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팁/유용/추천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속 문학평론가 신형철이 추천하는 소설 6편
26,333 305
2025.03.29 18:04
26,333 305

"첫째, 소설일 것.

둘째, 시적일 것.

셋째, 짧을 것.

이 기준에 충실히 부합하는 작품 여섯 개를 골랐다. 이 소설들은 거의 완전무결한 축복이다. 소설을 써야 한다면, 이렇게 쓰고 싶다."

 

(순서는 출간순)

 

1. 마루야마 겐지 <달에 울다>

언젠가 어느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가장 아끼는 문장을 제시해보라는 요구를 받았을 때 나는 이 세상에는 '불의 문장'과 '물의 문장'이 있다고 전제한 뒤에 청년 마르크스의 <헤겔 법철학 비판 서설>과 마루야마 겐지의 이 소설을 (그중에서도 82, 83쪽을) 내밀었다. 전자를 읽으면 정신이 타고 후자를 읽으면 영혼이 젖는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한가. 내게는 '마르크스 그리고 마루야마'다.

 

 

 

2. 크리스토프 바타이유 <다다를 수 없는 나라>

이 소설의 번역자인 김화영 선생의 말씀, "책을 다 읽고, 그 후 몇 번이나 다시 읽고, 그리고 번역을 하고 마침내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나는 그 짧은 문장들 사이에서 배어나오는 기이한 적요함, 거의 희열에 가까울 만큼 해맑은 슬픔의 위력으로부터 완전히 놓여나지 못하고 있다." 이 소설을 읽은 지 십 년이 됐지만 나 역시 아직도 놓여나지 못하고 있다. 내 눈으로 읽고도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소설이다. 

 

 

 

3. 아고타 크리스토프 <어제>

이 소설에서 주인공은 두 번 칼을 드는데, 한 번은 남자의 등에, 또 한 번은 다른 남자의 배에 찌른다. 그러나 누구도 죽지 않는다. 이것이 이 작가가 삶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삶에 난자당하며 겨우 성장하는 불행한 아이들이 제아무리 칼을 휘둘러도 삶은 베어지지 않는다는 것. 칼로 사람을 찌르는 장면이 슬프게 느껴진다는 것은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세계 안에서는 특별한 일도 아니다. 이 작가는 예상치 못한 순간에, 최소한의 문장으로, 가장 강렬한 감정을 창조하여 독자를 베어버린다.

 

 

 

4. 배수아 <철수>

그녀의 소설에는 상투적인 인물, 상황, 대사, 통찰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배수아의 소설에 나오는 인물, 상황, 대사, 통찰은 오직 배수아의 소설에만 나온다. 1988년이 배경인 이 독한 '계급적 연애소설'에 '철수'라는 이름을 제목으로 얹을 사람이 또 있을까. 그리고 배수아의 문장이 번역 투라는 한물간 비난을 아직도 멈추지 않는 분들에게 한마디. 그녀의 소설에는 '상투적으로 자연스러운' 문장이 거의 없다. 그래서 그것이 무슨 문제란 말인가. 문학은 어학이 아니다. "뛰어난 작가는 모국어를 외국어처럼 사용한다."(프루스트)

 

 

 

5. 파스칼 키냐르 <로마의 테라스>

이 작가의 다른 장점들이 더 많이 칭송되고 있지만 그는 멋진 이야기를 만들어낼 줄 아는 작가이기도 하다. 키냐르의 책 중에서 한국 독자들에게 가장 덜 읽힌 작품이지만 나는 그의 다소 실망스러운 근작들보다 이 책을 더 아낀다. 이 소설보다 더 짧은 이야기를 원하는 분들에게는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의 2부를 권한다.

 

 

 

6. 황정은 <백의 그림자>

이 책의 끝에는 내가 쓴 변변찮은 '해설'이 붙어 있는데, 글의 제목이 '백의 그림자에 붙이는 다섯 개의 주석'으로, 보시다시피 꽤나 삭막하다. '사랑한다면 이들처럼'과 '살아간다면 이들처럼'이라는 두 제목을 놓고 고민하다가 어느 쪽도 포기할 수 없어서 둘 다 포기해버렸다.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순간 이 소설에 상처를 주게 될 것 같아서였다. 차라리 둘 다 쓸 걸 그랬지. 이 소설 앞에서는 뭔가 그렇게 조심스러워진다는 얘기다.

 

 

 

 

댓글 305
댓글 더 보기
새 댓글 확인하기

번호 카테고리 제목 날짜 조회
이벤트 공지 [🎬영화이벤트] 쉿! 오늘은 우리끼리 노는 거야 <사랑의 하츄핑: 고래보석의 전설> 시크릿 팬밋업 시사회 초대 이벤트 29 00:05 26,512
공지 [🚨필독🚨] 로그인 보안 강화📢 로그인 목록 꼭 확인하세요📢 01:38 15,954
공지 [공지] 언금 공지 해제 24.12.06 5,809,628
공지 📢📢【매우중요】 비밀번호 변경 권장 (현재 팝업 알림중) 24.04.09 13,295,010
공지 공지가 길다면 한번씩 눌러서 읽어주시면 됩니다. 23.11.01 13,705,984
공지 ◤더쿠 이용 규칙◢ [스퀘어 정치글은 정치 카테고리에] 20.04.29 36,572,284
공지 정치 [스퀘어게시판 정치 카테고리 추가 및 정치 제외 기능 추가] 25.07.22 1,191,391
공지 정보 더쿠 모바일에서 유튜브 링크 올릴때 주의할 점 790 21.08.23 8,651,243
공지 정보 나는 더쿠에서 움짤을 한 번이라도 올려본 적이 있다 🙋‍♀️ 276 20.09.29 7,554,610
공지 팁/유용/추천 더쿠에 쉽게 동영상을 올려보자 ! 3639 20.05.17 8,773,341
공지 팁/유용/추천 슬기로운 더쿠생활 : 더쿠 이용팁 4023 20.04.30 8,657,443
공지 팁/유용/추천 ◤스퀘어 공지◢ [9. 스퀘어 저격판 사용 금지(무통보 차단임)] 1236 18.08.31 14,670,660
모든 공지 확인하기()
604304 유머 쓰레드에 애낳고 개유난 자랑대회 웃기다 5 20:26 623
604303 유머 도배 벽지 이렇게 얼레벌레 붙여도 되는거임? 9 20:24 879
604302 유머 초보 엄마 vs 경력직 엄마 아이바오 ❤️ 6 20:17 807
604301 유머 메인마스코트 아니라고 쫒겨나는 쓱 마스코트 배티 6 20:16 477
604300 유머 아주 뻔뻔하게 연기해버리는 냥아치 4 20:15 396
604299 유머 아픈 정도를 1~10 사이로 말씀해주시겠어요? 8 20:14 1,498
604298 유머 왜소증 어머니와 사는 집에 왜소증 친구가 놀러왔을 때 10 20:13 2,524
604297 유머 빅마마 이영현 손발 묶어도 체념, 연 라이브 가능? ㅋ 4 20:05 605
604296 유머 작은집사에게 빨려먹는 순서가 다가오는게 무서운 고양이 3 19:57 1,014
604295 유머 요 며칠 일본에서 엄청나게 욕먹고 있는 부모 22 19:53 4,089
604294 유머 I LOVE TIKOOO I LOVE FACEOOOO I LOVE YOU❤️❤️❤️❤️ I LOVE GAY 19:53 105
604293 유머 여자들 설레서 돌아가신다는 서인국 박보검 듀엣무대 6 19:52 502
604292 유머 처음보면 99%가 코라로 착각하는 사진 👃 10 19:49 1,445
604291 유머 여름바다에서 야무지게 논 아기너구리 4 19:43 1,119
604290 유머 막내바오 넷째바오의 조금씩 물들기 시작한 왕밤코❤️🐼 9 19:39 1,380
604289 유머 ??? : 투자라는 걸 전혀 모르고 저축만 하는 한심한 인생들 4 19:31 2,362
604288 유머 책 읽는 속도 11 19:29 1,729
604287 유머 집단 영숙사태 1 19:26 851
604286 유머 [아기판다 다이어리] 5화 40일차 무럭무럭 자라 메밀베개가 조금 작아진 넷째바오❤️🐼 7 19:23 1,055
604285 유머 화학자가 알려주는 '화장실에 향수 뿌리면 안 되는 이유' 9 19:22 2,2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