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예지의 질투는 나의 힘―12회
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한강 작가가 12월 6일(현지시각) 스웨덴 스톡홀름 노벨상박물관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스톡홀름/연합뉴스
내가 살던 남태령은 조금 이상한 동네다. 경기도에서 서울로 넘어오는 사당을 앞둔 길목, 수방사가 있고 맞은편엔 전원마을이라 불리는 주택 위주의 마을, 텃밭, 비닐하우스 움막에 거주하는 이들, 가게라곤 작은 편의점 하나뿐인 곳. 그런데 행정구획상 지역명은 ‘서울시 서초구 방배동’인 곳. 4호선 선바위역에서 남태령역으로 넘어갈 때면 몇 초간 조명이 꺼진 채 어두운 터널 속을 통과하는데, 경기도에서 서울로 넘어오는 모든 승객-아마도 대다수 통근하는 노동자일-이들은 그에 익숙한 듯 고요하기만 한 이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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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월 21일, 서울시와 경기도의 경계인 남태령 고개에서 ‘남태령 대첩’이 있었다. 윤석열 퇴진 시위에 참여하기 위해 트랙터를 끌고 영남과 호남에서 상경 중이던 전봉준 투쟁단을 경찰들이 차벽을 세워 막아 세운 것이다. 전봉준 투쟁단은 SNS에 “갑오년 동학농민군이 끝내 넘지 못한 우금치가 바로 여기 남태령입니다. 농민들과 함께 해주십시오”라 호소했고, 들끓은 민심이 그곳으로 향했다.
색색깔의 응원봉을 든 2030 여성, 성소수자, 학생, ‘덕후’들, 386세대, 농민, 노동자, 이민자, 광화문에 집결했던 인원이 곧 남태령으로 집결했다. 시민들은 난방 버스와 핫팩, 먹을거리를 실어 날랐고 남태령 도로는 순식간에 광장이 됐다. 농민과 시민들이 한데 모여 경찰과 약 30시간 팽팽히 대치하는 동안 다양한 소수자들이 발언대에 올라 자신의 정체성을 밝혔고, 함께 사는 사회를 말했다. 대치 끝에 결국 경찰이 차벽을 열고 10여대의 트랙터가 한남동 관저 앞까지 가까스로 진입할 수 있었던, 춥고도 길었던 무박 2일 겨울밤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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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은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의 백커버(뒷면)에 썼다. 선바위역과 남태령역 사이, 경기도에서 서울특별시 사이, 전력 공급이 끊어지는 13초의 구간에 대해, 모두가 파리하고 위태로워 보이는 순간을 지나 일제히 조명이 들어오고, 나는 무엇을 지나온 것일까 읊조리던 기억에 대해. 경계를 넘어온 이들의 안색에 대해, 일상에 대해, 과거가 된 것에 대해, 그러한 통과의 과정에서 우리도 모르게 체화된 것들에 대해.
이 글을 다시금 읽으며 경찰이 쏜 물대포를 맞고 영면한 고 백남기 농민을 기억했다. 아울러 한강이 노벨상 수상 강연에서 던진 질문을 떠올렸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그 짧은 글은 광주민주화운동을 그려낸 ‘소년이 온다’가 노벨상을 받은 올해,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발령된 적 없던 비상계엄령이 다시 떨어졌듯, 마치 예언의 글처럼 우리를 찾아온 것이다. 남태령 대첩에선 저체온증과 부상자가 발생했지만 다행히 누구도 물대포에 맞아 죽지 않았다. 어떤 문학은 과거의 아카이브이자 미래의 예언서가 된다.
전철 4호선,
선바위역과 남태령역 사이에
전력 공급이 끊어지는 구간이 있다.
숫자를 세어 시간을 재보았다.
십이 초나 십삼 초.
그사이 객실 천장의 조명은 꺼지고
낮은 조도의 등들이 드문드문
비상전력으로 밝혀진다.
책을 계속 읽을 수 없을 만큼 어두워
나는 고개를 든다.
맞은편에 웅크려 앉은 사람들의 얼굴이 갑자기 파리해 보인다.
기대지 말라는 표지가 붙은 문에 기대선 청년은 위태로워 보인다.
어둡다.
우리가 이렇게 어두웠었나.
덜컹거리는 소리에 귀 기울이면
맹렬하던 전철의 속력이 서서히 줄어들고 있다.
가속도만으로 레일 위를 미끄러지고 있다.
확연히 느려졌다고 느낀 순간,
일제히 조명이 들어온다, 다시 맹렬하게 덜컹거린다. 갑자기 누구도 파리해 보이지 않는다.
무엇을
나는 건너온 것일까?
-한강의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 뒷면에 실린 글
한 커뮤니티 유저의 글 중 퍽 우습지만 마냥 우습지만은 않은 글을 봤다. “한강 작가도 장원영, 카리나 이런 애들 부러워할까?” 한강의 글, 시선, 영혼, 그가 전하는 창백하고 또 찬란한 빛을, 무엇보다 그의 진짜 ‘멋’을 모르다니. 그 아름다움을 정말 모르는 거야?
루키즘은 단지 이 시대, 이 세대만의 강박으로 치부하기엔 인간의 DNA에 각인되어 있다고 봐야 할 만큼 그 역사가 길고도 길지만, 그 맹렬한 선망이 곧 숫자로, 자본으로 치환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강이 책을 팔아 벌어들일 액수를 헤아려 기사 헤드라인으로 뽑는 시대에, 이 세대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최상급의 비교치가 젊고 아름다운 육체인 건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내가 이십 대 초반이었을 때, 누군가 이렇게 말한 적 있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에 나오는 여자들은 징그러울 만큼 아름답고 생생해. 그런 영화 속 인물이 되고 싶어.” 나는 답했다. “글쎄, 나는 박찬욱이 되고 싶어.” 밤마다 맨 발로 골목을 뛰는 태주의, “너나 잘하세요”라고 말하는 금자의, 자신을 사이보그라 믿는 영군의 표표한 아름다움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나는 그보단 그것을 만들어내는 박찬욱 감독을 질투했다. 그 자신의 이목구비라든가, 피부라든가, 키나 몸무게라든가, 목소리라든가, 그 어떤 물성적인 것이 아름답지 않고도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낼 수 있는 이들을 더 깊게 숭배했다.
나도 장원영과 카리나를 질투한다. 까놓고 어떤 인간이 그들을 질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어떤 지적 자산과 고차원적인 예술의 아름다움에도 빛을 잃지 않을, 신이 사랑하라고 만들어 놓은 듯한, 이런 소수의 개체들이 있기에 인간은 절멸하지 않음을 알려주는 듯한 그 육신들을?
나는 그들을 질투한다. 하지만 한강을 더더욱 깊이 질투한다. 한강의 바짝 마른 파리한 얼굴과 융단을 걷는 것 같은 사분사분한 목소리 뒤에, 그의 영혼이 품은 축축한 습기를, 눈꺼풀 안에 가득 찬 주홍색 빛을 전하는 힘을, 죽은 자와 산 자를 금실처럼 잇는 찬란한 능력을. 현시대의 증인이자 과거의 수호자이자 미래의 예언자가 된 작가의 존재를.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
한강이 던진 이 질문과 정면으로 맞부딪힌 지금 이 시대, 이 세계에서, 이 작가를 질투하고 또 사랑하지 않을 도리는, 내가 생각하기로는 없다.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8/00027234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