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팁/유용/추천 이동진의 시네마레터 <터널을 지날 때>
1,696 18
2025.01.04 20:52
1,696 18

lrBxhK

그리스 신화에서 저승까지 찾아가 아내 에우뤼디케를 구해내는데 성공한 오르페우스에겐 반드시 지켜야 할 금기가 주어집니다. 그건 저승을 다 빠져나갈 때까지 절대로 뒤를 돌아봐서는 안 된다는 조건이지요. 그러나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 속 설명에 따르면 “그녀를 보고 싶은 마음에, 그녀가 포기했을까 두려움에 사로잡혀” 그는 그만 뒤를 돌아보고 맙니다. 이로 인해 아내를 데려오는 일은 결국 마지막 순간에 수포로 돌아가고 말지요.


구약 성서에서 롯의 아내도 그랬습니다. 죄악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가 불로 심판 받을 때 이를 간신히 피해 떠나가다가 신의 명령을 어기고 뒤를 돌아보는 바람에 소금 기둥이 되었으니까요. 금기를 깨고 뒤돌아보았다가 돌이나 소금 기둥이 되는 이야기는 전세계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우리의 경우도 탐욕스런 어느 부자의 집이 물로 심판 받을 때 뒤돌아본 그의 며느리가 바위가 되고 마는 충남 연기의 장자못 전설을 비롯해 조금씩 변형된 형태로 여러 지방에 전해져 내려오니까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치히로 역시 비슷한 상황에 놓입니다. 기상천외한 일들이 벌어지는 신들의 나라에서 돼지가 된 부모를 구출해 돌아가던 소녀 치히로는 바깥 세상으로 나가는 통로에 놓인 터널을 지나는 동안 결코 돌아봐서는 안 된다는 말을 듣는 거지요.


그런데 왜 허다한 이야기들에 이런 ‘돌아보지 말 것’에 대한 금기가 원형(原型)처럼 반복되는 걸까요. 그건 혹시 삶에서 지난했던 한 단계의 마무리는 결국 그 단계를 되짚어 생각하지 않을 때 비로소 완결된다는 것을, 사람들이 경험을 통해 체득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오르페우스처럼, 그리움 때문이든 두려움 때문이든, 지나온 단계를 되돌아볼 때 그 단계의 찌꺼기는 도돌이표처럼 지루하게 반복될 수 밖에 없는 게 아니겠습니까. 소금 기둥과 며느리 바위는 그 찌꺼기들이 퇴적해 남긴 과거의 퇴층 같은 게 아닐까요.


류시화 시인은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라는 시에서 “시를 쓴다는 것이/더구나 나를 뒤돌아본다는 것이/싫었다, 언제나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나였다/다시는 세월에 대해 말하지 말자”고 했지요. 정해종 시인도 ‘엑스트라’에서 “그냥 지나가야 한다/말 걸지 말고/뒤돌아보지 말고/모든 필연을/우연으로 가장해야 한다”고 했구요.


그런데 의미심장한 것은 치히로가 그 힘든 모험을 마치고 빠져 나오는 통로가 다리가 아닌 터널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두 개의 공간을 연결하는 통로엔 다리와 터널이 있겠지요. 다리는 텅 빈 공간에 ‘놓는’ 것이라면, 터널은 (이미 흙이나 암반으로) 꽉 차 있는 공간을 ‘뚫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리가 ‘더하기의 통로’라면 터널은 ‘빼기의 통로’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결국 삶의 단계들을 지날 때 중요한 것은 얻어낸 것들을 어떻게 한껏 지고 나가느냐가 아니라, 삭제해야 할 것들을 어떻게 훌훌 털어내느냐,인지도 모릅니다. 이제 막 어른이 되기 시작하는 초입을 터널로 지나면서 치히로는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들을 몸으로 익히면서 욕망과 집착을 조금 덜어내는 법을 배웠겠지요.


박흥식 감독의 영화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에서 사랑이 잘 풀리지 않을 무렵, 윤주는 봉수를 등지고 계단을 오르면서 “뒤돌아보지 마라. 뒤돌아보면 돌이 된다”고 되뇌지만 결국 뒤를 돌아 보지요. 그러나 그렇게 해서 쓸쓸히 확인한 것은 봉수의 부재(不在) 뿐이었습니다.


아무리 마음이 아파도 뒤돌아보지 마세요. 정말로 뒤돌아보고 싶다면 터널을 완전히 벗어난 뒤에야 돌아서서 보세요. 치히로가 마침내 부모와 함께 새로운 삶의 단계로 발을 디딜 수 있었던 것은 터널을 통과한 뒤에야 표정 없는 얼굴로 그렇게 뒤돌아본 이후가 아니었던가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시네마 레터 (2007. 3. 12)

https://m.blog.naver.com/lifeisntcool/220277185788


목록 스크랩 (11)
댓글 18
댓글 더 보기
새 댓글 확인하기

번호 카테고리 제목 날짜 조회
이벤트 공지 [셀퓨전씨] 🌟순수 비타민C와 스피큘의 강력한 만남🌟 비타민 앰플에 스피큘 샷 추가 ‘토닝C 비타 샷 앰플’ 체험 이벤트 331 01.20 32,573
공지 [공지] 언금 공지 해제 24.12.06 594,864
공지 📢📢【매우중요】 비밀번호❗❗❗❗ 변경❗❗❗ 권장 (현재 팝업 알림중) 24.04.09 4,914,395
공지 공지가 길다면 한번씩 눌러서 읽어주시면 됩니다. 23.11.01 8,447,059
공지 ◤더쿠 이용 규칙◢ [스퀘어/핫게 중계 공지 주의] 20.04.29 27,054,246
공지 정보 더쿠 모바일에서 유튜브 링크 올릴때 주의할 점 761 21.08.23 5,885,720
공지 정보 나는 더쿠에서 움짤을 한 번이라도 올려본 적이 있다 🙋‍♀️ 240 20.09.29 4,841,156
공지 팁/유용/추천 더쿠에 쉽게 동영상을 올려보자 ! 3471 20.05.17 5,457,318
공지 팁/유용/추천 슬기로운 더쿠생활 : 더쿠 이용팁 3989 20.04.30 5,891,187
공지 팁/유용/추천 ◤스퀘어 공지◢ [9. 스퀘어 저격판 사용 금지(무통보 차단임)] 1236 18.08.31 10,739,717
모든 공지 확인하기()
31744 팁/유용/추천 30년 넘게 애니 오타쿠인 내가 예측해본 '2025년에 잘 될 것 같은 신작 애니들'.jpg 7 01:04 1,057
31743 팁/유용/추천 유명곡답게 K-POP 아이돌들이 많이 커버한 [퍼스트 러브❄️] 6 01:01 1,200
31742 팁/유용/추천 29년 전 오늘 발매한 서지원<내 눈물 모아> 8 00:55 783
31741 팁/유용/추천 WOW - IVE (아이브) 3 00:31 699
31740 팁/유용/추천 온앤오프 숨은 명곡 <Breath, Haze & Shadow> 8 00:14 438
31739 팁/유용/추천 취향따라 갈리는 배우 김수현의 인생케미..jpgif 71 01.21 2,027
31738 팁/유용/추천 [나의완벽한비서] 이준혁의 한지민 주접 12 01.21 2,470
31737 팁/유용/추천 2025년 새롭게 떠오를 트렌드 헤어 💈 22 01.21 3,982
31736 팁/유용/추천 2025 유행할 소박하고 따뜻한 꽃무늬 패턴 🌸 501 01.21 53,734
31735 팁/유용/추천 당신의 옷장에 들어갈 2025년 탑 패션 트렌드 👗 7 01.21 4,733
31734 팁/유용/추천 애니방 근황.............jpg 23 01.21 3,442
31733 팁/유용/추천 성우 이용신 - 바람이 불어오는 곳 cover 1 01.21 654
31732 팁/유용/추천 현재 발급가능한 카드 중 실사용으로 최고라고 평가받는 카드 675 01.21 60,560
31731 팁/유용/추천 카더가든 - 내일의 우리 (2023) 01.21 1,418
31730 팁/유용/추천 3화 만에 오타쿠들 반응 장난 아닌 신작 애니.jpg 14 01.21 3,919
31729 팁/유용/추천 🤖녹슨 심장이 움직이기 시작해.jpop 01.20 950
31728 팁/유용/추천 원덬이 좋다 못해 광기에 사로잡혀 수십수백번 돌려볼 만큼 사랑했던 2016~2018년도의 한국 뷰티 코스메틱 CF들 3 01.20 1,824
31727 팁/유용/추천 메타몽 1월 모바일 캘린더 선물 4 01.20 1,921
31726 팁/유용/추천 타이틀 곡마다 플레이리스트 만들어주는 라이즈 9 01.20 1,160
31725 팁/유용/추천 원덬아 빨래가 몇개고?? 세탁소집 막내딸의 요모조모 세탁 꿀팁 모음ZIP(철지난 드라마 패러디ㅈㅅ) 80 01.20 2,1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