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성황후 밑에서 일하던 궁녀였다가 고종의 승은을 입자
크게 노한 명성황후에 의해 내쳐졌던 엄상궁
하지만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죽은 뒤,
엄상궁을 잊지 못한 고종에 의해 다시 궁으로 불려오게 되고
현명하고 담대한 성격이었던 엄상궁은 아관파천때도 큰 공을 세우며 고종에게 생명의 은인이 됨


명성황후가 죽은 뒤 다음 차례는 본인이 될 것이라는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혀
하루하루를 지내던 고종은 이런 엄상궁에게서 헤어나지를 못했음
엄상궁은 후궁의 첩지를 받아 순귀인으로 봉해지고
그 후 황자까지 낳자
순빈에 이어 그 다음엔 순비까지 오르는 등
그야말로 출세가도를 달리게 됨

결국 후궁에서는 가장 높이 올라갈 수 있는 위치이자 황후 바로 밑인
'귀비' 자리에까지 오르며 순헌황귀비 엄씨라고 불리게 됨
말이 귀비지 사실상 내명부를 주관하며 황후나 다름없는 권세를 누렸는데
고종이 총애하던 신하인 이용익마저 그녀를 양귀비에 비유했다가
찐으로 사형시켜야 한다며 온 조정이 들고 일어난거만 봐도
대한제국 궁정에서 엄귀비의 파워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만 함
엄귀비의 친정은 원래 그냥 평민 집안이었으나
그녀 덕분에 불같이 가세가 일어나서 엄청난 부귀영화를 누리게 됨
그나마 다행인 점은, 당시 구한말의 다른 세도가들과는 다르게
엄씨 집안은 나라를 위한 일에 돈을 많이 썼다는 점인데
이는 교육, 특히 여성교육에 매우 관심이 많았던 엄귀비의 영향이 컸음
엄귀비는 본인도 똑똑하고 총명한 여성이었지만
시대의 한계상 제대로 된 정식교육을 남자들처럼 받을 수 없었고,
그 때문인지 앞으로의 세상에서는 여성도 제대로 교육받고 공부해야
나라가 부강해진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던것으로 보임
엄귀비의 조카나 사촌동생 등 엄씨 집안의 사람들은
양정의숙, 진명여학교, 숙명여학교 등의 학교를 설립하는데 매우 의욕적이었고
진명여고나 숙명여대의 역사가 무려 20세기 초반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유이기도 함
또한 기존에 설립되어있던 서양식 학교들인
이화학당과 배재학당에는 자신의 재산을 직접 내어주며
후원을 아끼지 않은 행보로 알려져있음
심지어 엄귀비의 추천으로 엄귀비 아들(영친왕)의 보모로 일했던 여성까지도
이런 엄귀비의 신념에 큰 영향을 받아 김천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설립하는 등
구한말 우리나라의 근대교육에 큰 발자취에 영향을 준 황실사람이라 할 수 있음

실제로 해당 학교들에 아직도 남아있는 엄귀비의 흔적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