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국제·벽산·해태그룹 무너지며 생긴 서향괴담
"용산입주는 곧 사세확장…정점 찍은 것"[편집자주]용산과 성수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지리적으로는 한강을 끼고 있고 대형 공원을 품은 강북의 중심이다. 15년간 지지부진하던 재개발 시계가 본격적으로 움직였고 서울에서 가장 뜨거운 상권이라는 점도 닮았다. 마지막 키워드는 ‘사옥’이다. 성수는 패션, 콘텐츠, 테크 기업이 들어서고 있고 용산은 한강로를 중심으로 기업들의 흥망성쇠가 펼쳐지고 있다. 광화문·시청 등 중심업무지구(CBD), 여의도 업무지구(YBD), 강남 업무지구(GBD)와 다른 역할을 하는 두 업무지구는 어떤 의미를 지닐까.
지난 12월 14일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 입구./한국경제
“용와대(용산 대통령실)가 서향 괴담에 쐐기를 박았죠.”
한강대로에 자리 잡은 한 기업 관계자의 말이다. ‘서향 괴담’은 한때 잘나가던 기업들이 잇따라 쓰러지며 붙은 악명이다.
서울역 맞은편에 건물을 지으면 ‘지는 해’의 방향이라 사업 성장에 불리하다는 풍수지리설에서 비롯된 이야기다. 21세기에 풍수지리가 무슨 소리냐 싶지만 막대한 자금을 운용하는 기업 오너에게 ‘터’는 여전히 중요한 요소다. 지리가 좋아야 기업의 백년대계를 이어 나갈 수 있다는 굳건한 믿음 때문이다.
윤석열 대통령의 1호 공약이 민생이나 산업 정책이 아닌 ‘집무실 이전’이었던 것도 이와 관련해 대선 당시부터 무속과 풍수지리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용산 잔혹사’는 대통령실 바로 옆인 한강로를 따라 이어졌다. 용산 땅의 유구한 역사만큼 그 길 위에 기업들의 흥망성쇠가 켜켜이 쌓였다.
한때 명성을 떨치던 국제그룹과 대우그룹, 해태그룹, 벽산그룹은 사라졌고 KDB생명보험(전신은 금호생명)은 10년째 M&A 매물로 나와 있다. 2017년 한강대로 신사옥에 들어선 아모레퍼시픽은 중국 사업에 타격을 받으며 지난 몇 년간 실적이 줄었고 2021년 한강대로로 터를 옮긴 하이브는 경영권 싸움과 오너 리스크로 주가가 추락했다.
주인만 5번 바뀐 서울스퀘어
서울역 인근 한강대로에 자리잡은 서울스퀘어의 전신은 대우빌딩이다./한국경제
한강대로의 시작점에 있는 대우빌딩(현 서울스퀘어)은 서향 괴담의 대명사다. 서울역에 내리면 가장 먼저 보이는 서울스퀘어에는 한때 세계 18위 기업까지 올랐다가 공중분해 된 대우그룹의 흥망성쇠가 담겨 있다.
대우그룹은 외환위기 이전까지 상사부터 전자, 자동차, 조선, 중공업, 건설 등의 사업을 하며 삼성, 현대와 경쟁했던 기업이다.
‘세계경영’을 내세운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회사를 자산총액 78조원(1998년 말)을 보유한 세계 18위 기업으로 키웠다. 한국 경제에 한 획을 그은 대우의 몰락은 외환위기와 함께 시작됐다.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에 편입된 한국의 국가신용등급이 6계단 떨어지자 대우가 직격탄을 맞았다. 해외 사업장이 가장 많아 극심한 자금 상환 압박을 받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환율까지 폭등해 외화표시부채가 많은 대우는 사면초가에 빠졌다. 1997년 대우의 환차손 규모만 8조5000억원에 달했다.
대우그룹은 1999년 말까지 41개 계열사를 10개 회사로 줄인다는 내용의 자체 구조조정 방안을 내놨다. 하지만 정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1999년 8월 모든 계열사가 워크아웃 대상이 되면서 대우그룹은 해체됐다.
서울스퀘어는 대우그룹 부도 이후에도 주인이 다섯 차례나 바뀌었는데 대부분 끝이 좋지 않았다. 소유주 중 대우그룹, 금호그룹은 몰락했고 2007년 건물을 1조원 가까이 주고 산 모건스탠리는 수천억원의 손해를 보며 떠났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국제그룹은 한때 재계 7위권에 이름을 올렸던 기업이다. ‘프로스펙스’ 브랜드로 명성을 떨친 K패션 1세대다. 당시 이 그룹의 위용을 보여준 게 바로 1984년 용산구 한강로2가에 새로 지어진 사옥 국제센터빌딩이다. 용산역 앞 지하 4층, 지상 28층 규모로 지어진 신사옥은 한때 용산의 랜드마크였다. 독특한 기하학적인 구조로 ‘서울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에 선정되기도 했다.
위상은 오래가지 못했다. 건물이 지어진 지 불과 1년 만인 1985년 공중 분해됐다. 당시 주거래 은행 측은 용산 사옥 신축으로 인한 자금난 등을 이유로 들었지만 전두환 정부가 정치적 이유로 도산시켰다는 게 정설이다.
국제빌딩의 두 번째 주인 역시 흑역사를 겪었다. 국제그룹 도산 이후 사옥은 한일그룹에 흡수됐다. 한일그룹은 모회사인 한일합섬이 1973년 처음으로 1억 달러 수출의 탑을 받는 등 섬유산업을 기반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국제통화기금(IMF) 파고를 넘지 못하고 1998년 부도로 해체됐다. 사옥 역시 세 번째 주인을 맞아야만 했다. LS네트웍스(구 E1)가 2006년 빌딩을 인수해 리모델링한 후 2010년 LS용산타워로 다시 태어났다.
한때 매출 2조7000억원을 기록했던 해태그룹의 역사는 남영동 한강대로 초입에서 시작됐다. 나가오카제과(영강제과)의 경리직원이었던 박병규 초대 회장이 1945년 다른 직원들과 함께 회사를 인수해 해태제과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출발했다.
이후 홈런볼, 맛동산, 부라보콘을 출시하며 승승장구했고 롯데제과와 양강구도를 이뤘다. 전자, 중공업, 금융업 등 다양한 분야로 사업을 확장해 1996년에는 매출 2조7000억원을 기록하며 재계순위 24위까지 올랐다.
하지만 무리한 사업 확장이 발목을 잡았다. 1994년 해태그룹은 국내 최대 오디오 전문업체 ‘인켈’을 인수하고 1995년에는 전화기 전문 제조업체 나우정밀을 인수해 인켈과 합병하며 전자그룹으로의 도약을 꿈꿨다. 해태그룹은 기존에 인수했던 미진공업사를 1997년 해태중공업으로 사명을 바꾸며 중공업에도 진출하려 했다.
하지만 전자와 중공업에 지속적인 적자가 발생하며 부채가 크게 증가했고 결국 1997년 외환위기가 발생하면서 해태그룹은 위기를 맞았다.
조흥은행 등이 자금을 지원해 부도 위기를 모면했지만 결국 만기된 어음 196억원을 처리하지 못해 해태제과 등 3개 계열사가 부도 처리됐다. 해태제과는 2005년 크라운제과에 인수됐고 해태산업, 해태유통, 해태타이거즈, 해태유업 등도 모두 새로운 주인을 맞았다.
용산구 동자동에 자리한 서울게이트웨이타워의 원래 이름은 ‘벽산 125빌딩’이다. 벽산그룹이 1991년 창립 40주년을 맞아 유명 건축가인 김수근 씨에게 설계를 맡겼다. 하지만 그룹이 1998년 워크아웃을 겪으면서 빌딩 주인이 바뀌는 운명을 맞았다. 인근에 자리한 용산구 갈월동의 갑을빌딩의 주인 또한 한때 섬유 종합 그룹인 갑을그룹으로 명성을 떨쳤지만 외환 위기의 파고를 넘지 못하고 무너졌다.
K뷰티와 K팝 대표주자 역시 한강대로에서 휘청이고 있다. 아모레퍼시픽은 2017년 용산 신사옥에 입주하며 글로벌 시장에 승부를 걸었다. 1958년과 1976년에 이어 같은 장소에 지은 아모레퍼시픽 용산 사옥은 서경배 회장이 설계부터 완공까지 10년 동안 공을 들인 것으로 유명하다. 설계안을 만드는 데만 4년이 걸렸다.
아모레퍼시픽 사옥은 정사각형 구조에 작은 정사각형 구멍이 나 있다. 건물 한가운데 네모난 구멍이 나 있는 것을 두고 한때 ‘드래건 게이트’(용이 드나들 수 있는 문)를 만든 것이 아니냐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드래건 게이트는 홍콩에서 유래한 풍수다.
홍콩에서 바다 앞에 들어선 높은 빌딩은 대부분 중간에 네모난 구멍이 나 있는 구조다. 홍콩 매체 사우스모닝포스트에 따르면 이는 드래건 게이트로 건물에 행운과 힘을 가져온다는 믿음에서 출발한 독특한 양식이다.
아모레퍼시픽이 이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적은 없다. 아모레퍼시픽 사옥은 한국의 ‘달항아리’에서 영감을 받아 세계적인 건축가 데이비드 치퍼필드가 설계한 건물로 네모난 구멍에는 현재 옥상정원이 들어서 있다. 신사옥 입주 후 아모레퍼시픽은 중국 사업이 부진하며 영업이익이 급감했다.
2017년 7315억원이었던 영업이익은 2018년 5495억원, 2019년 4982억원, 2020년 1506억원으로 꾸준히 줄었다. 온라인과 신규 브랜드로 화장품 시장이 재편됐고 화장품 최대 수출국이었던 중국 시장에서의 입지가 줄면서 타격을 받았다. 2021년 영업이익은 3562억원으로 올라섰지만 지난해 영업이익은 다시 1520억원으로 내려앉았다. 2017년 대비 53% 줄어든 수치다.
서향괴담 잔혹사는 용산 임차인에게도 예외가 없었다. 2021년 용산시대를 연 하이브는 신사옥 건물 전체를 임차해 사용 중이다. 용산 시대를 열며 글로벌 확장에 속도를 내겠다던 하이브는 올해 경영권 싸움과 방시혁 의장의 오너리스크로 주가가 급락했다.
하이브 계열사 2021년 1902억원이었던 영업이익은 지난해 2958억원까지 증가했지만 2021년 한때 40만원을 찍었던 주가는 현재 19만원대까지 주저앉았다. 특히 민희진 전 어도어 대표와의 경영권 싸움 과정에서 사적인 카톡과 ‘하이브 문건’이라 불리는 내용까지 유출되면서 K팝 이미지에도 치명타를 안겼다.
상업용 부동산 업계 관계자는 “서향 괴담이 오랫동안 내려왔지만 그럼에도 용산은 수요 대비 공급이 적어서 가격이 높게 형성돼 있다”며 “용산 사옥 입주는 곧 ‘사세 확장’을 의미하기에 용산에 터를 잡은 기업들이 정점을 찍은 뒤 위기를 겪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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