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혀 현실감 없는 짧은 문장이 구름처럼 허공에 떠 있는 듯했다. 곧 신호가 바뀌고 차를 움직였다. 분명 현실감은 없었지만 뉴스가 거짓일 리는 없었다. 가슴이 차가워졌다. 우선 손님을 내려줘야 했다. 남은 거리는 짧았지만 도착시간은 하염없이 길게 느껴졌다.
아파트 입구에 손님을 내려주고 차를 길가에 세웠다. 거치대에서 스마트폰을 떼어 뉴스를 다시 확인했다. 믿기지 않았지만 사실이었다. 계엄이 선포되었다. 차가웠던 가슴에 두려움이 스며들었다.
옛날 계엄과는 다르리라는 희망
1980년 전두환 신군부가 계엄을 하고 민간인을 학살했던 당시 중학교 2학년이었다. 포고령으로 통제된 방송은 전라도 광주에서 무장한 폭도들이 시가지를 휩쓸고 이를 계엄군이 진압하는 중이라고 거짓 보도했다. 학교에서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본 바깥 세계는 군인과 경찰들로 살풍경했다.
저녁 늦게 집으로 온 대학생 형의 옷에서 나는 최루탄 냄새는 매캐했다. 어른들은 말을 아꼈고 우리들은 영문을 몰랐다. 계엄 하의 세상은 무서웠고 두려웠으며 어디를 가나 공포심이 팽배했다. 그 중심에 선 전두환이란 이름을 그때 처음 알았다.
44년 전 계엄은 내게 그런 의미였다. 그런데 다시 계엄이라니. 그것도 2024년 서울에서. 비상계엄은 엄연한 사실이었지만 여전히 현실감이 없었다. 일을 팽개치고 양재동 집으로 차를 돌렸다. 중간쯤 가는데 전화가 왔다. 같은 동네 사는 처남이었다.
"매형. 어디예요? 어서 오세요.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당장 국회 가려고 누나들이랑 준비하고 있어요."
내가 갈 때까지 기다리라 했다. 이웃해 살면서 단짝처럼 지내는 처형과 아내도 분기탱천해 있을 걸 예상은 했지만 계엄이 선포되자마자 곧장 국회로 갈 채비를 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신중할 필요가 있었다. 계엄은 곧 총칼을 든 군인인데 당장 국회 앞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알지 못한 채 가족들을 사지로 내몰 수는 없었다. 내가 아는 상식으로 계엄 하의 위험은 곧 생명과도 직결되는 죽고 사는 문제였다.
집 앞에 도착하니 벌써 채비를 다 마치고 처남과 처남댁 아내와 처형까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유튜브에서는 국회 앞 상황이 생중계되고 있었다. 국회의원들이 담을 넘고 야당 지도자는 빨리 국회로 와달라고 호소했다. 시민들이 여의도 국회의사당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매형. 군에 있는 아들한테 전화했어요. 절대 시민들을 향해 총을 들지 말라고. 그런 명령이 내려오면 거부하라고 했어요. 부대 행정관한테도 전화했어요. 불법적인 계엄에 내 아들이 개입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그런 일이 없도록 해달라고 말했어요."
공중파가 아니어도 폰에서 폰으로 실시간으로 생중계되는 국회 앞 숨 가쁜 현장과 군에 간 아들에게 곧장 전화를 걸어 세상과 소통시키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당장 한 치 앞도 오리무중이긴 했지만 왠지 모르게 그 옛날 계엄 때와는 다를 수 있겠다는 희망이 어렴풋하게 비쳤다.
빈차등을 끄고 가족들로 가득 찬 택시를 운전해서 여의도 국회의사당으로 출발했다. 오후 11시가 넘었다. 정체가 완전히 사라진 올림픽도로를 달려 여의도로 들어가 국회 방향으로 접어들었을 때 우리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탱크도 장갑차도 아닌 시민들의 자동차가 도로 위에 가득했다. 처음 계엄 소식을 접했을 때의 차가워진 가슴에 온기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혼자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과 공포를 이겨낼 수 있는 연대의 힘이 불러온 광경이었다.
계엄은 마치 안개처럼 뿌려져 우리의 소소한 일상조차 감시하고 짓누르는 불의한 실체라는 걸 시민들은 직감하고 있는 듯했다. 시민들의 차량 행렬이 국회의사당을 향하고 있었다.
정체된 행렬에서 빠져나와 길가에 차를 주차하고 걸어서 국회 앞으로 갔다. 한 손에는 폰을 든 채 유튜브로 생중계되는 국회의사당 현장을 지켜보고 있었다. 도착한 국회 앞에는 이미 많은 시민들이 모여들어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대단한 열기였다.
계엄이 부른 공포를 사람들은 연대의 외침으로 물리치고 있었다. 불의에 저항하는 시민들의 결기가 뜨거웠다. 국회의원들이 담을 넘어 의사당으로 들어가는 장면이 화면으로 보였다. 본청 앞에서는 시민들과 계염군이 몸싸움을 하고 본청 안에서는 보좌관들이 바리케이드를 쌓고 계엄군과 대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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