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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그남'은 없는데 왜 '그녀'라는 말이 필요하냐며 이 단어를 좋아하지 않았다는 이희호 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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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29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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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호 이사장은 일찌감치 페미니스트로 자신을 정체화하고, 평등한 세상을 바랐다.

그는 자신의 꿈이 “너무 일찍 꾼 꿈”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덕에 세상이 이만큼 바뀌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의 한복판에서 하릴없던 청년들의 오락은 연극이 유일무이했다. 이희호는 판이 벌어지면 남성 역할을 주로 맡곤 했다. 중·고교 시절부터 으레 그래왔다. 이를테면 〈이수일과 심순애〉의 이수일 역을 그보다 잘하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이희호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은 1922년 9월21일 ‘운 좋게’ 환영받으며 태어난 딸이었다. 위로 이미 오빠 셋이 있었던 덕분에 조부모도 여자아이를 반겼다. 남자아이만을 가족의 일원으로 인정하고 집안의 돌림자를 주던 시절이었다. 이희호는 드물게 돌림자를 받았다. 어머니는 자신이 ‘여자애’라 학교에 다니지 못했던 경험을 평생 한으로 여기는 사람이었다. 틈만 나면 어린 이희호에게 “여자도 공부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든든한 지원군이던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오빠와 아버지의 ‘조금 다른’ 생각을 알게 됐다. 이화고보 시절 여름방학을 맞아 돌아온 집에서 큰오빠가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를 우연히 읽게 됐다. “아버님, 계집애를 공부를 시켜서 뭐 하시려고…”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지독한 모멸감을 내색하지는 않았다. 대신 ‘계집애’라는 말을 곱씹으며 다짐했다. ‘오빠, 두고 보세요. 나는 유학도 갈 겁니다.’ 그 시절 드물게 깨인 남성이었던 아버지마저 오빠와 비슷한 생각임을 알게 된 후 이희호는 입주 가정교사 등을 하며 제 손으로 학비와 유학비를 벌었다.

 

 

 

하지만 개인의 재능이나 다짐으로는 시대를 이길 수 없는 시간이 더 길었다. 이희호의 젊은 시절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연이은 전쟁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학업은 중단되기 일쑤였다. 포기하지는 않았다. 인천에서 홀로 지내는 셋째 오빠의 아침밥을 해주며 살림을 도울 때도 틈만 나면 서울에 가 대학 문을 두드렸다. 그렇게 입학한 대학에서 남학생들에게 뿌리 깊이 박혀있는 남존여비 의식에 놀라는 날이 반복됐다. 이전까지 여학교만 다녔던 그에게 남녀공학 대학은 “여성들이 스스로 권리를 주장해야 한다는 중요한 사실을 깨우친” 장소였다. 그 과정에서 한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가 될 이태영 같은 평생 동지도 만났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남자는 도둑질 말고는 뭐든지 해도 된다’처럼 무심코 쓰이는 말에 스며 있는 여성 비하를 연구해 책을 내겠다고 다짐한 적도 있었다.

 

 

‘그녀’라는 단어도 싫었다. ‘그남’이 없는데 ‘그녀’가 왜 필요하냐고 생각했다. 그녀는 일본어 가노조(かのじょ)를 직역한 일제 문화의 잔재이기도 했다. 그런 그를 대학 동기들은 독일어 중성 관사 ‘다스(das)’로 부르곤 했다.

 

 

 

자연스럽게 여성운동으로 기울었다. 1952년 이희호와 동료들은 오늘날 가정법률상담소의 모태가 된 ‘여성문제연구소’를 발족시켰다. 헌법은 남녀평등을 보장하지만 가족법을 규정하는 민법은 여성의 권리를 제약하고 있는 데 주목했다. 오랜 세월 지속된 가부장제의 불평등을 자각조차 못하는 여성들을 위해 매달 법률 강좌를 열고 무료 상담을 진행했다. YWCA 총무로 일할 때는 여성단체와 연합해 ‘축첩자는 국회에 보내지 맙시다’라는 캠페인을 펼쳤다. 공개적으로 첩을 둔 남성이 많을 때였다. ‘아내 밟는 자 나라 밟는다’ ‘첩 둔 남편 나라 망친다’ 등을 붓글씨로 써서 현수막을 만들어 들고 행진을 주도한 이도 이희호였다.

 

 

 

1967년 '요정 정치 반대운동'을 벌이면서 김대중과 각을 세운 일화는 대표적이다. 이 운동은 외부가 아닌 내부를 향한 운동이기도 했다. “남자들은 요정 아니면 정치를 못하나요?”라고 따져 묻는 이희호에게 김대중은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라는 말로 피해갔다. 이희호가 “언젠가 남자들 큰코다칠 겁니다”라는 말로 받아쳤다.

 

 

1980년대 신군부의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남편이 보낸 편지에 답장을 쓰면서도 적당히는 없었다. ‘사위는 쳐다보고 며느리는 내려다보라’는 말이 조상의 깊은 지혜를 담은 말이라는 내용을 담은 김대중의 편지에 이희호는 이렇게 답장했다. “상류층과 하류층 간의 혼인으로 교류를 한다는 점은 좋은 일로 생각되나, 여자를 하류층에서 데려와야 남편 쪽에 더 쩔쩔매고 맹종한다는 조상들의 생각은 여자를 천하게 다루는 데서 연유한 것이 틀림없을 것입니다(1982년 12월2일 편지).”

 

 

이희호는 선거 때면 연단에 올라 마이크를 잡고 지원 유세를 하기도 했다. 후보 부인 중 최초였다. 이희호가 외치는 ‘독재 타도’ 역시 남달랐다. 현재의 독재정권을 규탄하는 데 머무르지 않았다. 유권자에게 구체적 미래를 그려줬다. “남편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어서 만약에 독재를 하면 제가 앞장서서 타도하겠습니다!” 김대중을 향한 청중의 열렬한 환호와 박수의 절반은 이희호의 것이기도 했다.

 

 

 

1997년 청와대에 입성해서도 부부는 남다른 행보를 이어갔다. 각하와 영부인이라는 호칭을 대통령과 여사로 바꿨다. 이희호는 “대통령 부인이기 이전에 ‘나 자신’”이라며 여사로 불러줄 것을 요청했다. 이전 정부를 통틀어 청와대 내 여성 비서관은 단 한 명이었지만, 국민의정부 5년 동안 10명으로 늘어났다. 여성 장관이 4명 배출되고, 육군 여성 장교가 처음 장군이 되었다. 첫 여성 총경 탄생도 국민의정부 시절 있었던 일이다. 공직자 임명장을 줄 때 배우자를 초청한 것도 처음이었다. 2001년에는 여성부가 신설됐다. 

 

 

생전 김대중은 이희호를 치하하는 데 인색함이 없었다. “내가 나름대로 페미니스트적인 관점과 행동을 실천할 수 있었던 건 아내의 조언 덕이었다. 아내와 결혼하기 전에도 여성을 비하하는 여러 행동이 옳지 않다는 인식을 하고 있었지만, 나 역시 가부장적인 전통 관념에 찌들어 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여성에 대한 전통적인 비하와 멸시의 관념으로부터 해방되고 남성과 동등한 인격체로서 여성을 대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아내의 도움이다. 아내 덕분에 나는 인류의 나머지 반쪽을 찾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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