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팁/유용/추천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속 문학평론가 신형철이 추천하는 소설 6편
26,255 305
2025.03.29 18:04
26,255 305

"첫째, 소설일 것.

둘째, 시적일 것.

셋째, 짧을 것.

이 기준에 충실히 부합하는 작품 여섯 개를 골랐다. 이 소설들은 거의 완전무결한 축복이다. 소설을 써야 한다면, 이렇게 쓰고 싶다."

 

(순서는 출간순)

 

1. 마루야마 겐지 <달에 울다>

언젠가 어느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가장 아끼는 문장을 제시해보라는 요구를 받았을 때 나는 이 세상에는 '불의 문장'과 '물의 문장'이 있다고 전제한 뒤에 청년 마르크스의 <헤겔 법철학 비판 서설>과 마루야마 겐지의 이 소설을 (그중에서도 82, 83쪽을) 내밀었다. 전자를 읽으면 정신이 타고 후자를 읽으면 영혼이 젖는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한가. 내게는 '마르크스 그리고 마루야마'다.

 

 

 

2. 크리스토프 바타이유 <다다를 수 없는 나라>

이 소설의 번역자인 김화영 선생의 말씀, "책을 다 읽고, 그 후 몇 번이나 다시 읽고, 그리고 번역을 하고 마침내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나는 그 짧은 문장들 사이에서 배어나오는 기이한 적요함, 거의 희열에 가까울 만큼 해맑은 슬픔의 위력으로부터 완전히 놓여나지 못하고 있다." 이 소설을 읽은 지 십 년이 됐지만 나 역시 아직도 놓여나지 못하고 있다. 내 눈으로 읽고도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소설이다. 

 

 

 

3. 아고타 크리스토프 <어제>

이 소설에서 주인공은 두 번 칼을 드는데, 한 번은 남자의 등에, 또 한 번은 다른 남자의 배에 찌른다. 그러나 누구도 죽지 않는다. 이것이 이 작가가 삶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삶에 난자당하며 겨우 성장하는 불행한 아이들이 제아무리 칼을 휘둘러도 삶은 베어지지 않는다는 것. 칼로 사람을 찌르는 장면이 슬프게 느껴진다는 것은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세계 안에서는 특별한 일도 아니다. 이 작가는 예상치 못한 순간에, 최소한의 문장으로, 가장 강렬한 감정을 창조하여 독자를 베어버린다.

 

 

 

4. 배수아 <철수>

그녀의 소설에는 상투적인 인물, 상황, 대사, 통찰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배수아의 소설에 나오는 인물, 상황, 대사, 통찰은 오직 배수아의 소설에만 나온다. 1988년이 배경인 이 독한 '계급적 연애소설'에 '철수'라는 이름을 제목으로 얹을 사람이 또 있을까. 그리고 배수아의 문장이 번역 투라는 한물간 비난을 아직도 멈추지 않는 분들에게 한마디. 그녀의 소설에는 '상투적으로 자연스러운' 문장이 거의 없다. 그래서 그것이 무슨 문제란 말인가. 문학은 어학이 아니다. "뛰어난 작가는 모국어를 외국어처럼 사용한다."(프루스트)

 

 

 

5. 파스칼 키냐르 <로마의 테라스>

이 작가의 다른 장점들이 더 많이 칭송되고 있지만 그는 멋진 이야기를 만들어낼 줄 아는 작가이기도 하다. 키냐르의 책 중에서 한국 독자들에게 가장 덜 읽힌 작품이지만 나는 그의 다소 실망스러운 근작들보다 이 책을 더 아낀다. 이 소설보다 더 짧은 이야기를 원하는 분들에게는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의 2부를 권한다.

 

 

 

6. 황정은 <백의 그림자>

이 책의 끝에는 내가 쓴 변변찮은 '해설'이 붙어 있는데, 글의 제목이 '백의 그림자에 붙이는 다섯 개의 주석'으로, 보시다시피 꽤나 삭막하다. '사랑한다면 이들처럼'과 '살아간다면 이들처럼'이라는 두 제목을 놓고 고민하다가 어느 쪽도 포기할 수 없어서 둘 다 포기해버렸다.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순간 이 소설에 상처를 주게 될 것 같아서였다. 차라리 둘 다 쓸 걸 그랬지. 이 소설 앞에서는 뭔가 그렇게 조심스러워진다는 얘기다.

 

 

 

 

목록 스크랩 (209)
댓글 305
댓글 더 보기
새 댓글 확인하기

번호 카테고리 제목 날짜 조회
이벤트 공지 💚더쿠X려💚 칙칙 뿌리면 뽕긋 살아나는 뿌리볼륨🌿 려 루트젠 뿌리볼류머 체험단 모집 136 00:05 2,730
공지 [공지] 언금 공지 해제 24.12.06 5,184,438
공지 📢📢【매우중요】 비밀번호 변경 권장 (현재 팝업 알림중) 24.04.09 12,436,192
공지 공지가 길다면 한번씩 눌러서 읽어주시면 됩니다. 23.11.01 13,146,344
공지 ◤더쿠 이용 규칙◢ [스퀘어 정치글은 정치 카테고리에] 20.04.29 35,740,099
공지 정치 [스퀘어게시판 정치 카테고리 추가 및 정치 제외 기능 추가] 25.07.22 1,118,965
공지 정보 더쿠 모바일에서 유튜브 링크 올릴때 주의할 점 785 21.08.23 8,573,765
공지 정보 나는 더쿠에서 움짤을 한 번이라도 올려본 적이 있다 🙋‍♀️ 270 20.09.29 7,484,443
공지 팁/유용/추천 더쿠에 쉽게 동영상을 올려보자 ! 3623 20.05.17 8,691,317
공지 팁/유용/추천 슬기로운 더쿠생활 : 더쿠 이용팁 4021 20.04.30 8,584,502
공지 팁/유용/추천 ◤스퀘어 공지◢ [9. 스퀘어 저격판 사용 금지(무통보 차단임)] 1236 18.08.31 14,539,356
모든 공지 확인하기()
3070402 유머 배우자들 반사신경이 신이라 카페에서도 혼나는 강남과 고우림 7 07:35 845
3070401 이슈 외국사람들이 듣기에 한국어는 어떻게 들릴까 07:34 230
3070400 유머 꿈에서도 함께! 꾸벅꾸벅 지킴이 베개 커버 07:34 153
3070399 정보 넷플릭스 원더풀스 패트롤 2 07:33 466
3070398 이슈 실시간 올라오는 나홍진 영화 <호프> 칸 반응들 ㄷㄷㄷ.jpg (스포, 추가중) 13 07:32 1,602
3070397 유머 센스 좋았던 잔나비 최정훈 3 07:31 583
3070396 정보 엄마 유전 아빠 유전 18 07:26 1,648
3070395 이슈 어제 결혼한 중식 박은영 셰프 2 07:24 2,112
3070394 이슈 요즘 MZ 조폭들 인사법 화제 10 07:23 1,818
3070393 기사/뉴스 '만 28세' 이재욱, 잠시만 안녕…오늘(18일) 현역 입대 "잘 다녀오겠다" 5 07:17 1,640
3070392 이슈 대군부인도 조선구마사처럼 작감배 사과문 작성+폐기해야하는게 맞음.jpg 56 07:08 3,172
3070391 유머 발레 6년 이상 하다가 데뷔했는데 07:02 3,069
3070390 정보 신한플러스/플레이 정답 8 06:35 336
3070389 이슈 ㄹㅇ 적나라한 라식 수술 과정.gif (🚫경고🚫주의) 47 05:01 4,307
3070388 이슈 실시간 <호프> 칸영화제 레드카펫 게티이미지.jpg (황정민 조인성 정호연 마이클 패스벤더 알리시아 비칸데르 테일러 러셀) 29 04:53 6,953
3070387 유머 새벽에 보면 등골 서늘해지는 괴담 및 소름썰 모음 14편 2 04:44 532
3070386 유머 원덬이가 볼때마다 정주행하는 채널 4 04:36 1,921
3070385 이슈 인피니트 어깨까자 '내꺼하자' 2 04:34 786
3070384 이슈 다이소 대한민국 지도 23 04:32 7,813
3070383 이슈 오히려 이렇게 생겨서 더 무섭다 vs 하나도 안 무섭다로 갈리는 애나벨 실제 모습 15 04:25 3,7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