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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 퇴직하고 보니 월급보다 이게 먼저 사라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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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2 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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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47/0002498236?sid=001

 

혼밥이 고독의 예행연습이 되지 않도록 사회가 바뀌어야

"손님, 저 메뉴는 2인 이상만 주문됩니다."

지난 금요일, 충주에 있는 회사에서 오후 1시부터 강의가 있었다. 점심을 해결하려고 식당을 찾던 중 '육개장 맛집'이라는 작은 현수막이 눈에 들어왔다. 마침 뜨끈하고 얼큰한 국물이 당기던 참이어서, 문을 열고 들어가 반가운 마음으로 주문했다.

"육개장 하나 주세요."
"육개장은 2인 이상만 주문 가능하세요."

"아, 1인분은 안 되나요? 보통 육개장은 1인분이 기본 아닌가요?"
"죄송해요. 저흰... 다른 것도 맛있어요."

할 말이 사라졌다. 시간도 부족했고, 괜히 분위기를 흐리고 싶지 않아 된장찌개로 바꿔 주문했다. 음식이 준비되는 동안 마음은 편치 않았다. 즐거운 식사를 기대했는데…

1인분은 안 된다는 식당들

 

▲  2인분 이상 주문이 가능한 메뉴들
ⓒ 오마이뉴스


사실 전국을 다니다 보면 이런 풍경이 낯설지 않다. 일반 식당 메뉴판에는 꼭 먹어보고 싶은 메뉴 옆에 '2인 이상 주문 가능'이라는 문구가 붙어 있다. 혼자 들어간 손님은 애초에 선택지에서 빠져 있는 셈이다. 결국 1인용 메뉴만 고르게 되는데, 배는 채워도 마음 한쪽에서는 이런 푸념이 올라온다.

"제기랄, 혼자 오면 손님 아닌가?"

퇴직 전에는 이런 문구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늘 여럿이 함께 다녔고, 주문도 "이거 둘, 저거 셋 주세요"로 끝났다. 그때의 '2인 이상'은 단체 손님을 위한 단순한 안내였다. 하지만 은퇴 후 혼밥 시간이 늘어나면서 부터, 똑같은 문장도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당신은 혼자 왔으니, 이건 선택할 수 없습니다."

퇴직 전 점심은 의식에 가까웠다. 정해진 시간이 되면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회사 앞 식당으로 몰려갔다. 메뉴는 회의하듯 정했다. 누구는 제육을, 또 다른 동료는 찌개를 외쳤다. 밥보다 말이 더 많았다. 승진 이야기, 팀 사정, 아이들 진학 문제, 주말 계획까지. 숟가락 소리와 웃음소리가 뒤섞인 점심시간은 언제나 시끌벅적했다.

하지만 퇴직 후 식사 풍경은 확연히 드러나는 차이가 있다. 퇴직 전 점심이 '대화 식사'였다면, 퇴직 후 점심은 '묵언 식사'에 가깝다. 주문을 마치면 더 이상 말을 섞을 일이 없다. 옆 테이블에서는 세상 이야기가 쏟아지는데, 내 자리에서는 '생각의 소리'만 요란하다.

"강의에서 빼야 할 게 있을까?"
"다음 원고는 어떤 구조로 써야 하지?"

혼자 먹는 밥상에서 나는 나와만 대화한다. 이 변화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퇴직과 함께 우리는 월급뿐 아니라 점심 동료를 잃는다. 조직 안에서는 하루 한 번쯤은 누군가와 밥을 먹는다. 그러나 회사를 떠나는 순간, '점심 동료'라는 안전망이 함께 사라진다. 특히, 1인 가구, 조기 퇴직, 불안한 재취업이 겹치면서 중·장년의 밥상은 점점 더 좁아지고 있다.

 

▲  요즘엔 혼밥 좌석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 오마이뉴스


퇴직자의 혼밥은 개인의 선택이라기보다 구조가 만든 결과다. 사회는 아직 이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다. 한쪽에서는 1인석, 셀프 주문 시스템이 늘어나며 혼밥을 배려하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2인 이상 주문 가능', '혼자 오시는 손님은 죄송합니다'라는 문구가 여전하다. 회전율과 매출 중심의 식당 구조, 단체 손님을 기준으로 짜인 영업 논리가 겹치면서 가장 먼저 선택권이 줄어드는 손님이 누구냐를 떠올려 보면 답은 분명하다. 혼자 온 퇴직자, 또는 1인 가구 노인들이다.

관계의 문제도 크다. 한국의 중·장년 남성은 일터 밖에서 관계를 새로 만드는 법을 배워본 적이 없다. 회사 동료, 거래처, 후배가 곧 '인간관계의 전부'였다. 그 관계망이 사라지는 순간, 밥을 함께 먹을 사람 명단이 통째로 비워진다. "같이 점심 드실래요?"라는 한 마디가 이렇게 어렵게 느껴질 줄은 예전엔 몰랐다. 밥값보다 말을 걸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훨씬 더 아프다.

물론 혼밥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나에게 맞는 메뉴를 고르고, 내 속도로 먹는 건 퇴직 이후 얻은 자유다. 하지만 자유와 방치는 다르다. 혼밥이 '나를 돌보는 시간'이 될 수도 있지만, 아무도 나를 떠올리지 않는 시간으로 굳어질 수도 있다. 사회가 아무 장치도 마련하지 않으면, 혼밥은 서서히 고독의 예행연습이 되고 만다.

외로운 밥상이 되지 않도록

이제는 혼밥이 고립의 굴레가 되지 않게 하는 행동의 변화가 필요하다. 가령 경로당이나 복지관이라면 자주 나오지 못하는 어르신에게 "이번 주에 같이 점심 드실래요?", "오늘 복지관 밥상에 초대합니다"라는 문자 메시지를 보내는 프로그램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밥 한 끼를 함께하자는 짧은 메시지가 누군가에게는 하루를 버티게 해 주는 초대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동네 식당도 문턱을 낮추는 결단이 필요하다. 메뉴판에 "전 메뉴 1인 주문 가능합니다", "혼자 오셔도 괜찮습니다"라는 문구를 넣는 것만으로도 사람 냄새 나는 우리 동네 식당이 될 수 있다.

퇴직 후에는 아무리 돈벌이가 중요해도 일만 챙겨선 안 된다. 누구와 어떤 밥자리를 만들지도 함께 생각해야 한다. 나 역시 강의를 마친 뒤 곧장 집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는다. 상황이 허락하는 한도에서 관계자들과 밥 한 끼 하면서 사는 이야기를 나누려고 애쓴다. 그런 시간들이 퇴직 후의 나를 조용히 지탱해 주는 힘이 되니 말이다.

이제 퇴직자의 혼밥은 더 이상 특별한 풍경이 아니다. 시끄러운 회사 앞 식당이 아니라, 동네 어느 허름한 골목 식당에서, 나홀로 식탁 앞에 앉은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들의 밥상이 외로움의 끝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사회의 구조는 물론, 개인의 습관도 함께 바뀌어야 한다.

"고령화 시대, 혼자 먹는 밥이 더 이상 외롭지 않은 세상. 우리가 함께 만들어야 할 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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