을 볼모로 사후 예산 승인을 강요받았다. 언론은 정부 정보원에 의존해 '대량살상무기' 프레임을 무비판적으로 재생산했고, 여론은 애국주의 압박 속에서 침묵했다. 민주평화론이 상정하는 견제와 균형—의회·언론·시민사회의 감시—은 모두 작동하지 않았다. 이는 엄연한 시스템의 실패이나, "왜 선진 민주주의 시스템은 집단적 광기와 인지부조화가 전쟁으로 치닫는 것을 제어하지 못했는가"에 대한 처절한 반성이나, 이를 방지하기 위한 국가 차원의 백서(White Paper)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 결과, 우리는 이라크 침공이 남긴 파멸적인 결과를 의도적으로 축소하거나 망각하고 있다. 당시 미국의 침공은 국제 질서의 도덕적 정당성을 스스로 해체하고 소프트 파워를 회복 불가능한 수준으로 추락시켰을 뿐만 아니라, 세계 경제를 중대한 위기로 몰아넣었다. 막대한 전비 지출과 지정학적 불안은 유가를 5~7배나 폭등시켰고, 이로 인한 전 세계적인 수요 파괴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보이지 않는 뇌관으로 작용했다. 위기 수습을 위해 풀린 천문학적인 달러가 다시 유가를 3배 가까이 폭등시키며 인플레이션을 전 세계로 수출했으며, 이는 신흥국들 사이에서 "당신들의 잘못으로 벌어진 금융위기를 타파하고자 벌인 일 때문에 우리가 유가 폭등과 인플레이션으로 죽어간다" 라는 격렬한 반발을 불러왔다. 이 모든 것은 "부시의 무능과 실수 탓"이 되었다.
 
더욱 기만적인 것은, 오늘날 주류 담론이 당시의 복잡한 현실을 "미국 지배 시기의 안정적인 평화(Pax Americana)"였다고 포장하거나 "일시적인 위기였을 뿐"이라며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는 점이다. 당시는 분명 시스템이 붕괴하고 세계 경제가 요동치는 '중대한 위기'이자 '종말론적 공포'의 시대였다. 당시 뉴스만 잠시 들춰봐도 아무도 "이건 일시적인 위기고 미국이 곧 해결해 줄 것" 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던 것이 드러난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이 기억을 세탁하여 '민주주의가 주도하는 과거 질서는 안정적이었다'이라는 생각을 지키려고 한다. 실패한 전쟁의 책임을 특정 정치인 탓으로 떠넘기고, 자국의 치명적인 시스템 오류는 덮어버리는 태도야말로 민주주의가 스스로를 성찰할 능력을 상실했다는 명백한 증거다.
 
더 나아가 이라크전의 전후처리 실패 과정은 민주평화론이 어떻게 남 탓의 도구로 악용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줬다. "발전된 민주주의 국가는 평화롭다" 라는 주장 자체가 뒤집어서 말하면 "너희가 평화롭지 않은 것은 아직 미성숙한 민주주의이기 때문이다" 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민주주의 확산"을 명분으로 서방이 침공했던 이라크는 몇 년 뒤 내전과 테러의 온상이 되어 생지옥으로 변했다. 하지만 미국 내에서는 그 책임을 피해국 국민에게 전가했다. "우리는 기회를 줬는데, 저들이 미개해서 민주주의를 받아들이지 못했다"거나 "독재에 너무 익숙해져서 실패했다" "이슬람 탓이다" 이라는 식이다. 이런 식으로 원인을 제공한 가해자가 오히려 피해자의 '수준'을 탓하는 오만함 때문에,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 국가들은 자신들이 민주국가라고 자부심을 가지다가도 민주평화론만은 위선적인 프로파간다로 인식하며 싸늘한 냉소를 보내고 있다.

60010.jpg 민주평화론의 한계: 선택된 기억과 잊혀진 전쟁들

''독재자' '권위주의'라는 게으른 꼬리표: 민주주의의 실패를 감추는 마법의 단어
 
오늘날의 학계는 민주주의 자체를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독재(Dictatorship)'나 '권위주의(Authoritarianism)'라는 용어 자체가 민주주의의 실패를 정당화하기 위한 게으른 '남 탓'의 도구로 전락했다고 비판한다. 민주평화론의 자기합리화 메커니즘은 타국과의 관계가 틀어졌을 때, 우리의 외교 전략이 부재했음을 성찰하기보다 "그 놈이 독재자여서 말이 안 통했다"거나 "그 나라가 권위주의 국가라서 실패했다"는 식의 편리한 핑계로 귀결된다. 이는 복잡한 인과관계를 '상대의 사악함' 탓으로 돌려버리는 지적 태만이다.
 
실제로 서구 세계가 '독재자' 혹은 '권위주의'라고 싸잡아 묶는 나라들의 면면을 냉정하게 뜯어보면, 그들 사이에는 공통점이 거의 없다. 개중에는 민주적 절차로 선출되었으나 권력의 맛을 보며 '변질된 정치꾼'도 있고, 무정부 상태의 혼란을 틈타 무력으로 집권한 전형적인 '군벌 지도자'도 있다. 스탈린처럼 목표 달성을 위해 인력을 갈아 넣는 '냉혹한 대기업 사장(CEO)' 스타일이 있는가 하면, 시진핑처럼 거대한 관료 시스템과 당 조직을 관리하는 '빅테크 회장님', 혹은 김정은이나 중동의 왕정처럼 가업을 물려받은 '재벌 2~3세'에 가까운 인물도 존재한다.

이러한 분류의 허구성은 튀르키예의 에르도안이나 인도의 모디와 같은 '경계선' 위의 지도자들을 다루는 방식에서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서구 언론과 학계는 필요에 따라 이들을 '전략적 동반자'로 치켜세웠다가, 관계가 틀어지면 '스트롱맨'이나 '독재자'로 격하시키기를 반복한다. 수많은 담론이 쏟아지지만, 그 내용은 고작 "이들을 독재자로 분류할 수 있는가, 없는가"라는 소모적인 정의 논쟁에만 매몰될 뿐이다. 정작 힌두 민족주의를 내세운 인도의 총리와 이슬람주의를 표방한 튀르키예 대통령 사이에—단지 서구 리버럴의 기준에 맞지 않는다는 점을 제외하면—도대체 무슨 본질적인 공통점이 있어서 이들을 한 묶음으로 취급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찰은 실종되었다.
 
까놓고 말해, 이처럼 태생과 작동 원리, 그리고 생존 방식이 판이한 리더십을 '비민주적 독재'라는 단 하나의 카테고리로 퉁치는 것은 엄연한 논리적 오류이자 '성급한 일반화'다. 군벌에게는 군벌에게 통하는 협상법이 있고, CEO에게는 CEO에게 맞는 거래 방식이 있다. 그러나 민주평화론은 이 모든 차이를 무시한 채 "민주주의가 아닌 것은 모두 악"이라는 흑백논리를 들이댄다. 이는 민주주의 진영이 겪은 외교적 실패의 결과를, 상대가 단순히 '군벌/사장님/회장님' 유형의 지도자라는 이유만으로 "대화가 불가능한 악당"으로 매도하여 책임을 회피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게으른 분류법이 초래한 지적 참사는 비단 외교 현장에만 그치지 않는다. 지난 수십 년간 학계를 달구었던 "독재가 경제 성장에 효율적인가, 민주주의가 더 나은가"와 같은 거대 담론들, 이른바 '개발 독재'나 '리콴유 모델'을 둘러싼 논쟁들 역시 그 기반부터가 허상 위에 지어진 사상누각에 불과하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학자들은 싱가포르의 리콴유나 한국의 박정희 데이터를 가져와 "권위주의적 효율성"을 논하거나, 반대로 짐바브웨의 무가베나 북한의 사례를 들어 "독재의 비효율성"을 주장하며 격렬하게 싸운다. 하지만 이는 애초에 용어 정의조차 확실하지 않다. '고도의 엘리트 관료제 (싱가포르)', '약탈적 군벌 체제 (짐바브웨의 경제 파탄)', '군사정권 (장제스, 장징궈 시기 대만의 고도성장)', '왕정 (무함마드 빈살만의 사우디아라비아 대개혁)' 사이에 도대체 무슨 공통 분모가 있기에 이들을 '독재' '권위주의'라는 하나의 변수로 묶어 평균값을 낼 수 있다는 말인가?
더 나아가 오늘날 민주주의 국가들의 내부 역시 '분석의 실종'과 '대상의 악마화'라는 병폐를 똑같이 앓고 있다. 20세기 냉전 당시 조지 케넌(George F. Kennan)은 소련을 단순한 악마가 아닌 '러시아의 역사적 불안감과 팽창 욕구가 결합된 합리적 행위자'로 냉철하게 분석했기에 봉쇄 전략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서구의 정치는 내부에서 문제가 발생했을 때, 민주주의 시스템 자체가 가진 각종 결함이나 시대적 한계를 성찰하기보다는 특정 개인을 희생양으로 삼는 쉬운 길을 택한다. 모든 사회적 모순을 "트럼프의 광기 탓" 혹은 "바이든의 무능 탓"으로 돌리며 상대를 타도의 대상으로만 규정할 뿐, 그 현상을 낳은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는다.
 
더욱 심각한 것은 특정 정치인을 비난하는 것만으로 설명이 되지 않을 때, 화살을 대중에게 돌린다는 점이다. 엘리트들은 자신들이 설계한 시스템의 실패를 인정하는 대신, "우매한 대중이 선동당했다"며 '포퓰리즘'이라는 딱지를 붙여 책임을 전가한다. 더 나아가 과거 실패 사례는 '특정 정치인 탓' '그놈이 독재자가 된 탓' 으로 떠넘기고, '우리들은 전부 다 그놈들한테 억지로 끌려간 것' 이라는 식으로 자기합리화를 한다. 정작 치열하게 논의되어야 할 선거 제도 자체가 가지는 배타성과 한계, 다수결 원칙이 내포하는 소수 배제의 위험성, 그리고 민주주의 자체가 유발하는 갈등 증폭의 메커니즘에 대한 보완책은 "저 나쁜 정치인만 없애면 해결된다"는 선동 구호 속에 묻혀버린다. 밖으로는 '독재자 탓', 안으로는 '상대 진영 탓'과 '국민 탓'만 남은 곳에서, 진정한 의미의 평화나 민주주의의 발전이 깃들 자리는 없다.

download.webp 민주평화론의 한계: 선택된 기억과 잊혀진 전쟁들
 
민주평화론의 한계
 
지금까지 우리는 '민주주의 국가끼리는 싸우지 않는다'는 민주평화론이 얼마나 취약한 가정 위에 서 있는지, 그리고 학계가 이를 얼마나 냉정하게 해부해 왔는지 살펴보았다.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와 우방을 향한 거침없는 압박은 일시적인 일탈이 아니다. 그것은 낭만적인 이상주의에 가려져 있던 국제정치의 본질, 즉 "민주주의 국가 역시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언제든 이빨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선거는 합리적 이성보다 분노와 팬덤에 좌우되고, 민주적 리더십은 타협 없는 도덕적 성전을 강요하며, 제도는 내부 갈등과 배제를 부추긴다. 통계적으로 평화로워 보이는 겉모습 뒤에는 '전쟁의 정의'를 축소하거나, 경제와 기술을 무기화한 '보이지 않는 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상대가 민주국가라는 사실이 우리의 안보를 보장하지 않으며, '가치'를 공유한다고 해서 그들이 자국의 '이익'을 우리에게 양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인식해야 한다.
 
 
 
요약
 

1. 선거와 유권자의 한계: 분노의 정치

  • 합리적 무지: 유권자는 정책 공부보다 생업이 중요하기에 정치에 무지해지며, 결국 정책이 아닌 **사회적 정체성(팬덤)**과 순간적 감정에 휘둘려 투표합니다.

  • 중도층의 실종: 승자독식 구조에서 정치인은 온건한 다수보다 목소리 큰 **강성 지지층(10~15%)**의 요구에 민감해지며, 이는 대외 관계에서도 공격적인 '스트롱맨'을 양산하는 토양이 됩니다.

2. 민주적 리더십의 '평화롭지 않은' 속성

  • 도덕적 성전(Crusade): 독재자는 이익에 따라 타협하지만, 민주 지도자는 국내 여론을 설득하기 위해 상대를 '악'으로 규정해야 하므로 전쟁을 멈추기 더 어렵습니다.

  • 책임의 비대칭성: 전쟁에 실패해도 민주 지도자는 은퇴에 그치지만, 독재자는 목숨을 잃습니다. 생존 본능만 따지면 오히려 독재자가 전쟁에 더 신중할 수 있다는 역설이 발생합니다.

3. 통계적 조작과 '보이지 않는 전쟁'

  • 회색지대 분쟁: 민주국가는 전면전 대신 비밀 공작, 쿠데타 사주, 경제 제재 등 은밀한 폭력을 행사하며 이를 '평화'라고 강변합니다.

  • 선택적 정의: 전쟁이 터지면 "진정한 민주주의가 아니었다"며 사후적으로 정의를 수정하거나, 전사자 수가 적으면 전쟁 데이터에서 제외하는 식으로 이론을 방어합니다.

4. 다수결의 폭력과 '소외된 소수'

  • 마이클 만의 지적: 민주화 과정에서 "누가 국민인가"를 가르는 다수결 논리는 필연적으로 소수 집단의 배제와 인종 청소를 유발합니다.

  • 약자의 반외침: 역사적으로 원주민, 흑인, 소수 민족들은 다수의 횡포(민주주의)보다 차라리 자신들을 보호해 줄 강력한 중앙 권력(왕정, 군주제)을 선호하기도 했습니다.

5. 평화의 진짜 원인은 따로 있다

  • 자본주의 평화론: 민주주의 때문이 아니라 시장 통합, 금융 의존, 산업화로 인해 전쟁의 기회비용이 너무 커졌기 때문에 싸우지 않는 것입니다.

  • 공통의 적: 냉전기 서구의 결속은 '민주적 가치'가 아니라 '소련'이라는 거대한 적 덕분이었으며, 적이 사라지자 동맹 간의 이기적인 민낯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 요약 정리: 신화에서 현실로

구분 민주평화론의 신화 (Myth) 국제정치학의 현실 (Reality)
의사결정 의회와 여론이 전쟁을 억제한다. 비밀 공작과 행정부의 독단이 제도를 우회한다.
갈등 양상 대화와 타협으로 해결한다. 상대를 '악'으로 규정하여 타협 없는 성전을 벌인다.
평화 동력 민주적 가치의 공유 자본주의적 상호의존과 공통의 적에 대한 공포
실패 원인 독재자나 미개한 국민 탓이다. 민주주의 시스템 자체의 구조적 결함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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