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조는 광해군의 사망 소식을 전해듣고 나름 조의를 표했고 의외로 광해군의 장례에도 꽤나 신경을 써줬다. 이미 쫓겨난지 20년 가까이 지났고 죽은 사람 악독하게 대해봤자 별 소용없다는 생각이라도 들었는지, 명목상 '유배지 죄인'이 죽은 것임에도 고관대작이 죽었을 때처럼 3일간 조회를 정지했다. 심지어 인조는 아예 소선까지 하려고 했다가, 신하들이 너무 과하다고 반대하여 하지 않았다. 인조가 *소선까지 하려 했다는 말은 달리 바꿔 말하면 광해군을 '폐주'가 아닌 '선왕'으로 취급해줬다는 의미이며 반정 당시 폐모살제를 외치며 광해군을 임금으로도 여기지 않던 모습과 비교하면 달라진 취급을 엿볼 수 있다.
이후 광해군의 부음을 고하면서 예조의 관리들이 불경스럽게도 광해군을 존칭하려 했다는 말이 나왔는지 당일날 예조판서가 급히 달려와 잘못을 비는 내용이 실록에 나온다. 광해군이 '폐위'된 것을 '손위'했다고 말했거나 다른 죄도 많은데 '민심을 잃은 것'만으로 폐위되었다고 잘못을 축소한거 아니냐는 말이 나온 것. 이에 일부 신하들은 예조가 광해군을 띄워줬다며 죄를 물어야 한다는 의견을 보이기도 했으나 인조는 "예조 관리들이 어찌 다른 뜻을 가지고 그런 말을 했겠냐"면서 적당히 논란을 무마시켰다.
이후 인조는 예조참의 채유후(蔡裕後)를 보내 장례를 주관하게 했다. 채유후는 제주도에 도착해 7월 27일에 관덕정 앞에서 대제(大祭)를 거행했고 음력 8월 18일에 영구가 육지로 옮겨졌다. 제주에서 1개월, 남양주까지 가는 2개월 이렇게 시신이 옮겨지는 데는 총 3개월이 걸렸다. 때가 한여름이라 한창 더웠음에도, 여러 신하들의 노력으로 시신이 전혀 부패하지 않았다고 한다.
*소선 - 생선이나 고기가 들어가지 않은 상차림을 말한다. 조선 왕조에서 임금은 선왕, 왕실의 친인척, 아끼는 신하 등이 죽으면 소선으로 식단을 짜는 전통이 있었다. 태종이 죽기 직전 세종대왕은 고기반찬이 없으면 식사를 못하니 자기가 죽더라도 소선하지 말라고 한 일화가 유명하다.
사실 인조는 20년 간 임금 노릇하면서 속된 말로 현타가 많이 왔을 것이다. 우선 폐모살제의 명분이었던 인목왕후와 그 딸 정명공주 부부의 한심한 처세술을 보면서, '영창대군이 살아있을 때는 오죽했겠나.' 싶은 생각도 들었을 테고, 국제사회의 냉혹한 법칙을 무시하고 명분만 쫒았다가 두 번의 호란으로 굴욕이란 굴욕은 다 당해보면서 광해군에게 일종의 동병상련 같은 마음이 들었을 듯. 실제로 인조는 인목왕후가 승하하자마자 정명공주 내외를 철저하게 견제했고, 이 부부는 철저하게 숨죽여 살아야 했다.
장례
광해군 사망시 3일간 조회를 정지했고, 소선까지 하려다가 신하들의 만류로 소선은 철회함
소선을 하려고 했다는 걸 보면 당시 인조는 광해군을 최소한 왕실의 친인척으로는 여기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부분
신하들이 폐위된 광해군의 부음을 고했을 때 그를 존칭하는 말을 했는데도 처벌하지 않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