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정보 이 맘 때 쯤 생각나는 작자미상의 글
3,071 15
2026.01.20 23:02
3,071 15
그 애. 



우리는 개천쪽으로 문이 난 납작한 집들이 게딱지처럼 따닥따닥 붙어있는 동네에서 자랐다. 그 동네에선 누구나 그렇듯 그애와 나도 가난했다. 물론 다른 점도 있었다. 내 아버지는 번번히 월급이 밀리는 시원찮은 회사의 영업사원이었다. 그애의 아버지는 한쪽 안구에 개눈을 박아넣고 지하철에서 구걸을 했다. 내 어머니는 방 한가운데 산처럼 쌓아놓은 개구리인형에 눈을 밖았다. 그애의 어머니는 청계천 골목에서 커피도 팔고 박카스도 팔고 이따금 곱창집 뒷방에서 몸도 팔았다. 우리집은 네 가족이 방두 개짜리 전세금에 쩔쩔맸고, 그애는 화장실 옆에 천막을 치고 아궁이를 걸어 간이부엌을 만든 하코방에서 살았다. 나는 어린이날 탕수육을 못 먹고 짜장면만 먹는다고 울었고, 그애는 엄마가 외박하는 밤이면 아버지의 허리띠를 피해서 맨발로 포도를 다다다닥 달렸다. 말하자면 그렇다. 우리집은 가난했고, 그애는 불행했다. 




가난한 동네는 국민학교도 작았다. 우리는 4학년때 처음 한 반이 되었다. 우연히 그애 집을 지나가다가 길가로 훤히 드러나는 아궁이에다 라면을 끓이는 그애를 보았다. 그애가 입은 늘어난 러닝셔츠엔 김치국물이 묻어있었고 얼굴엔 김치국물 같은 핏자국이 말라붙어있었다. 눈싸움인지 서로를 노려보다가 내가 먼저 말했다. 니네부엌 뽑기만들기에 최고다. 나는 집에서 국자와 설탕을 훔쳐왔고, 국자바닥을 까맣게 태우면서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사정이 좀 풀려서 우리집은 서울 반대편으로 이사를 했다. 아버지는 친척이 소개시켜준 회사에 나갔다. 월급은 밀리지 않았고 어머니는 부업을 그만두었다. 나는 가끔 그애에게 편지를 썼다. 크리스마스에는 일년동안 쓴 딱딱한 커버의 일기장을 그애에게 보내기도 했다. 그애는 얇은 공책을 하나 보냈다. 일기는 몇 장 되지 않았다. 3월4일 개학했다. 선생님한테 맞았다. 6월1일 딸기를 먹었다. 9월3일 누나가 아파서 아버지가 화냈다. 11월4일 생일이다. 그애는 딸기를 먹으면 일기를 썼다. 딸기를 먹는 것이 일기를 쓸만한 일이었다. 우리는 중학생이 되었다. 




그애 아버지는 그애 누나가 보는 앞에서 분신자살을 했다. 나는 그 얘기를 풍문으로 들었다. 그애는 이따금 캄캄한 밤이면 아무 연립주택이나 문 열린 옥상에 올라가 스티로플에 키우는 고추며 토마토를 따버린다고 편지를 썼다. 이제 담배를 배웠다고 했다. 나는 새로 들어간 미술부며 롯데리아에서 처음 한 미팅 따위에 대해 썼다. 한번 보자, 만날 얘기했지만 한번도 서로 전화는 하지 않았다. 어느날 그애의 편지가 그쳤고, 나는 담배를 피기 시작했다. 




고3 생일에 전화가 왔다. 우리는 피맛골에서 막걸리를 마셨다. 생일선물이라며 신라면 한 박스를 어깨에 메고 온 그애는 왼쪽다리를 절뚝거렸다. 오토바이사고라고 했다. 라면은 구멍가게 앞에 쌓인 것을 그냥 들고 날랐다고 했다. 강변역 앞에서 삐끼한다고 했다. 놀러오면 서비스 기차게 해줄께. 얼큰하게 취해서 그애가 말했다. 아냐. 오지마. 우울한 일이 있으면 나는 그애가 준 신라면을 하나씩 끓여먹었다. 파도 계란도 안 넣고. 뻘겋게 취한 그애의 얼굴 같은 라면국물을. 




나는 미대를 졸업했고 회사원이 되었다. 어느날 그애가 미니홈피로 찾아왔다. 공익으로 지하철에서 자살한 사람의 갈린 살점을 대야에 쓸어담으면서 2년을 보냈다고 했다. 강원도 어디의 도살장에서 소를 잡으면서 또 2년을 보냈다고 했다. 하루에 몇백마리의 소머리에 징을 내려치면서, 하루종일 탁주와 핏물에 젖어서. 어느날 은행에 갔더니 모두 날 피하더라고. 옷은 갈아입었어도 피냄새가 배인거지. 그날 밤 작업장에 앉아있는데 소머리들이 모두 내 얼굴로 보이데. 많이 마시지도 않았는데 그애는 술집테이블에 머리를 박았다. 나직하게, 나는 왜 이렇게 나쁜 패만 뒤집는 걸까. 




그애가 다단계를 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만나지마. 국민학교때 친구 하나가 전화를 해주었다. 그애 연락을 받고, 나는 옥장판이나 정수기라면 하나 있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취직하고 집에 내놓은 것도 없으니 이참에 생색도 내고. 그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계절이 바뀔 때면 가끔 만나서 술을 마셨다. 추운 겨울엔 오뎅탕에 정종. 마음이 따뜻해졌다. 




부천의 어느 물류창고에 직장을 잡았다는 연락을 받았다. 고등학교때 정신을 놓아버린 그애의 누나는 나이차이 많이 나는 홀아비에게 재취로 갔다는 얘기를 들었다. 애가 둘인데 다 착한가봐. 손찌검도 안하는 거 같고. 월급은 적어. 그래도 월급나오면 감자탕 사줄께. 




그애는 물류창고에서 트럭에 치여 죽었다. 27살이었다. 








그애는 내가 처음으로 좋아한 남자였다. 한번도 말한 적 없었지만 이따금 나는 우리가 결혼을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손도 잡은 적 없지만 그애의 작고 마른 몸을 안고 매일 잠이 드는 상상도 했다. 언젠가. 난 왜 이렇게 나쁜 패만 뒤집을까. 그 말 뒤에 그애는 조용히 그러니까 난 소중한 건 아주 귀하게 여길꺼야. 나한텐 그런 게 별로 없으니까. 말했었다. 그러나 내 사랑은 계산이 빠르고 겁이 많아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나는 그애가 좋았지만 그애의 불행이 두려웠다. 하지만 우리는 함께 살 수도 있었다. 가난하더라도 불행하지는 않게. 

목록 스크랩 (0)
댓글 15
댓글 더 보기
새 댓글 확인하기

번호 카테고리 제목 날짜 조회
이벤트 공지 1457년 청령포, 역사가 지우려했던 이야기 <왕과 사는 남자> VIP 시사회 초대 이벤트 871 01.20 33,033
공지 [공지] 언금 공지 해제 24.12.06 4,479,184
공지 📢📢【매우중요】 비밀번호 변경 권장 (현재 팝업 알림중) 24.04.09 11,316,929
공지 공지가 길다면 한번씩 눌러서 읽어주시면 됩니다. 23.11.01 12,505,743
공지 ◤더쿠 이용 규칙◢ [스퀘어 정치글은 정치 카테고리에] 20.04.29 34,606,389
공지 정치 [스퀘어게시판 정치 카테고리 추가 및 정치 제외 기능 추가] 25.07.22 1,032,872
공지 정보 더쿠 모바일에서 유튜브 링크 올릴때 주의할 점 782 21.08.23 8,479,417
공지 정보 나는 더쿠에서 움짤을 한 번이라도 올려본 적이 있다 🙋‍♀️ 267 20.09.29 7,394,941
공지 팁/유용/추천 더쿠에 쉽게 동영상을 올려보자 ! 3593 20.05.17 8,604,970
공지 팁/유용/추천 슬기로운 더쿠생활 : 더쿠 이용팁 4014 20.04.30 8,481,278
공지 팁/유용/추천 ◤스퀘어 공지◢ [9. 스퀘어 저격판 사용 금지(무통보 차단임)] 1236 18.08.31 14,331,821
모든 공지 확인하기()
2968852 유머 광수 놀리는 유재석 TOP4 15:52 80
2968851 유머 나이 들어도 커밍아웃 안 한 사람들이 진짜 독한 사람인 이유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2 15:52 494
2968850 정치 이재명 대통령 : 검찰개혁의 핵심은 검찰한테 권력을 뺏는 게 목표가 아니예요. 그건 수단과 과정이죠. 진짜 최종목표는 국민들 권리 구제예요, 국민들의 인권보호. 억울한 범죄 피해자가 구제받을수 있게, 가해자를 처벌 제대로 하는 것.. 이걸 해야죠 4 15:51 164
2968849 기사/뉴스 '아내 아프다' 차량 빼달란 요구에 4m 음주 운전한 30대 선고유예 12 15:51 319
2968848 기사/뉴스 尹정부 2인자→내란 공범…'관운의 사나이' 한덕수, 황혼기 '불명예' 3 15:50 111
2968847 이슈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는 지난 2024년 12월 29일에서 31일 사이, 서울 성북구 돈암동의 한 원룸에서 구운 달걀을 먹다 질식해 사망한 채 발견된 84년생 장 씨에 대해서 잘 아시거나, 사망 당일 행적을 알고 계신 분들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14 15:48 1,402
2968846 정치 장동혁 단식장 찾은 이준석 “공동투쟁 방안 마련할 것” 9 15:48 159
2968845 이슈 <왕과 사는 남자>, <휴민트> 손익분기점 정보 18 15:48 929
2968844 기사/뉴스 12.3 내란 과정에서 사망자가 발생하지 않았고 내란 행위 자체는 몇 시간 만에 종료되긴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무엇보다도 무정한 계엄군의 맨몸으로 맞서 국회를 지킨 국민의 용기에 의한 것입니다 결코 12.3 내란 가담자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31 15:47 776
2968843 이슈 이진관 판사 판결문 일부 발췌 15 15:47 894
2968842 기사/뉴스 [단독] 삼성전자 ‘특허전담조직’ 직원이 회사기밀 빼돌렸다가 구속 1 15:47 413
2968841 이슈 콘서트 중 펑펑 울어버린 한 남자 아이돌 1 15:46 712
2968840 이슈 재작년에 트위터에서 반응 난리났던 일본 단편 드라마...twt 4 15:45 766
2968839 이슈 [인터뷰] 조병규·지니, ‘네온-누아르’ 세계에서 마주한 감정의 균열 - 영화 <보이>가 남긴 흔들림 15:45 146
2968838 기사/뉴스 [그래픽] 한덕수 전 국무총리 내란 혐의 수사·재판 주요 일지 1 15:45 373
2968837 이슈 손톱깎이가 팬미팅 엠디로 나온 NCT 정우 7 15:45 841
2968836 이슈 자신은 2시간 뒤면 안락사되는데 '아픈 친구' 걱정돼 밥그릇 양보한 강아지 10 15:45 1,310
2968835 기사/뉴스 [속보] 환율, 전일대비 6.8원 내린 1471.3원 마감 1 15:43 170
2968834 이슈 오늘자 넷플릭스 행사 화보 전도연, 손예진, 박은빈, 남주혁, 안성재 7 15:43 819
2968833 이슈 서바이벌 제도를 도입한다는 남의연애4 ..... 16 15:42 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