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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강간 문화’를 간과하는 나의 법관 동료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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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24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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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온 걸까, 이 판타지. 내 안의 하이드를 인정하기 싫으니 ‘강간 문화’ 탓으로 돌려볼까. 강간 문화는 존재한다. 섹스란 것을 알게 된 초등학교 친구들은 벌써 손가락 사람으로 강간을 묘사하며 놀았고, 남자 화장실에는 ‘따먹었다, 덮치고 싶다’는 낙서가 흔했다. 강간을 모티브로 한 농담은 성년이 될 때까지 일일이 기억하기도 어려울 만큼 들었다. 여성을 사물화·대상화하고 성을 정복·획득·지배와 결부시키는 문화는 만연해 있다. 나는 그저 거기에 오염된 불쌍한 영혼이라고 자신을 변명하고 싶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부끄럽게도 본성 또한 크게 작용했음을 나는 느낀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집요하고 강렬할 수가 없다. 즐겨 여성을 소비하고 강압적 성관계의 실행이나 관찰을 원하는 이 본성, 악하다. 나만의 본성이 아니기에, 아마도 남자들 거의 전부가 약간씩은 공유하는 본성으로 믿어지기에, 이를 남성의 ‘built-in evil(내재된 악)’이라 혼자 일컫는다. 남성 자체가 악하다는 뜻이 아니다. 악하게 발현될 잠재력을 가진 본성이 정도 차이는 있을지언정 기본 사양으로 장착돼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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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성과 강간 문화는 서로 꼬리를 문 한 쌍의 뱀처럼 상호 강화하는 관계인 것 같다. 강압의 판타지는 이런 고리에서 생겨나고 다시 본성·문화와 결합하여 성범죄의 토양을 이룬다. 본성의 꿈틀거림과 강간 문화의 더러운 ‘콜라보’가 곧 성범죄라고 생각한다. 본성 그 자체를 문제로 지목해서는 답을 내기가 어렵다. 남자들의 본성에는 성범죄를 범할 잠재력과 성범죄를 억누를 잠재력이 모두 들어 있다. 그렇다면 문제는 ‘악한 본성’을 거침없이 발현해도 되는 문화를 바꾸는 것이다. 강간 문화는 내재된 악의 발현을 마치 정상인 것처럼 오도함으로써 실행 의욕을 북돋는다. 이걸 없애야 한다. 갑질 문제를 해결할 때 인간의 권력적·지배적 본성을 비난하기보다, 사회구조의 종속관계를 완화하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문제 해결에 더 유익한 것과 마찬가지다.


나는 내재된 악 자체에 대해서는 죄책감을 갖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내가 죄책감을 느껴야 마땅한 대목은 따로 있다. 강간 문화의 형성과 유지에 소극적으로 동조한 공범임을 나는 자백한다. 내밀한 판타지의 자인보다도 한층 부끄러운 고백이다. 나는 주변 남자들이 여성을 사물화·대상화하고 ‘따먹느니, 보내버리느니, 자빠뜨리느니’ 농을 지껄일 때 속으로 불편해할지언정 제지하거나 지적한 기억이 거의 없다. 반응 없이 넘기거나 어색하게 웃고 말 뿐이었다. 더러는 맞장구도 쳐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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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의 걸림돌을 디딤돌로 바꾸려면

동시에 그 핵심 운용자인 법관, 그중에서도 다수를 차지하는 남성 법관 일각의 인식이 걸림돌로 떠오른다. 남성 법관들의 경험이 모두 같지는 않겠으나 나의 경험이 그리 유별날 것 같지도 않다. 세 누이와 함께 자랐고 여자들과 격리된 경험도 별로 없으며 마초 성향하고는 거리가 먼 나도 강간 문화의 비정상성을 깨닫는 데 적잖은 시간과 성찰이 필요했다. 이런 직접경험을 고려할 때 남성 법관들의 판단 기준이 강간 문화에 의해 편향됐을 가능성을 부인하기 어렵다. 법관들이 공정성 유지와 정확한 판단을 위해 얼마나 애쓰는지는 가까이서 익히 보아 잘 안다. 하지만 법률가가 되는 훈련을 받았으니 강간 문화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너무 쉽게 믿어서는 안 된다. 강간 문화도 문화다. 문화는 우리가 인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우리 사고방식에 침투하는 힘이 있다.


법관은 범죄의 충격을 일단 피해자의 시각에서 느껴봐야 한다. 일반 범죄의 경우, 범죄와 담 쌓고 모범생으로 살아온 거의 모든 법관들은 대개 자연스럽게 그리 하고 있다. 그러나 유독 성범죄 사건에서는, 영상·문자·사담으로 익숙해진 공격·지배·착취의 만연 때문에 남성 법관들이 실제 범죄의 비정상성을 과소평가할 소지가 있다. 강간 문화의 무의식적 침투는 남성 법관에게, 강압적 성관계를 합의에 의한 성관계로 인식하거나 성범죄 피해자에게 책임을 적극적으로 돌리고(“남자가 그런 상황에서 하고 싶어 하는 걸 여자라고 모를 리가”), 가해 행위가 피해자에게 미친 실질적 해악을 쉽게 부인하며(“별로 공격적이지 않고 물리적 피해도 없는데 뭐가 문제야”), 가해자의 장래를 배려한 솜방망이 처벌을 정당화하는(“남자라면 원래 속으로 상상하고 원하는 일인데 어쩌다 선 넘은 것뿐이잖아”) 강력한 편향으로 작용할 수 있다. 이 편향을 그대로 둔 채 강간 문화를 타파하기란 요원한 일이다.


존경하는 나의 동료들에게 바란다. 우리는 걸림돌을 디딤돌로 바꾸어야 한다. 인간을 물건으로 취급하는 비정상 심리를 조장하는 왜곡된 남성성 및 강간 문화와의 싸움에 앞장선 장수의 심정으로, 내면화된 정상성의 기준을 치열한 자기성찰을 통해 검증하고 재설정해야 한다. n번방 사건을 키운 사법부에 대한 대중의 분노와 비판을 비이성적·감정적 반응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비슷한 고민을 안고 매일을 살아가는 동료로서, 과거를 부끄러워하는 남자로서, 모든 사람이 사람으로 존중받는 세상의 도래를 바라는 시민으로서 우리 남성 법관들에게 감히 바란다. 범행 공모 관계에서의 이탈에 준하는 결단과 실행을.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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