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신이의 발자취] ‘음악 좋아하는 사람’ 김영대 평론가를 기리며

그는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워낙 바쁘게 살았으니, 시절에 따라 그를 설명할 수식어도 그만큼 많을 것이다. 그래도 그 가운데 1등은 역시 저 문장이다. 어느 정도였기에 그렇게 강조하느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답해보겠다. 그는 음악이라는 공통점만 있으면 나이, 국적, 성향, 사회적 배경 그 어느 것도 상관없이 누구든 순식간에 친구로 만들 수 있었다. 아마 넉넉잡아 1시간 정도면 충분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음악 이야기하는 걸 좋아했다. 처음 만나도 좋아하는 음악으로 운을 떼고 나면 다음은 말할 것도 없이 일사천리였다.
멀리서 증거를 찾을 필요도 없다. 바로 내가 그렇게 설득·포섭된 사람이었으니까. 우리가 처음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중학생, 그는 대학생이었다. 컴퓨터가 있는 집이 아직 흔하지 않던 1990년대 중반, 그 흔하지 않은 집에 사는 친구가 ‘피시(PC)통신’이라는 새로운 세계가 있다는 걸 처음 알려줬다. 전화선을 연결해 모뎀으로 인터넷에 접속하면 그 안에 우리랑 같은 걸 좋아하는 이름 모를 사람들이 가득하다고 했다.
그곳에서 김영대라는 이름을 처음 만났다. 우선 이름이 먼저였다. 과장을 조금 더 보태면, 가는 곳마다 그가 있었다. 솔리드, 흑인 음악, 토이, 음악 비평. 검색창에 써넣는 키워드마다 그의 아이디 ‘투재지’(toojazzy)가 등장했다. 그만큼 활동이 활발했다는 뜻도, 취향이 비슷했다는 뜻이기도 할 테다. 그는 당시에도 이미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람이었다. 발도 넓었고, 수완도 좋았고, 글도 잘 썼다. 아침마다 게시판을 확인할 때 그의 이름이 쓰인 새 게시물이 있으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시원시원한 필력도 필력이었지만, 무엇보다 음악에 대한 애정이 그대로 느껴져 좋은 글이었다. 저렇게도 음악 이야기를 신나게 할 수 있구나, 그때 처음 알았다.
1990년대 중반 PC통신서 필력 뽐내
R&B·솔·재즈·클래식 등 음악 폭 넓어
ID ‘toojazzy’ 아는 사람은 다 알아
언젠가 한번쯤 만나 직접 음악 수다를 떨어보고 싶다는 바람은 그리 오래지 않아 이루어졌다. 열다섯은 ‘나도 저렇게 해보고 싶다’는 의지를 가장 빠르게 불태울 수 있는 나이니까. 그 못지않은 속도로 게시판에 글을 올리던 우리가 만난 곳은 서울 압구정동에 있던 ‘상아레코드’였다. 1990년대 흑인음악을 좋아한다면 모를 수가 없는 음반 매장이었다. 서로 좋아하는 음반을 몇장씩 사고, 그토록 하고 싶던 음악 이야기를 실컷 했다. 세상에 이것보다 재미있는 일이 또 있을까 싶었다. 얼마 뒤 “네가 좋아할 것 같다”며 그가 선물해준 믹스테이프는 퀸시 존스의 곡 ‘아이 노 코리다’(Ai No Corrida)로 시작했다. 알앤비(R&B)나 솔에 대한 지식만큼 재즈와 클래식에도 관심이 많았던 그의 폭 넓은 취향 덕에 좋은 음악을 참 많이도 소개받았다.
그 뒤로도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음악 수다를 나눴다. 사정상 잠깐씩 연락이 끊기기는 했어도, 인연은 계속 우리 두 사람을 신기하게 이어주었다. 그의 미국 유학 시절, 어학연수를 핑계로 한동안 그의 가족과 같이 살기도 했다. 밤마다 음악 수다 파티가 열렸다. 그의 뿌리에 자리한 마이클 잭슨, 데이비드 포스터 같은 미국 팝의 정수부터 함께 좋아하던 1980~1990년대 가요, 최신 음악까지 이야기는 한도 끝도 없었다. 미국에서 음악인류학 박사 학위를 받고 미국 학계가 아닌 한국으로 돌아와 음악평론가 활동을 하고 싶었던 것도 그 좋아하는 음악 이야기를 무한정 하고 싶은 건 아니었을지 의심스러울 정도의 수다쟁이였다. 의심이 크게 틀리지 않다는 듯 그는 귀국 후 티브이(TV), 라디오, 해외 시상식 중계 등을 종횡무진하며 빠른 속도로 자리를 잡았다. 피시통신에서 미디어로 자리가 바뀌었을 뿐, 나의 눈에는 30년 전 처음 본 그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음악을 정말 좋아한 사람이었다.
미국서 음악인류학 박사 받고도
한국서 음악평론가로 활동하며
TV·라디오·시상식중계 종횡무진
“문화토크쇼 꼭 해보고 싶다더니…”
그가 지난 24일 거짓말처럼 세상을 떠나면서, 생전 말버릇처럼 “언젠가 내 이름을 건 문화 토크쇼를 꼭 해보고 싶다”던 그의 바람은 이제 이루어질 수 없게 되었다. 종종 함께 일하며 ‘우리가 이걸 일로 같이하다니’ 하고 번번이 놀라는 일도 없을 것이다. 이 글의 끝에 마침표를 찍어버리면 기별 없이 떠난 그가 이제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완전히 인정해버릴 것 같아 두려운 마음도 든다. 하지만 그가 말과 글로 세상에 남긴, 음악 좋아하는 마음이 가능한 한 오래 많은 이들의 곁에 남아 온기를 전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마침표를 찍는다. 아마 그가 가장 바라는 일일 것이다.
김윤하 대중음악평론가
https://www.hani.co.kr/arti/society/obituary/123707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