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의 마지막 막부인 에도막부가 기리스탄(기독교인)들을 정권을 흔들 위험분자로 보게 된 이유는 에도막부 초기에 일어난 시마바라의 난이 있었음
그 전에도 민심통합용으로 잡아다가 박해했지만...
원래 이 지역이 기독교신자 영주였던 고니시 유키나가(임진왜란 때 쳐들어온 장수 중 하나)의 영지여서 기독교 신자가 많았고 그 중 상당수가 농민이었음
다른 영주가 온 후 종교 박해+ 수탈로 일관되자 두가지가 함께 불붙어 민란이 일어남 초기에 정부군이 크게 졌고 계속 졌고...
나중엔 봉쇄전으로 굶겨죽여서 민란을 한 사람은 한 명도 살아남지 못 했고 정부가 이김 이후부터는 그냥 키리스탄은 국가의 적으로 취급받아서 강제배교시키거나 죽이거나....
그러다가 메이지유신때 개항 이후 나가사키에 프랑스신부가 들어오게 됨
나가사키에 새로 세워진 오우라 천주당의 베르나르 프티장(Bernard-Thadée Petitjean.1829~1884) 주임신부의 성당에 구경왔던 마을 사람들 가운데 카쿠레키리시탄(숨어 지내는 키리스탄)들이 섞여 있었고, 이들이 성모상을 보게 되면서 그들이 모여 살던 마을에 "프랑스 절에 산타마리아님이 계시다"는 소문이 퍼짐

카쿠레키리시탄들 사이에는 당시로부터 250여 년 전 순교한 사람중 하나가 "일곱 세대가 지나면 흑선을 타고 파파가 보낸 콘페소르가 온다. 매주라도 콘삐산을 할 수 있다. 어디서라도 큰소리로 키리시탄의 노래를 부르며 걸을 수 있는 시대가 온다. 길에서 젠초를 만나면 그가 길을 양보한다."라고 예언하였다는 전설이 있었다고 함
이게 뭔 소리냐면 앞으로 245년 후에 교황이 보낸 사제가 올 것이다 어디에서도 미사를 드릴 수 있고 기독교 성가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길에서 일본 외교관이 사제를 만나도 안 잡아가고 도리어 길을 양보할 것이다는 말임
기묘하게 딱 250년만에 사제가 일본에 들어왔고 공개적인 종교활동을 했으니 비스무레하게 예언이 맞은 셈이지
물론 300년간 박해 받은 키리스탄들도 쉽게 아 키리스탄이에요 할 순 없었겠지
마을 여자중 산파로 일해서 그나마 좀 활동이 자유롭던 사람 한명이 사제를 만나서 넌지시 물어보기 시작해
산파 이사벨라 유리가 가족과 동네 사람 13~15명(모두 키리시탄)이 구경을 핑계 삼아 성당에 오더니, 기도하고 있던 프티장 신부에게 "산타마리아를 공경하십니까?", "결혼은 하셨습니까?"를 차례로 물었고, 이에 프티장 신부는 “성모님을 공경합니다”, “사제는 결혼하지 않습니다”라고 답하였다. 이에 이사벨라 유리는 세 번째 질문으로 "지금 저희는 슬픈 시간을 지키고 있습니다. 당신도 지킵니까?"라고 물었다. 이는 전례력을 지키냐는 의미의 질문으로, 신부는 “지키고 있습니다”라고 답하였다. 이 세 가지 질문이 '조상의 신앙'을 알아볼 수 있는 단서로 카쿠레키리시탄 사이에 구전되어 왔기에 이사벨라는 이 질문들을 신부에게 건넨 것이였음
이사벨라 유리는 신부의 세 가지 대답을 듣고서야 "우리의 마음도 신부님과 같습니다."라고 속삭인 후 마지막 질문으로 "サンタマリアの御像はどこ? (산타마리아의 성상은 어디에?)"라고 물었다. 이에 프티장 신부가 성모상으로 안내해 주자, 이사벨라 유리를 비롯하여 그냥 구경 온 척하던 마을 사람 전원이 갑자기 성모상 앞에 몰려들어 무릎을 꿇고 기도를 바쳤다고 함
조상들이 '일곱 세대가 지나면 다시 오리라'고 믿었던 '콘페소르'가 프랑스에서 온 그들인지 확신하지 못하고 망설이던 그들은 신부의 답을 듣고 성모상을 보고서야 비로소 감격하여 꽁꽁 감추어 두었던 그들의 신앙을 드러낸 것이다.

이게 일본에서 유명한 ' 숨어있던 신자'들의 발견으로 300년간 박해속에 종교를 지킨 기적으로 나름 유명한 사건임
그런데 옆나라에서 아예 책 읽고 알아서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일이 생겼네 선교사도 없이...

일본은 어땠든 선교사들이 들어간 거고 한국은 알아서 자생했으니 한국쪽이 더 놀라운 일이긴 하지
물론 300년간 박해에 시달리면서 저렇게 지킨 것도 대단한 일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