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세라핌 새 앨범 ‘HOT’ 리뷰
길을 따라 걷는다. 따라가야 할 선이 보일 때도, 보이지 않을 때도 있지만 그래도 전진한다. 지금까지의 트레일러에서 르세라핌은 런웨이, 계단, 통로, 길거리 위에서 항상 어딘가를 향해 힘차게 걸었다. 그러나 앞으로 나아갈수록 더 나아질 것이란 기대와 달리 ‘The World Is My Oyster’와 ‘The Hydra’에서 르세라핌만을 위해 세워졌던 런웨이, 멤버들을 받쳐주는 안정적인 바닥과 무대, 언제든 돌아가 자신을 재정비할 수 있는 백스테이지는 어느 순간 사라진다. 그들은 ‘Good Bones’에서는 지하로 떨어지고, 눈앞의 장애물을 부숴야만 했고, ‘Chasing Lightning’에서는 남들이 ‘미쳤다’고 여길 만한 모습으로 끝없는 계단을 오르거나 지붕에서 추락하고, 다시 비상해야만 나아갈 수 있었다. 이번 앨범 ‘HOT’의 트레일러 ‘Born Fire’에서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조차 없다. 눈앞에 보이든, 보이지 않든 채원이 따라갔던 길은 이제 완전히 끊겨 멈춰설 수밖에 없고, 남은 것은 아무리 기어도 빠져나갈 수 없는 어두운 통로와 아무리 걸어도 같은 곳으로 돌아오는 쳇바퀴 같은 길뿐이다.
이때 르세라핌은 주어진 궤도에서 이탈하며 새로운 길을 연다. ‘Born Fire’에서 사쿠라는 따라 걷던 하얀 선을 벗어나 공간을 마음대로 휘젓고 다니고, 윤진은 수도를 열어 공간에 불을 지른 후 모든 게 불타버린 재 속에서 다시 태어난다. 윤진은 자신이 속한 팀 ‘르세라핌’의 이름 속 ‘세라핌’의 상징인 끊임없이 뜨겁게 불타오르는 천사이자, 가장 어려운 상황에서 모든 것을 태우고 재 속에서 다시 태어난 불사조처럼 보인다. 그리고 트레일러는 천사와 불사조의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는 단어, ‘불사(不死)’로 마무리된다. 스스로 가진 모든 것, 심지어 자신조차도 완전히 불태우고 나서야 얻은 그 ‘영원’은 이들이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는 상황을 감수하고 다시 피어나기 위해 스스로 “온몸에 기름 붓고”, “불을 붙였기(light the flame)”(‘Ash’)에 가능한 일이다. ‘HOT’에서 르세라핌이 “내가 나로 살 수 있다면 재가 된대도 난 좋아”라고 노래하듯, ‘Born Fire’에서 카즈하는 자신이 걷는 길에, 은채는 자기 자신에게 불을 붙인다. 이처럼 르세라핌은 ‘나’로서 살기 위해 모든 것을 태우는 도전 속에서 “영원함 속 날아오를 불사조”이자 지금까지와 달리 불이 붙을수록 더욱 화려하고 위협적인 “날개가 돋아”난 천사가 된 것이다.
그래서 ‘EASY’-‘CRAZY’-‘HOT’으로 이어지는 3부작은 르세라핌이 자신이 처한 각박한 현실 속에서도 ‘나’로서 살기 위해 했던 모든 노력의 과정에 대한 파노라마이기도 하다. 앞선 트레일러 ‘Good Bones’와 ‘Chasing Lightning’에서 떨어지고, 부수고, 오르고, 추락하고, 비상하고, 멈춰서는 모든 과정이 없었다면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것도,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는 ‘기적’의 가능성을 시도해볼 일도 없었을지 모른다. 각 앨범의 타이틀 역시 매 트레일러마다 향했던 목적지이자 닿지 못했던 지향점이고, 그 도전의 과정을 완전히 끝내고난 다음 앨범에서야 이뤄낸 키워드들처럼 보인다. 예컨대 ‘EASY’에서 르세라핌은 “쉽지 않음 내가 쉽게” 만든다고 이야기하며 내가 하는 걸 ‘쉬워 보이게 만들고(“make it look easy”)’자 했지만, 한편으로는 ‘때론 다리가 풀려도(“때론 풀려, 나의 다리 but I keep it”)’, “다친대도 길을 걸어”야만 하는 “반쪽짜리 seraphim”일 뿐이기도 했다. 이를 반영하듯 안무 역시 복잡하지 않은것처럼 보이는 동작들을 각기 다른 속도로 계속해서 연결하면서, ‘EASY’라는 제목과 달리 역설적으로 전혀 쉽지 않은 현실을 담은 가사와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CRAZY’에서는 “Da da da”라는 가사에 맞춰 다리를 들고 손으로 툭툭 털어버리며 내가 처한 문제를 ‘쉽게’ 쳐낼 수는 있게 되었지만, “스스로 심판해 매일”, “Back in the days 미침에 미치지 못했던 me”와 같이 정작 원하는 대로 미칠 순 없었다. 이번 앨범 ‘HOT’의 타이틀 곡 ‘HOT’에 이르러 르세라핌은 주머니에 손을 넣거나 “Not running from it”이라는 가사에서 머리를 털기도 하고, ‘Come Over’에서 고개를 크게 뒤로 젖히거나 팔을 크게 휘젓고, 프리스타일로 가장 잘하는 안무나 제스처를 과장하듯 보여주기도 하며 모든 걸 내던지고 나 자신에 온전히 몰입하는 듯한 순간을 선보인다. 그러나 정작 이들의 지향점인 ‘HOT’함은 록과 디스코 장르를 가져오면서도 서정적인 멜로디로 전개되는 노래의 형식과 더불어, “내가 나로 살 수 있다면 재가 된대도 난 좋아”라는 가사처럼 “재가 된대도” 좋다는 마음으로 뛰어들었지만 역설적으로 “내가 나로 살 수”도 없고, 모든 걸 ‘재’가 될 때까지 태우지도 못하는 상태다. 트레일러의 한 장면처럼 불씨도 이제 막 점화되었고, ‘나’도 손끝과 날개 끝에 불이 붙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르세라핌은 지금까지의 모든 앨범과 타이틀 곡의 제목처럼, 대문자로 강조된 ‘HOT’을 통해 선언한다. 쉽지 않고, 미칠 수도 없는 현실을 이겨냈던 것처럼, 당장은 완전히 ‘HOT’할 수 없더라도 “도망치지 않고 불타오르”겠다고. 그리고 그 과정조차 “사랑하겠다”(“Not running from it 불타오르지 l love it”)(‘HOT’)고. 도달할 수 없을 것 같은 목표에서도 르세라핌은 원했던 것을 반드시 이뤄낼 것이다. 트레일러 ‘Born Fire’의 시작 장면에서 녹는 사람들과 그 ‘melt’가 가진 또 다른 뜻처럼, 자신들을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녹이고, 사랑에 빠뜨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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