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매거진=최여민 작가] 집은 나의 세계이자 안식처다. 낯선 세상에서 온갖 긴장감을 안고 돌아올 때마다 늘 한결같은 평온함으로 나를 감싼다. 그 잔잔함에 익숙해질수록 바깥은 점점 낯설어지고, 자연스레 집 안에 더 오래 머무르게 된다. 계절의 변화는 어느새 창밖을 스쳐 가는 풍경이 되었고, 널뛰듯 오가는 계절 앞에서 그 변화를 느끼는 일도 어려워졌다.
그런 나에게도 봄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창틈으로 스며든 바람은 한결 부드럽고 햇살은 벽 위에 오래 머문다. 하지만 북향으로 이사한 탓인지 올해의 봄은 유난히 조용하고 낯설다. 바닥에 남은 찬 기운은 여전히 몸을 굳게 하고, 창을 타고든 햇살마저도 금세 사라진다.
사람들은 밖으로 나가 피어난 꽃과 따스한 햇살을 온몸으로 느끼며 봄을 실감한다. 공원과 산책로는 가벼운 옷차림의 사람들로 활기를 띠고, 벚꽃은 거리마다 밝은 빛을 더한다. 어느새 봄을 가장 먼저 알리는 아몬드 나무에도 꽃이 피었다. 이제는 봄의 도착을 외면할 수 없다.
꽃잎들은 바람을 타고 하늘로 흩어지며 세상과 경계 없이 뒤섞인다. 화면을 가득 메운 꽃잎과 나뭇가지들은 봄의 존재를 부드럽게 전하며 시선을 끈다. 피에르 보나르의 ‘꽃이 핀 아몬드 나무’는 전통적인 원근법을 벗어나 평면적으로 화면을 구성함으로써, 봄의 기운을 단순하면서도 깊이 있게 담아낸다. 손끝으로 문지른 듯한 투박한 붓질은 서정적인 여운을 오래도록 남긴다. 이 작품에서 형태는 모호하게 흐려져 있지만, 색채만큼은 명확하고 직설적으로 다가온다.
꽃잎 사이로 은근히 스며든 연한 파랑, 밝은 노랑, 따스한 붉은빛은 작가의 섬세한 감정을 조용히 전한다. 화면 곳곳에 남겨진 붓 자국은 계절이 흐르는 리듬을 따라가듯 시간의 흐름을 감각적으로 기록한다. 형태보다 색과 감각을 중시한 이 작품은 따뜻한 색조와 평면적인 구성을 통해 마음의 깊은 곳으로 이끈다.
프랑스 후기 인상주의 화가이자 나비파의 중심인물이었던 피에르 보나르는 법학을 공부하다 예술의 길을 선택했고 생의 마지막 시기를 남프랑스에서 보냈다. 후기 인상주의가 단순한 시각적 재현을 넘어 감정을 담아내고자 했다면, 나비파는 장식적인 표현과 상징성을 통해 감정과 상상력을 탐구했다. 보나르는 이러한 흐름 속에서 자연의 변화와 일상 속 감정을 섬세한 색채로 포착하며 자신만의 화풍을 완성했다.
‘꽃이 핀 아몬드 나무’는 그의 삶이 끝나갈 무렵인 1946년에 제작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의 불안한 시대였지만 작품은 자연의 생명력과 조용한 회복의 힘을 전한다. 집 창밖에 핀 아몬드 꽃을 바라보며 그린 이 그림에는 세상을 향한 작가의 단단한 긍정이 담겨 있다. 혼란과 상처가 채 가시지 않은 시기에도 아몬드 나무는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며 어김없이 꽃을 피운다.
조용히 기다리기만 하던 봄은 북향의 창가엔 좀처럼 쉽게 오지 않는다. 기다림만으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올해는 거리로 나가 직접 봄을 마주하기로 했다. 물론 지금의 봄은 여전히 변덕스럽다. 갑작스레 눈이 내리거나 미세먼지가 하늘을 덮기도 하고, 어제의 내복이 오늘의 반팔로 바뀌기도 한다. 그런데도 봄은 분명하게 다가오고 있다.
삶의 끝자락에서 세상은 여전히 혼란했고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았다. 그럼에도 아몬드 나무는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며 어김없이 꽃을 피운다. 그리고 그 나무를 바라보던 보나르는 말한다. 너의 봄도, 반드시 올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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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 [최여민의 뮤지엄 노트] 당신의 봄은 지금 어디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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