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팁/유용/추천 이동진의 시네마레터 <터널을 지날 때>
5,841 20
2025.01.04 20:52
5,841 20

lrBxhK

그리스 신화에서 저승까지 찾아가 아내 에우뤼디케를 구해내는데 성공한 오르페우스에겐 반드시 지켜야 할 금기가 주어집니다. 그건 저승을 다 빠져나갈 때까지 절대로 뒤를 돌아봐서는 안 된다는 조건이지요. 그러나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 속 설명에 따르면 “그녀를 보고 싶은 마음에, 그녀가 포기했을까 두려움에 사로잡혀” 그는 그만 뒤를 돌아보고 맙니다. 이로 인해 아내를 데려오는 일은 결국 마지막 순간에 수포로 돌아가고 말지요.


구약 성서에서 롯의 아내도 그랬습니다. 죄악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가 불로 심판 받을 때 이를 간신히 피해 떠나가다가 신의 명령을 어기고 뒤를 돌아보는 바람에 소금 기둥이 되었으니까요. 금기를 깨고 뒤돌아보았다가 돌이나 소금 기둥이 되는 이야기는 전세계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우리의 경우도 탐욕스런 어느 부자의 집이 물로 심판 받을 때 뒤돌아본 그의 며느리가 바위가 되고 마는 충남 연기의 장자못 전설을 비롯해 조금씩 변형된 형태로 여러 지방에 전해져 내려오니까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치히로 역시 비슷한 상황에 놓입니다. 기상천외한 일들이 벌어지는 신들의 나라에서 돼지가 된 부모를 구출해 돌아가던 소녀 치히로는 바깥 세상으로 나가는 통로에 놓인 터널을 지나는 동안 결코 돌아봐서는 안 된다는 말을 듣는 거지요.


그런데 왜 허다한 이야기들에 이런 ‘돌아보지 말 것’에 대한 금기가 원형(原型)처럼 반복되는 걸까요. 그건 혹시 삶에서 지난했던 한 단계의 마무리는 결국 그 단계를 되짚어 생각하지 않을 때 비로소 완결된다는 것을, 사람들이 경험을 통해 체득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오르페우스처럼, 그리움 때문이든 두려움 때문이든, 지나온 단계를 되돌아볼 때 그 단계의 찌꺼기는 도돌이표처럼 지루하게 반복될 수 밖에 없는 게 아니겠습니까. 소금 기둥과 며느리 바위는 그 찌꺼기들이 퇴적해 남긴 과거의 퇴층 같은 게 아닐까요.


류시화 시인은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라는 시에서 “시를 쓴다는 것이/더구나 나를 뒤돌아본다는 것이/싫었다, 언제나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나였다/다시는 세월에 대해 말하지 말자”고 했지요. 정해종 시인도 ‘엑스트라’에서 “그냥 지나가야 한다/말 걸지 말고/뒤돌아보지 말고/모든 필연을/우연으로 가장해야 한다”고 했구요.


그런데 의미심장한 것은 치히로가 그 힘든 모험을 마치고 빠져 나오는 통로가 다리가 아닌 터널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두 개의 공간을 연결하는 통로엔 다리와 터널이 있겠지요. 다리는 텅 빈 공간에 ‘놓는’ 것이라면, 터널은 (이미 흙이나 암반으로) 꽉 차 있는 공간을 ‘뚫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리가 ‘더하기의 통로’라면 터널은 ‘빼기의 통로’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결국 삶의 단계들을 지날 때 중요한 것은 얻어낸 것들을 어떻게 한껏 지고 나가느냐가 아니라, 삭제해야 할 것들을 어떻게 훌훌 털어내느냐,인지도 모릅니다. 이제 막 어른이 되기 시작하는 초입을 터널로 지나면서 치히로는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들을 몸으로 익히면서 욕망과 집착을 조금 덜어내는 법을 배웠겠지요.


박흥식 감독의 영화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에서 사랑이 잘 풀리지 않을 무렵, 윤주는 봉수를 등지고 계단을 오르면서 “뒤돌아보지 마라. 뒤돌아보면 돌이 된다”고 되뇌지만 결국 뒤를 돌아 보지요. 그러나 그렇게 해서 쓸쓸히 확인한 것은 봉수의 부재(不在) 뿐이었습니다.


아무리 마음이 아파도 뒤돌아보지 마세요. 정말로 뒤돌아보고 싶다면 터널을 완전히 벗어난 뒤에야 돌아서서 보세요. 치히로가 마침내 부모와 함께 새로운 삶의 단계로 발을 디딜 수 있었던 것은 터널을 통과한 뒤에야 표정 없는 얼굴로 그렇게 뒤돌아본 이후가 아니었던가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시네마 레터 (2007. 3. 12)

https://m.blog.naver.com/lifeisntcool/220277185788


목록 스크랩 (12)
댓글 20
댓글 더 보기
새 댓글 확인하기

번호 카테고리 제목 날짜 조회
이벤트 공지 [💙디어스킨 X 더쿠💙] 열 오른 그날, 시원한 휴식을 위한 <디어스킨 에어쿨링 생리대> 체험 이벤트 401 04.16 31,307
공지 [공지] 언금 공지 해제 24.12.06 1,724,661
공지 📢📢【매우중요】 비밀번호❗❗❗❗ 변경❗❗❗ 권장 (현재 팝업 알림중) 24.04.09 6,441,779
공지 공지가 길다면 한번씩 눌러서 읽어주시면 됩니다. 23.11.01 9,604,579
공지 ◤더쿠 이용 규칙◢ [스퀘어 정치글 금지관련 공지 상단 내용 확인] 20.04.29 28,823,007
공지 정보 더쿠 모바일에서 유튜브 링크 올릴때 주의할 점 766 21.08.23 6,699,155
공지 정보 나는 더쿠에서 움짤을 한 번이라도 올려본 적이 있다 🙋‍♀️ 243 20.09.29 5,624,708
공지 팁/유용/추천 더쿠에 쉽게 동영상을 올려보자 ! 3494 20.05.17 6,365,360
공지 팁/유용/추천 슬기로운 더쿠생활 : 더쿠 이용팁 3998 20.04.30 6,667,186
공지 팁/유용/추천 ◤스퀘어 공지◢ [9. 스퀘어 저격판 사용 금지(무통보 차단임)] 1236 18.08.31 11,696,513
모든 공지 확인하기()
2690254 이슈 추미애 페이스북 <신천지와 인간 쥐> 1 12:06 83
2690253 유머 일본 최강 초딩 12:06 67
2690252 이슈 공항 출국하는 키스오브라이프 멤버들 2 12:05 153
2690251 이슈 문형배 이미선 재판관 퇴임 기념 단체사진 4 12:04 629
2690250 기사/뉴스 "애국 자막이네"…넷플릭스 '기안장', 일어까지 완벽하게 독도 표기 1 12:04 197
2690249 이슈 엔믹스 NMIXX 공식 팬클럽 NSWER 3기 모집 안내 DEXXERT SHOP: We Are Hiring! ◡̈⋆* 1 12:04 59
2690248 이슈 중국 팬싸에서 스탭이 하이파이브는 안된다고 했는데 손깍지까지 껴준 레벨 슬기 1 12:04 151
2690247 기사/뉴스 [단독] ‘데뷔 21주년’ 이승기, 5월 가수로 돌아온다 2 12:03 94
2690246 정보 판타스틱4-새로운 출발 예고편 3 12:03 63
2690245 기사/뉴스 김동연 캠프 “권리당원 여조업체 의심돼…누가 싸고 도나” 10 12:03 280
2690244 이슈 현아 (HyunA) DS [못 (Mrs. Nail)] Concept Photo #1 12:02 152
2690243 정보 토스 15 12:02 425
2690242 정보 "이재명과 친구가 되어주세요" 이재명 카카오 플러스 친구 15 12:02 414
2690241 기사/뉴스 尹부부 맡긴 투르크 국견, 서울대공원이 키운다 3 12:00 530
2690240 유머 가숨 두근거리게 하는 당근 알바 15 11:59 1,121
2690239 이슈 짝눈 달란트로 매번 느낌이 엄청 다르다는 배우.twt 1 11:59 695
2690238 이슈 한국인이 밥에 진심이 아닌 이유 6 11:59 841
2690237 이슈 추미애 유튜브 커뮤니티 업데이트 5 11:58 832
2690236 유머 러시아 사람들 너무 안 웃어서 무섭다고 하소연했더니 러시아에 2년 살았던분이 거기서는 유모차에 있는 애들도 무표정이라고해서 7 11:58 1,097
2690235 이슈 뭘 보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하나를 보고 어디까지 딥하게 파고들어가냐 가 오타쿠의 기준이라고 계속 .꾸준히.말합니다 8 11:57 3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