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팁/유용/추천 이동진의 시네마레터 <터널을 지날 때>
1,586 18
2025.01.04 20:52
1,586 18

lrBxhK

그리스 신화에서 저승까지 찾아가 아내 에우뤼디케를 구해내는데 성공한 오르페우스에겐 반드시 지켜야 할 금기가 주어집니다. 그건 저승을 다 빠져나갈 때까지 절대로 뒤를 돌아봐서는 안 된다는 조건이지요. 그러나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 속 설명에 따르면 “그녀를 보고 싶은 마음에, 그녀가 포기했을까 두려움에 사로잡혀” 그는 그만 뒤를 돌아보고 맙니다. 이로 인해 아내를 데려오는 일은 결국 마지막 순간에 수포로 돌아가고 말지요.


구약 성서에서 롯의 아내도 그랬습니다. 죄악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가 불로 심판 받을 때 이를 간신히 피해 떠나가다가 신의 명령을 어기고 뒤를 돌아보는 바람에 소금 기둥이 되었으니까요. 금기를 깨고 뒤돌아보았다가 돌이나 소금 기둥이 되는 이야기는 전세계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우리의 경우도 탐욕스런 어느 부자의 집이 물로 심판 받을 때 뒤돌아본 그의 며느리가 바위가 되고 마는 충남 연기의 장자못 전설을 비롯해 조금씩 변형된 형태로 여러 지방에 전해져 내려오니까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치히로 역시 비슷한 상황에 놓입니다. 기상천외한 일들이 벌어지는 신들의 나라에서 돼지가 된 부모를 구출해 돌아가던 소녀 치히로는 바깥 세상으로 나가는 통로에 놓인 터널을 지나는 동안 결코 돌아봐서는 안 된다는 말을 듣는 거지요.


그런데 왜 허다한 이야기들에 이런 ‘돌아보지 말 것’에 대한 금기가 원형(原型)처럼 반복되는 걸까요. 그건 혹시 삶에서 지난했던 한 단계의 마무리는 결국 그 단계를 되짚어 생각하지 않을 때 비로소 완결된다는 것을, 사람들이 경험을 통해 체득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오르페우스처럼, 그리움 때문이든 두려움 때문이든, 지나온 단계를 되돌아볼 때 그 단계의 찌꺼기는 도돌이표처럼 지루하게 반복될 수 밖에 없는 게 아니겠습니까. 소금 기둥과 며느리 바위는 그 찌꺼기들이 퇴적해 남긴 과거의 퇴층 같은 게 아닐까요.


류시화 시인은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라는 시에서 “시를 쓴다는 것이/더구나 나를 뒤돌아본다는 것이/싫었다, 언제나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나였다/다시는 세월에 대해 말하지 말자”고 했지요. 정해종 시인도 ‘엑스트라’에서 “그냥 지나가야 한다/말 걸지 말고/뒤돌아보지 말고/모든 필연을/우연으로 가장해야 한다”고 했구요.


그런데 의미심장한 것은 치히로가 그 힘든 모험을 마치고 빠져 나오는 통로가 다리가 아닌 터널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두 개의 공간을 연결하는 통로엔 다리와 터널이 있겠지요. 다리는 텅 빈 공간에 ‘놓는’ 것이라면, 터널은 (이미 흙이나 암반으로) 꽉 차 있는 공간을 ‘뚫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리가 ‘더하기의 통로’라면 터널은 ‘빼기의 통로’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결국 삶의 단계들을 지날 때 중요한 것은 얻어낸 것들을 어떻게 한껏 지고 나가느냐가 아니라, 삭제해야 할 것들을 어떻게 훌훌 털어내느냐,인지도 모릅니다. 이제 막 어른이 되기 시작하는 초입을 터널로 지나면서 치히로는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들을 몸으로 익히면서 욕망과 집착을 조금 덜어내는 법을 배웠겠지요.


박흥식 감독의 영화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에서 사랑이 잘 풀리지 않을 무렵, 윤주는 봉수를 등지고 계단을 오르면서 “뒤돌아보지 마라. 뒤돌아보면 돌이 된다”고 되뇌지만 결국 뒤를 돌아 보지요. 그러나 그렇게 해서 쓸쓸히 확인한 것은 봉수의 부재(不在) 뿐이었습니다.


아무리 마음이 아파도 뒤돌아보지 마세요. 정말로 뒤돌아보고 싶다면 터널을 완전히 벗어난 뒤에야 돌아서서 보세요. 치히로가 마침내 부모와 함께 새로운 삶의 단계로 발을 디딜 수 있었던 것은 터널을 통과한 뒤에야 표정 없는 얼굴로 그렇게 뒤돌아본 이후가 아니었던가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시네마 레터 (2007. 3. 12)

https://m.blog.naver.com/lifeisntcool/220277185788


목록 스크랩 (11)
댓글 18
댓글 더 보기
새 댓글 확인하기

번호 카테고리 제목 날짜 조회
이벤트 공지 화제의 '환승연애' 시리즈가 스핀오프로 돌아왔다! 티빙 오리지널 <환승연애, 또 다른 시작> 출연진 예측 이벤트 66 00:05 7,617
공지 [공지] 언금 공지 해제 24.12.06 457,987
공지 📢📢【매우중요】 비밀번호❗❗❗❗ 변경❗❗❗ 권장 (현재 팝업 알림중) 24.04.09 4,651,328
공지 공지가 길다면 한번씩 눌러서 읽어주시면 됩니다. 23.11.01 8,254,708
공지 ◤더쿠 이용 규칙◢ [스퀘어/핫게 중계 공지 주의] 20.04.29 26,792,923
공지 정보 더쿠 모바일에서 유튜브 링크 올릴때 주의할 점 761 21.08.23 5,768,311
공지 정보 나는 더쿠에서 움짤을 한 번이라도 올려본 적이 있다 🙋‍♀️ 240 20.09.29 4,742,264
공지 팁/유용/추천 더쿠에 쉽게 동영상을 올려보자 ! 3466 20.05.17 5,326,161
공지 팁/유용/추천 슬기로운 더쿠생활 : 더쿠 이용팁 3989 20.04.30 5,781,198
공지 팁/유용/추천 ◤스퀘어 공지◢ [9. 스퀘어 저격판 사용 금지(무통보 차단임)] 1236 18.08.31 10,614,478
모든 공지 확인하기()
1452251 이슈 [단독] "민희진, 새빨간 거짓말…뉴진스 빼낼 방법도 의논했다" 박정규 회장의 작심폭로 6 06:16 729
1452250 이슈 메타(Meta) 성지향성/젠더/이민/성별 관련 이슈에서 정신병/비정상 표현 허용한다고 함 1 06:13 210
1452249 이슈 레드벨벳 슬기 인스타그램 3 06:03 584
1452248 이슈 이상한 목사들 많네 23 04:45 3,199
1452247 이슈 박정훈 대령 운명의 선고공판 D-1 | 엄마의 말뚝 본편 다시보기 04:45 655
1452246 이슈 '오겜2' 조유리, 제2의 아이유·김세정 되려나…연기도 노래도 다 됩니다 [TEN피플] 12 03:54 2,769
1452245 이슈 키스오브라이프의 봄, 여름, 가을, 겨울 2024년을 빛낸 노래들 1 03:44 1,101
1452244 이슈 11년차 엔비디아 1300만원 존버 일본인 근황 33 03:39 6,705
1452243 이슈 카톡 안 쳐보는 건 병임? 21 03:14 3,840
1452242 이슈 모옹.....아기고양이들 3 03:06 2,192
1452241 이슈 트럼프 “파나마·그린란드 편입에 군사력 동원 가능” 34 02:59 2,482
1452240 이슈 배우 현봉식 인스타 업뎃 (84년생 모임) 43 02:57 6,678
1452239 이슈 송혜교 영화 중 가장 인지도 높을 것 같은 작품.jpg 4 02:56 3,617
1452238 이슈 나홀로집에 맥컬리컬킨 구글 광고 14 02:32 3,429
1452237 이슈 많은 덬들이 공감할듯한 송혜교 비주얼 리즈시절.jpgif 45 02:19 6,120
1452236 이슈 한국 CF에 출연했던 맥컬리 컬킨 22 02:12 4,099
1452235 이슈 놀랍게도 작년에 나온 띵곡 7 02:07 3,659
1452234 이슈 기초수급자가 자기 돈 다 썼다고 난동부림 280 01:57 30,357
1452233 이슈 오늘 행진하는 해병대 예비역 연대 26 01:47 5,073
1452232 이슈 요즘 초등학고 식당 식판 80 01:43 19,4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