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팁/유용/추천 이동진의 시네마레터 <터널을 지날 때>
6,105 20
2025.01.04 20:52
6,105 20

lrBxhK

그리스 신화에서 저승까지 찾아가 아내 에우뤼디케를 구해내는데 성공한 오르페우스에겐 반드시 지켜야 할 금기가 주어집니다. 그건 저승을 다 빠져나갈 때까지 절대로 뒤를 돌아봐서는 안 된다는 조건이지요. 그러나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 속 설명에 따르면 “그녀를 보고 싶은 마음에, 그녀가 포기했을까 두려움에 사로잡혀” 그는 그만 뒤를 돌아보고 맙니다. 이로 인해 아내를 데려오는 일은 결국 마지막 순간에 수포로 돌아가고 말지요.


구약 성서에서 롯의 아내도 그랬습니다. 죄악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가 불로 심판 받을 때 이를 간신히 피해 떠나가다가 신의 명령을 어기고 뒤를 돌아보는 바람에 소금 기둥이 되었으니까요. 금기를 깨고 뒤돌아보았다가 돌이나 소금 기둥이 되는 이야기는 전세계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우리의 경우도 탐욕스런 어느 부자의 집이 물로 심판 받을 때 뒤돌아본 그의 며느리가 바위가 되고 마는 충남 연기의 장자못 전설을 비롯해 조금씩 변형된 형태로 여러 지방에 전해져 내려오니까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치히로 역시 비슷한 상황에 놓입니다. 기상천외한 일들이 벌어지는 신들의 나라에서 돼지가 된 부모를 구출해 돌아가던 소녀 치히로는 바깥 세상으로 나가는 통로에 놓인 터널을 지나는 동안 결코 돌아봐서는 안 된다는 말을 듣는 거지요.


그런데 왜 허다한 이야기들에 이런 ‘돌아보지 말 것’에 대한 금기가 원형(原型)처럼 반복되는 걸까요. 그건 혹시 삶에서 지난했던 한 단계의 마무리는 결국 그 단계를 되짚어 생각하지 않을 때 비로소 완결된다는 것을, 사람들이 경험을 통해 체득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오르페우스처럼, 그리움 때문이든 두려움 때문이든, 지나온 단계를 되돌아볼 때 그 단계의 찌꺼기는 도돌이표처럼 지루하게 반복될 수 밖에 없는 게 아니겠습니까. 소금 기둥과 며느리 바위는 그 찌꺼기들이 퇴적해 남긴 과거의 퇴층 같은 게 아닐까요.


류시화 시인은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라는 시에서 “시를 쓴다는 것이/더구나 나를 뒤돌아본다는 것이/싫었다, 언제나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나였다/다시는 세월에 대해 말하지 말자”고 했지요. 정해종 시인도 ‘엑스트라’에서 “그냥 지나가야 한다/말 걸지 말고/뒤돌아보지 말고/모든 필연을/우연으로 가장해야 한다”고 했구요.


그런데 의미심장한 것은 치히로가 그 힘든 모험을 마치고 빠져 나오는 통로가 다리가 아닌 터널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두 개의 공간을 연결하는 통로엔 다리와 터널이 있겠지요. 다리는 텅 빈 공간에 ‘놓는’ 것이라면, 터널은 (이미 흙이나 암반으로) 꽉 차 있는 공간을 ‘뚫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리가 ‘더하기의 통로’라면 터널은 ‘빼기의 통로’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결국 삶의 단계들을 지날 때 중요한 것은 얻어낸 것들을 어떻게 한껏 지고 나가느냐가 아니라, 삭제해야 할 것들을 어떻게 훌훌 털어내느냐,인지도 모릅니다. 이제 막 어른이 되기 시작하는 초입을 터널로 지나면서 치히로는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들을 몸으로 익히면서 욕망과 집착을 조금 덜어내는 법을 배웠겠지요.


박흥식 감독의 영화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에서 사랑이 잘 풀리지 않을 무렵, 윤주는 봉수를 등지고 계단을 오르면서 “뒤돌아보지 마라. 뒤돌아보면 돌이 된다”고 되뇌지만 결국 뒤를 돌아 보지요. 그러나 그렇게 해서 쓸쓸히 확인한 것은 봉수의 부재(不在) 뿐이었습니다.


아무리 마음이 아파도 뒤돌아보지 마세요. 정말로 뒤돌아보고 싶다면 터널을 완전히 벗어난 뒤에야 돌아서서 보세요. 치히로가 마침내 부모와 함께 새로운 삶의 단계로 발을 디딜 수 있었던 것은 터널을 통과한 뒤에야 표정 없는 얼굴로 그렇게 뒤돌아본 이후가 아니었던가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시네마 레터 (2007. 3. 12)

https://m.blog.naver.com/lifeisntcool/220277185788


목록 스크랩 (12)
댓글 20
댓글 더 보기
새 댓글 확인하기

번호 카테고리 제목 날짜 조회
이벤트 공지 [💘케이트💘] 🎂크리미몬스터 3종 & 립몬스터 히트헤이즈 체험단 모집 이벤트(50인) 427 04.21 36,540
공지 [완료] 오전 3시~5시 30분 이미지 서버 작업 진행 02:03 13,671
공지 [공지] 언금 공지 해제 24.12.06 1,784,828
공지 📢📢【매우중요】 비밀번호❗❗❗❗ 변경❗❗❗ 권장 (현재 팝업 알림중) 24.04.09 6,556,025
공지 공지가 길다면 한번씩 눌러서 읽어주시면 됩니다. 23.11.01 9,675,248
공지 ◤더쿠 이용 규칙◢ [스퀘어 정치글 금지관련 공지 상단 내용 확인] 20.04.29 28,946,378
공지 정보 더쿠 모바일에서 유튜브 링크 올릴때 주의할 점 766 21.08.23 6,746,436
공지 정보 나는 더쿠에서 움짤을 한 번이라도 올려본 적이 있다 🙋‍♀️ 244 20.09.29 5,667,865
공지 팁/유용/추천 더쿠에 쉽게 동영상을 올려보자 ! 3494 20.05.17 6,425,776
공지 팁/유용/추천 슬기로운 더쿠생활 : 더쿠 이용팁 3998 20.04.30 6,718,606
공지 팁/유용/추천 ◤스퀘어 공지◢ [9. 스퀘어 저격판 사용 금지(무통보 차단임)] 1236 18.08.31 11,779,909
모든 공지 확인하기()
32508 팁/유용/추천 충청도에만 있기엔 그릇이 큰 구운 치킨 맛집....jpg 38 12:32 6,240
32507 팁/유용/추천 당신이 아마도 본 적이 없는 유명작가들의 그림들 23 10:55 3,420
32506 팁/유용/추천 통신사 skt 쓰시는 분들 당장 티월드 들어가서 유심 보호 서비스 가입하셔야 됩니다... 325 10:14 39,208
32505 팁/유용/추천 후방주의 안 해도 되는 BL 만화들...jpg 22 09:11 3,390
32504 팁/유용/추천 🎧 고민은 많고 잠도 안 오고... ( ᵕ‧̯ᵕ̥̥ ) 인생 힘들다 🌃 ˗ˋˏ 새벽감성록 4곡 추천 ˎˊ˗ 2 00:45 1,108
32503 팁/유용/추천 갤럭시 S23 등 오늘 업뎃된 One ui 7.0 에서 소소하게 바뀐 부분 35 00:43 4,192
32502 팁/유용/추천 배우 고윤정의 인생케미는??.jpgif 170 04.22 8,134
32501 팁/유용/추천 창작하는 사람들이 꼭!!! 꼭!!! 꼭!!! 읽었으면 좋겠는 만화책들...jpg 374 04.22 31,959
32500 팁/유용/추천 좋아했던 사극 드라마 커플 하면???.jpgif 37 04.22 1,679
32499 팁/유용/추천 9천만 달러(1200억원 넘음) 이상 벌었다는 오피셜 떠서 게이머들 ㄴㅇㄱ된 인디 게임...jpg 18 04.22 3,881
32498 팁/유용/추천 ‘문재인입니다’를 보는 내내, 테러에 가까운 소음 공해 속에서 한껏 늙어버린 문재인 대통령의 모습을 마주하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549 04.22 53,332
32497 팁/유용/추천 후쿠오카 미쉐린 2스타 식당 다녀온 후 미쉐린에 관해 얘기하는 최강록 04.22 1,606
32496 팁/유용/추천 아직까지도 남자주인공의 찐사하면 갈린다는 드라마.. 덬들의 생각은??.jpg 17 04.22 2,305
32495 팁/유용/추천 대체 제목을 뭐라고 써야 사람들이 많이 봐줄 수 있을지 잘 모르겠음... 그러니까 그냥 있는 그대로 씁니다... 제가 좋아하는 걸그룹 노래 한 번만 듣고 가세요... 노래 진짜 좋습니다... 나 이 노래 계기만 있으면 한국에서도 인기 얻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계기가 안 생긴다 얘들아... 그냥 한 명이라도 더 알고 가... 노래 안 좋으면 더쿠 포인트 환불해드릴게(못 합니다) 7 04.22 1,245
32494 팁/유용/추천 원덬이가 써보고 추천하는 비오는날 스탠딩 꿀템 3 04.22 1,774
32493 팁/유용/추천 🎧 날씨가 구릴 땐 ʚ̴̶̷ ̯ʚ̴̶̷ 노래라도 상큼한 걸 들어줘야함 🍃 ˗ˋˏ 청량록 4곡 추천 ˎˊ˗ 3 04.22 656
32492 팁/유용/추천 외국에서 관상용으로 인기 있는 꽃이 우리나라에서 보기 힘든 이유 : 맛있어서 13 04.22 3,719
32491 팁/유용/추천 두바이 향수 자판기! 초고가 향수를 커피한잔 가격에 한번 뿌려줌! 9 04.22 2,351
32490 팁/유용/추천 바티칸 성상이 갓과 도포를 쓴 이유 15 04.22 3,575
32489 팁/유용/추천 [it`s magic] 마스터클래스(Master Class) With 손종원 04.22 5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