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는 영원히 어리지 않는다. 강력한 여성이 돼 당신의 세계를 박살 내러 온다."
성폭력 피해자로서 증언대에 올랐던 카일 스티븐스의 말이 생각나는 요즘이다. 그는 어린 여자 선수들을 성적으로 학대한 전 미국 국가대표 체조팀 주치의 래리 나사르에게 움츠러들지 않고 재판장에서 이렇게 경고했다. 그의 증언은 이후 여러 나라에서 여성 운동이 벌어질 때마다 피켓 문구로 쓰였고,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최근에 벌어진 여대 시위 현장이나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 촉구 집회에서도 해당 발언을 변형한 문구들이 곳곳에서 발견됐다. 그만큼 어린 여성 혹은 소녀를 향한 세상의 무시를 물리치고, 사회에 맞서는 여성들의 투지를 담아낸 문장이라 볼 수 있다.
신중하게 행동하라?
이 문장에 걸맞은 또 다른 여성들이 있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탄핵 시위를 지지하고 나선 한국 여성 아티스트들이다.
국회에서 2차 윤 대통령 탄핵소추안 표결이 진행된 지난 14일, 여의도 집회를 앞두고 아이유, 소녀시대 유리, 뉴진스 등은 거리에 나설 팬들을 응원하고자 식당 선결제로 힘을 보탰다. 가수 이채연, 루셈블 혜주는 SNS에 시위 참석 인증 사진을 올렸다. 소녀시대 유리는 데뷔곡인 '다시 만난 세계'가 광장에 울려퍼지는 것을 두고 "너무 잘 봤다. 나도 매일 함께 듣고 있다"고 반응했다
이런 가운데 극우·보수 지지자들을 중심으로 탄핵 시위를 지지하거나 집회에 참석한 연예인들을 향한 공격이 이어졌다. 에둘러 목소리 낸 여성 아티스트들도 저격의 대상이 됐다. '반미주의자'라고 규정하며 미국 CIA에 신고하는 고발 릴레이가 벌어졌고, 온라인 기사 등에는 심각한 악플이 달렸으며, 광고모델로 나선 기업들을 상대로 불매운동을 펼치겠다는 경고까지 나왔다.
여성 아티스트들의 이같은 행동에 반감을 갖는 이들은 저마다의 이유를 들지만, 잘 살펴보면 비슷한 요지를 발견할 수 있다. 잘 모르면서 정치적인 사안에 목소리를 내지 말라는 것이다.
실제로 아이유 인스타그램에는 '이런 사안에는 신중하게 행동했어야 한다', '뭔지도 모르면서 섣불리 행동했다', '당신의 노래와 모습을 보고 팬이 됐는데 정치적 견해를 드러내면 실망할 수밖에 없다', '아이돌은 정치색 못 드러내게 해야 한다'는 식으로 마치 어린아이를 다그치듯 듯한 댓글이 달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에 역풍을 맞은 여성 아티스트들 중엔 언제나 사회 변두리를 둘러보며 직접 행동해온 이들도 있다. 누적 기부 금액이 60억 원에 달하는 아이유는 탄핵 정국이 벌어지는 동안 한국어린이난치병협회와 한국미혼모협회에 기부했다. 행동은 하되 탄핵 집회만큼은 '가만히 있으라'고 요구하는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가수 이채연은 팬 소통 플랫폼을 통해 "(내가) 정치 얘기할 위치가 아니라고? 국민으로서, 시민으로서 알아서 할게. 연예인이니까 목소리 내는 거지"라고 답했다. 그의 말처럼 자유라는 권리가 침해당하고 민주주의라는 사회 보호막이 흔들리는 이 시점에서 목소리를 내는 것은 모든 시민이 누릴 수 있는 권리이자 의무다. 연예인이라고, 여성 아티스트라고 해서 예외는 없다.
행동하는 소녀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미스 아메리카나>는 주인공 테일러 스위프트와 함께 세상에 목소리를 낸 여성 아티스트들의 역사를 톺아본다. 2003년, 사랑받던 여성 컨트리 음악 트리오 '딕시 칙스'는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며 공연장에서 "미국 대통령(조지 부시)이 텍사스 출신이라는 것이 부끄럽다"고 발언했다.
그들을 향해 당시 미국 몇몇 언론들은 "무식하다", "멋모르고 한 말", "멍청한 여자들"이라 비난했고, 대중은 그들의 앨범을 트랙터로 짓밟으며 폐기 운동을 벌였다. 이를 보고 자란 테일러 스위프트는 "나의 가치관으로 사람을 불편하게 하지 않는 착한 소녀가 되려 애썼다"며 "말이 나올 주제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했다"고 고백했다.
한국 여성 아티스트들도 비슷한 심정이 아니었을까. 굳이 선결제 연대에 나서고 SNS에 집회 인증 사진을 올릴 수밖에 없는 들끓음이 있었을 테다. 특히 이번 탄핵 집회에서 케이팝(K-POP) 팬덤이 중추적인 시위 참여자로서 떠올랐으니, 그들의 사랑을 받고 자라난 아티스트라면 더욱 침묵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2024년, 케이팝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행동하는 소녀'였다. 낭떠러지에 밀린 소녀들이 서로의 손을 붙잡는 노래인 트리플에스의 '걸스 네버 다이'가 큰 사랑을 받았고 아이브, 뉴진스, 에스파 등 여러 걸그룹들은 여성의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낸 콘셉트로 활동했다. 그리고 케이팝을 사랑하는 여성 팬들도 정치, 환경 의제에 얽힌 아이돌 산업의 이면을 직면하며 행동하는 주체로서 성장하고 있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케이팝은, 정확히는 케이팝을 사랑하고 그 안에 살아가는 '여성들'은 기어이 행동하기를 선택했다. 프랑스 언론 <르몽드>는 탄핵 국면을 두고 "한국의 젊은 여성들이 가장 적극적으로 저항에 앞섰다"고 분석했다.
반면 한국 사회의 한구석에선 젊은 여성 아티스트의 행동을 달가워하지 않는 분위기다. 설령 사회가 어린 여자라고 무시해도, 함부로 정치 사안에는 끼어들지 말라고 겁을 줘도 상관없다. 소녀는 영원히 어리지 않고, 한 번도 유약한 적 없다.
이제 그 소녀들은 강한 여성으로 자라나 이 세상을 기꺼이 지켜내고 있다.
https://m.entertain.naver.com/article/047/00024574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