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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짤에 있는 저자도는 심지어 개발한다고 파서 없앴는데 자연 퇴적에 의해 다시 생겨나고 있는 중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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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60년대 저자도는 여름이면 시민들이 나룻배로 건너와 삼복더위를 식히던 시민들의 휴양지였다. 20대 600년 동안 서울에서 살아온 성해용(66)씨는 “여름철엔 피서객에게 수영팬티와 튜브용 자동차타이어를 빌려주는 가게, 매운탕을 파는 가게가 백사장을 따라 펼쳐졌어. 겨울엔 아이들이 섬 주위에서 썰매와 스케이트를 지쳤지”라고 당시를 떠올렸다.
저자도가 인간의 손을 탄 것은 1960년대 말이었다. 69년 현대건설은 건설부로부터 공유수면 매립허가를 받은 뒤 저자도의 모래 80만㎦를 파내 압구정지구 4만8천여평을 매립하는 데 이용했다. 72년 매립이 끝날 즈음 저자도의 상당 부분은 물속에 잠긴다.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2839.html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강, 한강의 변천사

1970년대 한강대교(제1한강교) 북단 모습. 한강대교 너머로 한강철교가 보인다. 갈수기여서 인지 강바닥이 다 드러나 있다. 1979년 2월 2일 촬영. -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배한철의 서울지리지] 서울 잠실동 롯데월드 뒷편의 석촌호수는 수도 서울의 유일한 호수공원이다. 이 석촌호수가 애초 한강의 본류였고 그 물줄기를 끊어 호수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아는 서울시민이 얼마나 될까.
과거 홍수 영향으로 한강은 지형이 수시로 바뀌었고 그중에서도 잠실은 특히 변동이 심했다. 사실 잠실은 조선 전기만 해도 왕실목장이 있던 살곶이벌(성동구 자양동 뚝섬)에 있었다. 강남권이 아니라 강북에 속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중종 15년(1520) 대홍수로 뚝섬을 가로질러 샛강이 생기면서 잠실 일대는 섬으로 분리됐다. 원래 한강 본류는 잠실섬 남쪽을 지나던 ‘송파강’(松坡江)이었다. 대홍수로 만들어진 북쪽의 샛강은 새로운 강이라고 해서 ‘신천’(新川)이라 불렸다.
잠실, 홍수로 뚝섬서 분리…70년대 한강개발때 육지화
잠실은 상류의 많은 흙이 쓸려 내려와 땅이 비옥했다. 거름 없이도 뽕나무가 잘 자라 잠실(蠶室)로 지칭됐던 것이다. 잠실섬 서쪽에는 ‘부리도’(浮里島)라는 섬이 별도로 존재했고 뽕나무는 이 부리도가 제일 많았다. 부리도는 홍수때 잠실벌이 대부분 물에 잠기고 부리도 쪽만 드러나 ‘물 위에 떠 있는 섬마을 같다’는 의미로 붙여진 지명이다.
1971년 ‘한강개발 3개년계획’의 일환으로 부리도·잠실섬을 삼전·석촌·송파와 연결해 육지화하고 일대 1124만㎡(약 340만평)에 잠실아파트 단지와 잠실종합운동장을 짓는 사업이 추진됐다.

1910년 잠실 일대 지도. 오른쪽 섬이 잠실이다. 아래쪽이 한강(송파강)이고 위쪽은 신천이다. 1971년 1차 한강개발때 송파강은 매립해 육지화하는 대신 신천 쪽의 강폭을 넓혔다. 왼쪽에는 저자도도 보인다. 마찬가지로 1차 한강개발때 이곳 모래를 파내 압구정을 메우면서 사라졌다. - 지도 국토정보플랫폼.
그러면서 남쪽 송파강은 매립해 석촌호수를 조성하고 북쪽의 신천은 너비를 넓혀 현재의 한강이 됐다. 한강의 샛강이 원래의 강줄기를 대체한 것이다. 뽕나무 재배와 누에치기가 생업이던 원주민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부리도 출신자들은 옛마을 이름을 전승하기 위해 1993년 9월 30일 마을터(아시아공원)에 기념비를 세우고 매년 음력 10월초 기념비 앞에서 상신제(桑神祭) 고사를 지내고 있다.
조선시대 한강에 한해 배 1만척 몰려
한강은 서울을 대표하는 명소이다. 시민들은 한강이 서울에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서울을 방문한 외국인들도 주저없이 한강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심 하천의 하나로 꼽는다.

1960년대 개발 전의 한강모습. 오늘날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든 한강의 전경이다. 1967년 3월 25일 촬영. -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그런데 우리는 한강의 옛모습을 얼마나 기억하고 있을까.
조선의 한강은 전국의 모든 물화가 집하됐다가 다시 전국으로 분산되는 해운의 중심지였다. 19세기초 전국에서 곡식이나 생선을 싣고 한강에 모여드는 상선의 수는 한해 1만 척 이상이었다.
강에는 포구들이 빽빽했다. 한강진(한남동)은 경기 광주로 가는 길목의 나루터로 한양의 물화가 삼남(충청, 전라, 경상)으로 나가는 중요한 통로였다.
노량진은 정조가 사도세자의 묘소가 있는 수원 화성으로 행차할 때 배다리가 놓였던 곳이다. 노량진의 드넓은 백사장에서는 1만명 이상의 대규모 부대가 모여 군사훈련과 사열을 했다.
용산은 경상도, 강원도, 충청도, 경기도 지방의 세곡선이 모이는 물류 중심지였다. 한강 포구에서 고개를 넘지 않고 도성으로 갈 수 있는 최단거리였다. 용산에는 세곡을 보관하는 창고가 여러 곳 있었으며 배로 운송된 하역물품을 창고까지 운송하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마포는 서해의 어물이 많이 몰려와 생선, 건어물, 젓갈, 소금 등의 해산물이 집하됐다. 밀물 때가 되면 서해에서 한강을 따라 올라온 바닷물이 마포 부근까지 들어차면서 수심이 깊어 큰 배가 정박하기가 다른 포구보다 유리했다.
서강은 용산과 더불어 조세 수송선의 집결지로 황해도, 전라도, 충청도의 세곡선이 모였다. 서강포구에는 공세청(세금징수 관청), 점검청(공미검사 관청), 광흥창(관료녹봉 보관창고) 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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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9/0005220586?sid=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