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53/0000047311?sid=100
지난 12월 10일 서울 장충동 한 카페에서 주간조선과 마주한 YS(김영삼)의 차남 김현철 김영삼대통령기념재단 이사장은 12월 3일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당시를 회상하며 "아버님께서 87년 민주주의 체제를 만드시기까지의 일련의 과정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고 했다. 그에게 YS의 하나회 해체 뒷이야기와 12·3 계엄 사태를 지켜본 심경, 향후 여권의 대응 방안을 물었다. 다음은 김 이사장과의 일문일답.
- YS는 군부독재하에서 자유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어려운 길을 걸었다. 가족 입장에서 가장 마음이 아팠던 때는 언제인가. "1969년 아버님께서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개헌을 반대해 초산테러를 당하셨다.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인데, 아침에 일어났더니 상도동이 발칵 뒤집혔다. 국회의원, 비서관, 기자들이 '현철이 너 전날 밤에 아버지 이제 영영 못 볼 뻔했다. 나가서 차 좀 봐라' 하더라. 차가 녹아서 달 분화구처럼 엉망진창이 돼 있었다. 더군다나 아버님이 타셨던 뒷자리는 초산을 제대로 맞았으면 치명상을 입을 뻔했다. 그런데 아버님은 평소 차 문을 잠그시는 게 습관이 돼 있으셨다. 문이 열리지 않으니 그들이 당황했고, 달리는 차에 던져 다행히 빗맞았다. 아버님이 돌아가실 뻔했으니 그때가 가장 충격적인 일이었다."
- 그런 상황에서도 대통령 취임 11일 만에 하나회를 척결했다. "천성적으로 불의를 참지 못하는 성품이셨고, 늘 대의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셨기에 정의감이 몸에 베었던 것 같다. 아버님께서는 25살에 정치를 시작하자마자 자유당으로 출마해 당선됐는데, 당선된 지 6개월 만에 이승만 대통령의 3선 개헌에 반대해 탈당했다. 대의를 위한 일에는 좌고우면 할 것 없이 바로 결단을 내리셨다. 타고난 기개와 실행력, 아버님만이 갖고 있는 용기와 결단이라고 생각한다. 호가 '거산'인 것처럼 소위 말하는 '큰 정치' '정도를 걷는 정치'를 지향했던 분으로서 그릇이 컸다."
- 당시 결속이 단단한 하나회를 척결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은데. "아버님께서 취임하신 당시 미국 언론들조차 '당선됐지만 군부와 타협해야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민주화 대통령이지만 군부와 손잡지 않고서는 안 된다는 분위기가 형성돼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사실 3당 합당 이후 대선까지 약 3년의 시간이 있었다. 그 기간 동안 상당히 많은 정보를 입수하셨다. 예비역 장성들 여러 사람에게 많은 정보를 들으셨다. 하나회의 실체라든가 핵심이 누군지, 누구를 정리해야 청산을 제대로 할 수 있을 것인지 하는 것들을 치밀하게 준비하셨다. 하나회가 저항할 수 없도록 한 달 반 만에 장성급 30여명을 날렸는데, 새로 임명되는 후임들에게 별(계급장)을 달아줘야 하지 않나. 원래는 정기 인사 때 미리 별을 만드는데, 갑작스럽게 단행하다 보니 별이 없어서 기존에 있는 사람들에게 빌려다가 별을 만들어 달아주셨다."
- 윤 대통령의 계엄선언은 어떻게 지켜봤나. "처음에는 문자를 받고 가짜뉴스인 줄 알았다. TV를 틀어보니 윤 대통령이 심각한 얼굴로 말하고 있더라. 가당키나 한 일인가. 87년 체제의 헌법이라는 것이 비상계엄을 선포해도 국회에서 반대하면 해제되는 것인데. 들으면서도 현실감이 없었다. 아주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과거로 회귀하겠다는 이야기로 들렸다. 받아들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당장 몇 군데에 전화를 했다. 당에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고, 정진석 대통령실 비서실장과 윤 대통령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뭔가 크게 문제가 생겼구나' 생각했다."
- 이번 사태에 대해 평가한다면. "아버님이 결정적으로 유신정권을 무너뜨리신 장본인이시잖나. 국회 제명이 부마항쟁을 촉발했고, 신군부의 5·17 비상계엄 확대 조치 이후 5·18이라는 비극적인 사태가 발생했다. 1983년에는 아버님이 23일간 목숨을 건 단식투쟁을 했다. 87년 체제가 만들어지기까지 일련의 과정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87년 민주화 체제 이후 지금까지 40년간 민주주의가 공고해지는 기간이었다. 평화적인 정권 교체가 교차로 일어나고 헌정질서에 따라 안정적으로 잘 흘러왔다. 그런데 그걸 무너뜨렸다. 느닷없이 40년 전으로 소환돼 버린 거다. 아버님이 하나회 숙청으로 다시는 이 나라 이 땅에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지 않도록 만드셨는데, 이번 사태는 그에 완전히 역행한 일이다. 그에 대한 대가는 반드시 치러야 한다. 한편으로는 군 전체가 대통령에 모두 동조하지 않았고, 계엄군이나 경찰도 소극적으로 임했던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민주화된 상황에서 현실을 역행해 과거로 되돌리려는 시도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 계엄 사태로 국민적 여론이 악화한 가운데, 여권 내부에서도 '질서 있는 조기 퇴진'을 두고 의견이 갈리고 있다. 여권이 현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방법은 뭐라고 보나. "'2월 퇴진·4월 대선, 3월 퇴진·5월 대선'은 내가 봤을 때 선택지가 아니다. 결국 대통령이 탄핵이나 퇴진 결단을 내려야 한다. 우선 대통령이 결단해 명확하게 6개월 이후 퇴진 날짜를 박고, 그 안에서 여야 간 합의로 조기 대선을 준비하면 된다. 원칙적으로 탄핵 스케줄은 6개월이니, 하야 예정 기한을 6개월로 잡는 거다. 그 안에 여야 공동 합의로 국가비상대책위원회를 만들어 야당이 총리를 추천하고 비상내각, 선거내각을 만들면 된다. 다만 윤 대통령이 '계엄이 정당했다'고 하는 것을 보면 하야를 택하지 않을 것 같다. 당에도 이 구상을 전달해 놨지만, 대통령의 결단이 우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