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운동권 대부에서 '7전 7승' 선거의 제왕으로
1952년 충남 청양에서 태어난 그는 서울대 사회학과에 입학해 1972년 10월 유신을 계기로 학생운동에 투신한 1세대 운동권이다.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과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이후 재야 활동을 이어가다 1987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평화민주당에 합류해 정계에 입문했다.
이듬해 열린 13대 총선에서 서울 관악을에 평민당 후보로 출마해 김종인 민주정의당 후보를 꺾고 국회에 입성했다. 당시 36세로 13대 국회 최연소 의원이었다. 당시 그는 초선 때 열린 '5·18 및 5공 비리 청문회'에서 날카로운 질문으로 단숨에 청문회 스타로 떠올랐다. 이후 관악을 지역에서만 17대 총선까지 내리 5선을 했다.
2008년 18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한 그는 2012년 19대 총선 땐 지역구를 세종으로 옮겨 당선됐다. 2016년 20대 총선 당시엔 컷오프되자 탈당 후 세종시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됐다. 지역구 후보로만 7번 출마한 그는 한 번도 지지 않은 '선거의 제왕'으로 불렸다.
내각에도 수차례 입각했다. 1998년 김대중 정부 초대 교육부 장관을 지냈고, 노무현 정부 때인 2004년엔 국무총리에 올랐다. 당시 대통령과 '맞담배'를 피울 정도로 노 전 대통령의 든든한 신뢰 속에 국정 전반을 총괄하며 '실세 총리'로 불렸다. 하지만 2006년 '3·1절 골프' 파문에 책임을 지고 사의를 표명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2018~2020년엔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지냈다. 2020년 21대 총선에선 민주당의 '180석 압승'을 이끌어내며 거대 여당의 탄생에 기여했다.

'민주당의 킹메이커'…마지막 작품은 李대통령
고인은 민주 진영에서 손꼽히는 전략통이자 선거 전문가로 통했다. 1995년 제1회 지방선거에서 조순 서울시장 후보 캠프의 선거 전략을 총괄하며 당선을 이끌었고 이후 정무부시장까지 지냈다. 15대 대선에선 김대중 후보 선거대책본부 부본부장을 맡아 DJP 연합을 성공시켰다. 2002년엔 '친노 좌장'으로 선거 캠프를 이끌며 노무현 정부 탄생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정치 입문에 주저하던 문재인 전 대통령을 대선 출마로 이끈 것도 그의 작품이다. 고인을 '민주당의 킹메이커'로 부르는 이유다.

2020년 민주당 대표를 끝으로 정치 일선에서 은퇴했지만 이재명 대통령의 '정치적 멘토'를 자처하며 직·간접적으로 지원했다. 과거 당내 비주류였던 이 대통령을 "당의 소중한 자산"이라고 수차례 엄호하며 대선주자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도왔다. 이 대통령은 당 대표 시절이던 2022년 고인의 회고록 출판기념회에 참석해 "제가 가장 존경하는 어른"이라고도 했다.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인 지난해 10월엔 부총리급인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에 임명되며 대북·통일 관련 자문 역할을 수행해 왔다. 이번 별세로 민주화 운동으로 시작해 50년 넘게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한복판에 있었던 상징적 존재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됐다.
민주당은 슬픔과 애도의 뜻을 표했다. 박수현 수석대변인은 고인에 대해 "독재에 맞선 민주화운동의 최전선에서 시대를 견디고, 민주정부 수립과 민주정당의 성장을 위해 평생을 바친,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산증인이자 거목이었다"고 회고했다.
이어 "민주정부 4번의 탄생 과정마다 역할이 있었다는 사실은, 민주주의 발전과 책임정치 구현, 대한민국 정치의 발전에 이해찬 총리가 얼마나 큰 발자취를 그려왔는지를 분명히 보여준다"며 "이 전 총리께서 남긴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 국민주권에 대한 확신, 그리고 민주정부의 책임에 대한 철학은 여전히 국민의 가슴 속에 살아 숨 쉴 것"이라고 명복을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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