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팁/유용/추천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속 문학평론가 신형철이 추천하는 소설 6편
26,127 303
2025.03.29 18:04
26,127 303

"첫째, 소설일 것.

둘째, 시적일 것.

셋째, 짧을 것.

이 기준에 충실히 부합하는 작품 여섯 개를 골랐다. 이 소설들은 거의 완전무결한 축복이다. 소설을 써야 한다면, 이렇게 쓰고 싶다."

 

(순서는 출간순)

 

1. 마루야마 겐지 <달에 울다>

언젠가 어느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가장 아끼는 문장을 제시해보라는 요구를 받았을 때 나는 이 세상에는 '불의 문장'과 '물의 문장'이 있다고 전제한 뒤에 청년 마르크스의 <헤겔 법철학 비판 서설>과 마루야마 겐지의 이 소설을 (그중에서도 82, 83쪽을) 내밀었다. 전자를 읽으면 정신이 타고 후자를 읽으면 영혼이 젖는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한가. 내게는 '마르크스 그리고 마루야마'다.

 

 

 

2. 크리스토프 바타이유 <다다를 수 없는 나라>

이 소설의 번역자인 김화영 선생의 말씀, "책을 다 읽고, 그 후 몇 번이나 다시 읽고, 그리고 번역을 하고 마침내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나는 그 짧은 문장들 사이에서 배어나오는 기이한 적요함, 거의 희열에 가까울 만큼 해맑은 슬픔의 위력으로부터 완전히 놓여나지 못하고 있다." 이 소설을 읽은 지 십 년이 됐지만 나 역시 아직도 놓여나지 못하고 있다. 내 눈으로 읽고도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소설이다. 

 

 

 

3. 아고타 크리스토프 <어제>

이 소설에서 주인공은 두 번 칼을 드는데, 한 번은 남자의 등에, 또 한 번은 다른 남자의 배에 찌른다. 그러나 누구도 죽지 않는다. 이것이 이 작가가 삶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삶에 난자당하며 겨우 성장하는 불행한 아이들이 제아무리 칼을 휘둘러도 삶은 베어지지 않는다는 것. 칼로 사람을 찌르는 장면이 슬프게 느껴진다는 것은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세계 안에서는 특별한 일도 아니다. 이 작가는 예상치 못한 순간에, 최소한의 문장으로, 가장 강렬한 감정을 창조하여 독자를 베어버린다.

 

 

 

4. 배수아 <철수>

그녀의 소설에는 상투적인 인물, 상황, 대사, 통찰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배수아의 소설에 나오는 인물, 상황, 대사, 통찰은 오직 배수아의 소설에만 나온다. 1988년이 배경인 이 독한 '계급적 연애소설'에 '철수'라는 이름을 제목으로 얹을 사람이 또 있을까. 그리고 배수아의 문장이 번역 투라는 한물간 비난을 아직도 멈추지 않는 분들에게 한마디. 그녀의 소설에는 '상투적으로 자연스러운' 문장이 거의 없다. 그래서 그것이 무슨 문제란 말인가. 문학은 어학이 아니다. "뛰어난 작가는 모국어를 외국어처럼 사용한다."(프루스트)

 

 

 

5. 파스칼 키냐르 <로마의 테라스>

이 작가의 다른 장점들이 더 많이 칭송되고 있지만 그는 멋진 이야기를 만들어낼 줄 아는 작가이기도 하다. 키냐르의 책 중에서 한국 독자들에게 가장 덜 읽힌 작품이지만 나는 그의 다소 실망스러운 근작들보다 이 책을 더 아낀다. 이 소설보다 더 짧은 이야기를 원하는 분들에게는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의 2부를 권한다.

 

 

 

6. 황정은 <백의 그림자>

이 책의 끝에는 내가 쓴 변변찮은 '해설'이 붙어 있는데, 글의 제목이 '백의 그림자에 붙이는 다섯 개의 주석'으로, 보시다시피 꽤나 삭막하다. '사랑한다면 이들처럼'과 '살아간다면 이들처럼'이라는 두 제목을 놓고 고민하다가 어느 쪽도 포기할 수 없어서 둘 다 포기해버렸다.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순간 이 소설에 상처를 주게 될 것 같아서였다. 차라리 둘 다 쓸 걸 그랬지. 이 소설 앞에서는 뭔가 그렇게 조심스러워진다는 얘기다.

 

 

 

 

목록 스크랩 (208)
댓글 303
댓글 더 보기
새 댓글 확인하기

번호 카테고리 제목 날짜 조회
이벤트 공지 [🎬영화이벤트] <프로젝트 헤일메리> IMAX 시사회 초대 이벤트 739 00:06 10,009
공지 [공지] 언금 공지 해제 24.12.06 4,904,455
공지 📢📢【매우중요】 비밀번호 변경 권장 (현재 팝업 알림중) 24.04.09 11,851,762
공지 공지가 길다면 한번씩 눌러서 읽어주시면 됩니다. 23.11.01 12,890,776
공지 ◤더쿠 이용 규칙◢ [스퀘어 정치글은 정치 카테고리에] 20.04.29 35,178,411
공지 정치 [스퀘어게시판 정치 카테고리 추가 및 정치 제외 기능 추가] 25.07.22 1,062,243
공지 정보 더쿠 모바일에서 유튜브 링크 올릴때 주의할 점 782 21.08.23 8,506,362
공지 정보 나는 더쿠에서 움짤을 한 번이라도 올려본 적이 있다 🙋‍♀️ 268 20.09.29 7,425,390
공지 팁/유용/추천 더쿠에 쉽게 동영상을 올려보자 ! 3600 20.05.17 8,631,115
공지 팁/유용/추천 슬기로운 더쿠생활 : 더쿠 이용팁 4016 20.04.30 8,517,681
공지 팁/유용/추천 ◤스퀘어 공지◢ [9. 스퀘어 저격판 사용 금지(무통보 차단임)] 1236 18.08.31 14,397,407
모든 공지 확인하기()
3009214 기사/뉴스 [단독]'보플2' 1등 이상원, '1등들' 출격…알디원 1등 기세 잇는다 16:15 77
3009213 유머 어제도 예언을 적중시킨 경제의 신jpg 16:15 229
3009212 유머 난 솔직히 한드 사랑하는 외국팬들 보면서 다른 나라 드라마를 저렇게까지 좋아할 수 있나….? 2 16:15 178
3009211 유머 돌 버블 자동번역 대참사 1 16:14 153
3009210 유머 미친 츤데레 16:14 37
3009209 이슈 8년 지난 지금도 음원발매 소취하는 남녀아이돌 듀엣 16:14 75
3009208 정보 2026 YG PLAN | YG ANNOUNCEMENT 16:13 111
3009207 기사/뉴스 [단독]정경호·전여빈, '불혹하는 로맨스' 주인공(종합) 2 16:11 460
3009206 유머 가게에서 손님들이 치정이야기해서 음악 줄이고 듣는 직원 6 16:11 706
3009205 이슈 역대 코스피 하락률과 그 원인 26 16:11 1,178
3009204 유머 야무지게 솜방망이 먹방하는 고양이 16:10 167
3009203 이슈 미야오 안나 수인 인스타그램 업로드 16:10 103
3009202 기사/뉴스 [단독] 명일동 땅꺼짐 유가족, 결국 고소장 제출···“오세훈·김보현 책임져라” 7 16:09 673
3009201 이슈 한 아파트 주민이 4년간 살던곳 이사가면서 같은동 주민에게 남긴 편지.jpg 8 16:08 1,541
3009200 이슈 국가별 호르무즈 해협 의존도.jpg 22 16:07 1,242
3009199 이슈 [선공개] 최가온 선수의 올림픽 비하인드와 반전 매력 댄스🏅 윤종신과 거장감독 항준의 과거 일화까지😂 유퀴즈온더블럭 16:07 178
3009198 이슈 이란 전쟁 나서 혼자 비행기 타고 온 이탈리아 국방장관 40 16:05 2,807
3009197 기사/뉴스 진보 성향 군판사 선별…'계엄 군사재판' 대비했나 3 16:03 255
3009196 기사/뉴스 일본 도쿄 돔, 7년 만에 인공잔디 갱신 설영 & 철수의 전환 작업에서도 대응할 수 있는 내구성 준비 2 16:03 169
3009195 이슈 이란이 드론쪽을 잘 운용하고 있다고 함 3 16:03 1,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