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삭제 5곳·수정 7곳… 한겨레 대표이사 사임
일부 언론, '기사수정 알림' 등 대책 마련 나서
"광고주가 편집권 개입할 수 없다는 것 천명해야"
[미디어오늘 박재령, 박서연, 정민경 기자]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현대차) 회장 장남의 음주운전 관련 기사가 현대차의 요청으로 언론사에서 줄줄이 삭제·수정됐다는 것이 알려지자 다수 언론사들이 기사를 복구하고 사과문을 냈다. 관련 기사를 삭제하고도 이를 알리지 않는 언론사가 있을 수 있어 기업이 편집권에 영향을 미친 사례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대차 측은 침묵을 유지하고 있다.
기사 삭제 언론사 5곳 중 4곳 원상복구
2021년 현대차 장남의 음주운전 기사를 지난해 9월 삭제·수정한 것이 드러난 언론사는 총 11곳이다. MBC, SBS, YTN, 세계일보, 뉴시스 등 5개사는 기사를 삭제했고 연합뉴스, 뉴스1, 뉴시스, 서울신문, 한국일보, CBS, 한겨레 등 7개사는 기사를 수정했다.
SBS·YTN·뉴시스는 데스크가 현대차 측의 요청을 받고 취재기자와 협의 없이 기사를 삭제했다. 세계일보는 편집국장이 취재기자의 검토를 받아 삭제했다고 밝혔고 MBC는 취재기자가 직접 현대차 요청을 받고 삭제를 요청했다.

지난 13일 기준 기사를 삭제한 언론사 가운데 뉴시스를 제외한 4개사는 기사를 복구했다. 뉴시스의 경우 관련 기사 4개 중 3개가 삭제되고 나머지 1개는 제목이 '현대차'에서 'A그룹'으로 수정됐는데, 수정된 기사의 제목만 '현대차'로 원상 복구됐다.
MBC, SBS, YTN 등 방송사는 복구 기사에 사과문을 담았다. MBC는 “부적절한 사유로 삭제됐던 사실이 확인돼 재게재한다”라고 설명했고 SBS와 YTN은 “충분한 논의 과정 없이 삭제됐다가 재게재한 것”이라고 밝혔다. SBS와 YTN은 각각 별도의 기사를 작성해 다시 사과 입장을 전했다. 지난 5일 기사를 복구한 세계일보는 편집국장 차원의 사과문을 내부에 공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기사를 수정한 언론사들은 '현대차'나 총수 일가가 드러나지 않도록 바꿨다. 뉴스1은 '현대차'를 '대기업'으로, 연합뉴스, 서울신문, 한국일보는 'H그룹'으로 바꿨다. CBS는 제목의 '현대차 정의선 장남' 중 '정의선'을 뺐으며 한겨레는 제목에서 '정의선' 회장 이름을 빼고 '장남'을 '자녀'로 바꿨다.
연합뉴스, 한국일보, 한겨레는 제목에 '현대차' 혹은 '정의선'을 넣는 식으로 기사를 복구시켰다. 뉴스1과 서울신문은 기사를 그대로 두고 있다. CBS는 기사 수정 당시 취재기자 동의를 구하는 과정을 거쳐 별다른 후속 조치를 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일보는 지난달 29일 기사를 복구시키며 “신중하지 못한 판단으로 독자 여러분께 혼란을 끼쳐드려 유감을 표한다”라고 했다.
기사 삭제·수정 절차 보완 나선 언론
적지 않은 언론에서 노조 등 구성원들의 반발을 계기로 후속 조치에 나섰다. 뉴시스는 지난 5일 유사 사례 재발을 막기 위해 노사가 '공정보도 편집위원회 공동보고서'를 채택했다. 이번 사태를 “자본 권력에 의한 중대한 편집권 침해 사례”로 규정한다는 내용과 함께 “(유사 사례를) 방지하기 위해 합리적이고 구체적인 조치를 취할 것을 강력히 권고한다”라는 내용이 담겼다.
SBS는 기사 삭제·수정 시 부서장들 협의와 보도책임자 승인을 의무화하고 삭제 이유 등 의사결정 과정을 전산시스템에 기록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YTN도 담당 데스크의 기사 삭제·수정 여부와 데스크 이름을 이력에 남기는 절차를 추가하기로 했다. MBC는 기사 삭제·수정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내부에서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연합뉴스는 지난 6일 편집위원회 회의에서 기사를 작성한 기자가 아닌 데스크 등 제3자가 '포털 고침'을 할 경우 문자를 보내는 방식을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후폭풍을 가장 강하게 겪고 있는 매체는 한겨레다. 지난 4일 최우성 한겨레 사장이 사과한 데 이어 지난 5일 뉴스룸국장과 디지털부국장이 보직 사퇴했다. 최우성 사장까지 사의를 표명해 편집인, 광고·사업본부장 등 등기이사가 모두 사퇴 의사를 밝힌 상황이다.
한겨레 A기자는 미디어오늘에 “기사 수정 행위 그 자체보다 수정 요청이 온 것을 구성원과 토론하고 숙의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뼈아프다. 한겨레의 존재 이유와 가치는 구성원들이 지키고 만들어가야 한다”며 “광고비가 우리를 구제해주지 않는다.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독립'이라는 한겨레 가치를 포기하는 순간, 한겨레는 내부에서부터 무너질 것”이라고 했다.
지상파 소속 B기자는 미디어오늘에 “현대차는 주요 그룹사들 중에서도 유난히 언론 관리를 젠틀하고 치밀하게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더욱 약한 고리가 되었을 것”이라며 “연합뉴스 기사를 거의 그대로 낸 것이니 큰 비중을 두지 않았다는 식의 논의도 오간다. 어떤 기사를 썼든 결국 특정 언론사의 특정 기자의 기사로 나간 것이라 변명이 될 수 없다. 연합뉴스 기사를 거의 그대로 받아쓰는 방식이 맞는지도 이번 기회에 돌아볼 필요가 있다”라고 했다.
“실제 사례 더 많을 것”
현재 종편과 경제지 등을 포함한 대부분 매체에선 현대차 장남의 음주운전 기사를 찾기 힘들다. 현대차를 의식해 처음부터 쓰지 않았는지, 이후에 요청을 받고 삭제했는지 알 수 없다. 이번 사태 역시 노조를 중심으로 보도 견제기구가 마련된 언론사 위주로 기사 삭제·수정 사례가 드러나 그렇지 않은 언론사에선 실제 어떤 논의가 이뤄졌는지 알려지기 힘든 문제가 있다.
전국언론노동조합은 지난 7일 “언론노조 지부가 없는 언론사 가운데에도 이번 기사 삭제·수정 사례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곳들이 있다. 혹시 자사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는지 살펴줄 것을, 만일 그렇다면 기사 복원을 위해 싸워줄 것을 부탁드린다”라고 밝혔다.
김도원 언론노조 민주언론실천위원장은 통화에서 “추가로 발견된 (기사 삭제·수정) 사례는 없다. 기자협회에 요청했지만 딱 떨어지는 답을 듣지는 못한 상태”라며 “일부 언론의 인터넷 기사 송고 절차가 허술했다는 것이 이번에 드러난 것 같다. 절차가 있는 경우에도 무시되는 측면이 있는 것 같아 어떻게 제도로 해결할 수 있을지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편집권 개입 부당' 천명해야
주요 언론사들의 편집권 침해가 한 번에 드러난 상황에서 처벌과 규제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연우 세명대 광고홍보학과 명예교수는 방송법 4조 2항에 근거해 현대차를 고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방송법 4조 2항은 '누구든지 방송편성에 관해 어떠한 규제나 간섭도 할 수 없다'는 내용이다.
정연우 교수는 통화에서 “처벌까지 안 가더라도 (방송에) 개입하는 건 분명한 법 위반이라는 걸 언론계가 분명히 못 박을 필요가 있다”며 “그래야 광고주 입장에서도 (기사 수정 요청을) 조심하게 되고 언론사 입장에서도 사례가 쌓여야 편집권을 보호할 수 있는 힘을 만들 수 있다”라고 했다. 정연우 교수는 “'신문 및 인터넷신문의 편집에 관하여 어떠한 규제나 간섭도 할 수 없다'는 조항과 처벌 조항이 있었지만, 2009년 이명박 정부 시절 강행 처리된 미디어법 개정 과정에서 해당 조항이 삭제됐다”며 “(신문의) 편집권 독립에 대한 얘기도 공론화시킬 때가 됐다. 어떤 식으로든 광고주도 개입하면 큰일이 난다는 걸 각인시키는 기회가 됐으면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경향신문은 2019년 SPC에 협찬금을 받고 관련 기사를 삭제했다가 '편집권 침해' 논란으로 홍역을 치렀다. 경향신문은 이번 국면에서 현대차 측의 수정 요청을 거절했다. 정 교수는 “경향신문 입장에선 예방주사를 맞은 셈이다. 그렇게 난리가 나야 내부에서 조심하고 (기업의) 영향력을 막아낼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이번 사태도 (언론계가) 천명해야 또 다른 예방주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https://v.daum.net/v/202601150806363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