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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서라도 뵙고 싶었습니다."
지난 2014년, 배우 최민식이 이순신 장군(명량)을 연기한 소회다. 실존 인물, 그것도 한민족 최고의 명장을 연기한다는 것. 그 부담감과 중압감이 여실히 느껴졌다.
2024년, 배우 현빈이 그 진심에 공감했다. 그도 그럴 게, 현빈이 소화한 역할도 이순신 못지않다.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 그는 목숨을 바쳐 독립전쟁을 수행한 위인이다.
"저도 (안중근 장군이) 꿈에라도 한 번 나와주셔서, 힌트라도 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결국 안 나오셨어요. 지금이라도 나와주시면 좋을 것 같은데 말이에요."
현빈이 인생작을 만났다. 영화 '하얼빈'(감독 우민호)이 바로 그것. 안중근 장군 그 자체가 되어, 하얼빈 의거를 성공시켰다.
그는 지금도, 안중근이라는 무게를 느끼고 있었다.
"그 분의 생각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고 싶어 노력했지만, 아직도 해답을 못 찾겠더라고요. 그 분은 어떻게 30세 나이에 그런 생각과 행동을 하셨을까요. 어떻게, 본인의 목숨까지 희생할 수 있었을까요."
◆ "안중근 장군이라는, 중압감"
우민호 감독은, '하얼빈' 작업을 시작하며 가장 먼저 현빈을 떠올렸다. 우 감독은 현빈의 눈빛에서 쓸쓸함과 신념을 봤다고 말했다. 현빈 아닌 안중근은, 그에게 없었다.
그러나 현빈은 (정중히) 고사했다. 그것도 2번이나.
"처음 거절했던 이유는, 안중근 장군의 상징성과 존재감 때문이었습니다. 그 무게감이 너무 컸어요. 감히, 제가 표현할 수 없는 범주의 위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현빈은 우 감독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하지만 우 감독은 포기하지 않았다. 대사와 지문 일부가 변경된 시나리오로 2번째 제안을 했다. 역시, 현빈은 거절했다.
이윽고 3번째 제안에서, 현빈의 마음이 달라졌다. 현빈은 "분명 제게 어떤 믿음이 있으니, 감독님께서 끝까지 제안하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설명했다.
"이런 분을 연기하는 기회가 오는 배우가 얼마나 될까요. (지금이 아닌) 나중에 이 역할을 제안받을 기회가 또 올까요? 그렇게 반대로 생각하니, 다시 없을 영광이었죠."
현빈은 결심했다. 그리고, 우민호 감독에게 말했다. "하겠습니다. 계속 뜻을 굽히지 않고 제게 제안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그렇게, 하얼빈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하나의 목적을 위해 하얼빈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어렵게 모인 독립투사들의 이야기. 그 숭고한 의지를, 진심을 다해 담아냈다.
◆ "연구하고, 생각하고, 상상했다"
현빈은, 준비 과정에 대해 "제가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고 토로했다. 하얼빈 거사를 치르기 이전까지의 모습이 흑백사진과 글 뿐이었던 것.
"안중근 장군에 대한 자료들을 다 봤습니다. 안중근 기념관도 가서 그 분의 발자취도 찾아봤어요. 알아보고, 연구하고, 생각하고, 상상하고…. 이런 것들을 매일 했어요. 정말 하루도 빼놓지 않고요."
특히, 내면의 고뇌에 집중했다. "안중근 장군이 어떤 결정을 내리고 행동하셨을 때, '왜 그랬을까' 를 상상하고 행동했다"며 "감독님과 깊이 논의했고, 그 인간적 모습을 중점적으로 녹이려 했다"고 밝혔다.
"주로, 하얼빈 거사 이후의 모습들이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거기까지 이르는 과정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결과를 알 수 없고, 한치 앞도 모르는 상황이잖아요. 인간적으로 두렵거나 무섭진 않았을까요?"
현빈은 "안중근 장군의 경우, 본인의 결정에 있어 판단 오류로 동지들이 희생당한 적이 있다"며 "미안함과 죄책감은 없었을지도 궁금했다. 그걸 영화로서 표현하고, 잘 전달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파고들수록, 점점 더 부담감이 짙어졌다. 안중근 장군에 대한 인간적인 존경심과 경외감이 들었다. 조금의 누도 끼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커졌다. 그건, '하얼빈'에 참여한 모든 배우들의 마음이었다.
"외롭고 힘든 싸움이었습니다. 제 캐릭터에 스스로 압박을 받는 게 너무 컸어요. 그런데, 주변을 둘러보니 저만 그런 게 아니었어요. 다들 똑같더군요. 동지애가 저절로 생겼죠. 정말 빨리 친해졌어요."
그는 "우덕순(박정민 분)은 우덕순대로 스트레스를 받더라. 김상현(조우진 분)은 고립돼 있었다. 공부인(전여빈 분)도 상징적인 여성독립군을 표현해야 한단 압박이 있었다"고 전했다.
◆ "내가 장군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영화는 오프닝부터 강렬하다. 현빈이 차갑게 얼어붙은 수면을 한 걸음씩 걸어나간다. "거사 전까지 안 장군은, 실패하고 좌절했다. 그럼에도 한발 한발 가야했다. 그 외로움의 장면"이라 짚었다.
현빈은 "실제로 호수에서 촬영할 때 저도 외롭고 무서웠다. 한치 앞을 볼 수 없었다. 그 끝에 뭐가 있는지도 몰랐다"며 "안 장군이 어떤 마음이었을지 온전히 느껴졌다"고 회상했다.
하얼빈 의거 전, 다락방 신의 눈물도 인상적이다. 원래 현빈이 의자에 앉고, 최재형(유재명 분)이 다가오는 장면이었다. 현빈은 어둠 속에 잠겨 무릎을 꿇는 모습을 직접 제안했다.
그는 "제가 안중근 장군이라면, 그렇게 아무도 찾지 못하는 어딘가에 숨고 싶었을 것 같다"이라며 "우리 영화에서 가장 나약한 안 장군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신"이라 말했다.
교수대 처형 신도 빼놓을 수 없다. 안중근 장군의 마지막을 그린다. "머리가 정말 복잡했다. 제게 정말, 너무 중요한 신이었다"며 "여러 아이디어들이 있었던 게 기억난다"고 떠올렸다.
"(교수대를) 걷는데 실제로 발자국 소리만 턱턱 들렸던 게 생각납니다. 기분이 정말 이상했어요. 그 때도 전 똑같았습니다. 인간으로서, 정말 조금도 두렵지 않았을까 스스로 물었죠."
현빈은 "그 질문에, 전 아니라고 생각했다. 떨리는 숨소리와 순간의 두려움이 눈으로 표현됐으면 했다"며 "머릿속으론, 반대로 어떤 미안함도 존재했다"고 이어나갔다.
"어떻게 보면, (장군은) 죽음으로써 이 험난한 여정에서 빠지게 됩니다. 앞으로 이 길을 계속 가야 하는 동지들, (거사를) 함께 했던 이들은 더 힘들지 않을까요. 그 미안함을 혼자서 생각했습니다."
◆ "하얼빈은, 현빈의 인생연기"
'하얼빈'의 고사를 드린 다음날, 손예진은 건강한 아들을 출산했다. 현빈은 아버지로서의 기쁨도 잠시, 안중근 장군에 집중해야 했다. 그 마음은 어땠을까.
"나중에 아이가 커서 영상을 볼 나이가 되면, '하얼빈'을 보여주며 말하고 싶어요. '네가 태어났을 때, 아빠는 우리나라의 이런 (훌륭한) 분을 영화로 만들고 있었어'라고요."
그는 "(하얼빈은) 다른 작품들과 완전히 달랐다"고 강조했다. "분명 매 작품마다 진심을 다해왔다. 그런데 '하얼빈'을 마치고 스스로 '내가 이렇게 진심을 다해 뭘 해본 적이 있을까?' 묻게 되더라"고 했다.
흔한 메이킹 촬영에도 눈물이 날 정도였다. "크랭크업을 하면, 메이킹 팀이 마지막 소감을 영상에 담는다"며 "뭔가 누르고 있던 것들이 (눈물로) 왈칵 쏟아지더라"고 했다.
"메이킹 찍다가 그랬던 건 정말 처음이었습니다. 아직 안 끝난 기분도 있고, 뭔가 복잡했죠. 연기는 다 끝났는데, 이 압박감을 떨쳐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개봉을 앞둔 기분도, 여느 때 같지 않다. "긴장되고 두렵다. 지금도 부담감이 있다"며 "안중근 기념관 분들이 영화를 보러 와 주셨는데, '이 관이 제일 무섭다'고 말씀드렸었다"고 했다.
현빈의 진심은, 곧 인생 연기로 남을 전망이다. 그의 "까레아 우라!"(대한민국 만세)에는, 망국의 슬픔이 담겨 있었다. '하얼빈'을 본 관객이라면, 그 목소리를 두고 두고 기억하지 않을까.
"이 영화는 우리나라의 아픈 기억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잊어선 안 되는 하나의 기록이죠. 우리나라 배우로서, (한국을) 자리잡게 만들어주신 분을 연기하게 됐습니다. 감사하고, 영광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