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기사/뉴스 5·18 성폭력 피해자, 국가상대 첫 집단소송-“24살 학생에게 ‘내란죄’ 겁주고 성폭력… 국가책임 묻는다”
4,060 45
2024.12.12 07:09
4,060 45

“누나,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이런 목소리가 들리는 거야.”




‘12·3 내란’의 밤, 광주광역시에 사는 강희숙(가명·75)씨는 모처럼 일찍 잠들었는데 심상치 않은 꿈을 꿨다. 꿈 속의 목소리는 44년 전인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때 계엄군들에게 희생당한 시민들의 것이었다. 강씨는 당시 희생자의 몸에 낭자한 피를 닦고 총알을 빼내는 등 사망자를 돌봤다. 죽어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의 목소리였다.

4일 새벽녘 꿈에서 깬 강씨는 텔레비전을 켰는데 뉴스에서 계엄군의 모습이 보였다. 소스라치게 놀란 그는 곧장 집에 있는 수건들을 가방에 넣고 택시를 불러 “도청”(현 국립아시아문화전당)으로 향했다. “혹시 다친 사람이 있으면 응급처치를 하려고 (수건을) 챙겼어.” 44년 전 계엄군에게 맞아 여러 장기가 파열되는 등 폭력의 후유증으로 몸 구석구석이 성치 않다. 그런데도 지팡이를 짚고 광장으로 향했다. “사람이 최대한 많이 모여야 해. 그래야 덜 다치고 죽어. 그래서 나도 갔어.” 이미 거리로 나온 사람이 많았다. 1979년 10월26일 선포된 비상계엄은 1년 넘도록 이어지다가 1981년 1월24일 해제됐다. 45년 만에 맞이한 비상계엄은 6시간 만에 해제가 선포됐다. “다행이다, 다행이다, 사람이 많구나 했어. 옆에 사람들이 있으면 든든해.”

다음날인 5일 강씨는 또 다른 “든든한 사람들”을 만나고자 광주광역시 화정동에 있는 국립트라우마치유센터로 향했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 등이 저지른 성폭력 피해자 모임 ‘열매’ 회원들이 이날 센터 2층 다목적실에서 만나기로 했다. 열매 회원인 강씨는 44년 전 목격한 사망자와 실종자에 대한 죄책감으로 수십 년 동안 자신의 성폭력 피해를 함구해왔다. 수치심도 컸다. 2018년 김선옥(66)씨가 한겨레 인터뷰로 성폭력 피해 사실을 38년 만에 밝힌 뒤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조사위)에서 다른 피해자를 수소문하며 강씨에게도 연락을 취했는데 수차례 조사를 거부했다.


강씨가 어렵게 조사에 응한 건 한 5·18 유관단체 관계자의 설득이 있어서다. 조사를 마친 강씨는 다른 피해자 15명과 함께 지난해 12월 조사위로부터 ‘진상규명 결정’을 받았다. 공권력의 임무 수행 과정에서 성폭력이라는 중대한 인권침해를 당한 사실을 인정받았다는 뜻이다.



나는 너다, 우리는 서로의 용기다

개인별로 조사를 마친 피해자 가운데 10명이 올해 4월 처음 만난 뒤 넉달이 지난 8월, 참가자가 15명으로 늘어난 상태에서 모임 ‘열매’가 발족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성폭력 피해를 증언할 ‘용기’를 내면서 서로가 서로의 ‘증언자’가 된 피해자들은, 함께 모인 자리에서 대중을 마주할 힘을 얻었다. 5·18 성폭력 피해자들이 300여명 앞에 얼굴과 이름을 공개한 채 나선 건 이때가 처음이었다. 다른 열매 회원들이 같은 자리에서 공개 증언자들의 곁을 지켰다.


피해자 가운데는 1980년 전두환 등 헌정 질서를 파괴한 내란 행위자들에 맞서 민주주의를 지키고자 애쓴 과정에서 성폭력 피해를 당한 이들도 있다. 당시 정치적 관심이 큰 편이 아니었음에도 ‘지금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비겁하다, 이건 대학생들이 수습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학생수습대책위원’ 활동을 한 김선옥씨도 그랬다.

김씨는 ‘내란’이란 단어로 뒤덮인 최근 뉴스들을 보며 과거를 다시 떠올렸다. “내란이 엄청 큰 죄인데, (1980년 당시) 24살 학생인 나에게 수사관이 내란죄를 뒤집어씌운다고 했을 때 느낀 공포가 얼마나 컸으면 그게 트라우마로 내 삶을 지금까지 지배해왔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

그래도 ‘12·3 내란 사태’는 우리사회 시민들에게 축적된 ‘민주적 역량’을 보여줬다. 열매 회원들도 많은 시민의 응답에 힘입어 다음 용기를 낸다. 5일 모임에서는 국가를 상대로 정신적 피해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에 대한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나눴다. “12월12일, 45년 전 군사반란이 일어났던 내란의 시작일에 맞춰서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하려고 합니다.” 열매 회원들의 법률대리를 맡은 법무법인 율립 하주희 변호사가 이날 모임에 참여해 1시간 가까이 소송에 대한 설명과 질의·응답을 했다.

하 변호사는 “5·18 성폭력 피해는 전두환 등 내란 행위자들이 헌정 질서를 파괴한 광주 도심 시위 진압 작전 전개, 외곽 봉쇄 작전, 연행·구금·조사 과정에서 발생한 계엄군 등에 의한 불법행위이므로 국가 책임이 있다”고 했다. 국가배상법상 5·18 성폭력 피해의 국가 책임이 성립한다는 주장이다.


하 변호사는 또한 “국가폭력 피해자들과 유족들이 생존해 있을 때 기본적 정의로서 실질적인 배상이 이뤄지는 것은 필수”라고 강조했다. 열매 회원들은 지난해 ‘5·18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광주광역시에 보상 신청을 했지만, 적정한 피해 회복이 이뤄질지 장담할 수 없다. 기존 보상 기준이 성폭력 피해 특수성을 반영하지 못한 신체 장해 중심이어서다. 지난 9월 말에 연 증언대회 이후 추미애·전진숙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이 기존 법을 바꾸는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12·3 내란 사태’로 빠른 입법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다.




열매가 열매를 맺을 때까지

조사위 보고서를 보면 계엄군 등은 총과 대검 등으로 피해자를 폭행·협박하거나, 상해를 입히며 성폭력을 했고, 군인 2명 이상이 가해자인 경우도 많았다. 강간, 강제추행, 성고문, 성적 모욕·학대, 재생산폭력(강간으로 인한 임신이나 유산, 구타·자상으로 인한 유산, 하혈, 자궁적출 등) 등 평시와 비교할 수 없는 폭력이 일어났다. 국가에 의한 폭력이기에 개별 가해자를 특정하기도 쉽지 않다. 

이 때문에 피해자들이 겪는 사건 뒤 고통도 신체·정신적 후유증에 국한되지 않는 복합성을 지닌다. 조사위 보고서를 보면 모든 피해자가 사건 뒤 자살 충동을 느꼈고 대다수가 1회 이상 자살 시도를 했다. 직장과 학교를 그만두거나 가족의 강압에 못 이겨 서둘러 혼인해 고향을 떠나기도 했다. 가족·사회관계에서 2차 피해가 발생한 것이다.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에서 ‘그날’의 기억이 생존자들의 일상에 도돌이표처럼 되돌아오듯, 5·18 성폭력 피해도 아물지 않은 채 피해자들의 삶에 축적됐다.

40여년 만에야 성폭력 피해를 증언할 수 있었던 피해자들에게 이번 소 제기가 또 다른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인 이유다. 5일 모임에서 피해자 일부는 “승소가 확실치도 않은데 다시 피해 경험을 떠올리며 고통받아야 하는 소송을 포기하고 싶다”는 심정도 토로했다. 하지만 열매 회원 다수는 “배상이나 치유도 중요하지만, 아직도 성폭력 피해를 말하지 못한 피해자들이 우리보다 덜 어려운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앞장서자”는 데 뜻을 모았다. 이들은 여전히 5·18 성폭력 피해를 겪고도 이를 말하지 못하는 피해자들이 많다고 믿는다.


‘5·18 성폭력 미투’의 문을 연 김선옥씨는 “이 모임(열매)이 갈수록 단단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며 “마지막엔 우리가, 진실이 이겼다는 걸 모든 사람 앞에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여성들이 정조 관념이랄지 ‘몸을 짓밟혔다’는 데 대해서 정말 수치스럽게 생각해서 나부터도 (성폭력 피해를) 감추며 살아오면서 그 분노 때문에 몸이 암으로 힘든 것도 참고 살아온 그런 고통을 겪었잖아. 내 뒤를 따라오는 사람들은 나처럼 아프고 병들지 않을 수 있게, 언제든 손을 잡아주고 싶어. 누구의 눈치도 보지 말고 누구의 부끄러움도 없이 당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얘기하고 국가로부터 사과받고 치유 받을 기회가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어.”



김효실 기자 



https://n.news.naver.com/article/028/0002721240?sid=102

목록 스크랩 (0)
댓글 45
댓글 더 보기
새 댓글 확인하기

번호 카테고리 제목 날짜 조회
이벤트 공지 [위즈덤하우스] 불멸의 화가 《반 고흐, 영혼의 편지》&《반 고흐, 영원한 예술의 시작》 개정판 증정 이벤트✨ 283 00:20 8,681
공지 [공지] 언금 공지 해제 12.06 153,353
공지 📢📢【매우중요】 비밀번호❗❗❗❗ 변경❗❗❗ 권장 및 무뜬금 욕설글 보시면 바로 신고해주세요❗❗ 04.09 4,190,363
공지 공지가 길다면 한번씩 눌러서 읽어주시면 됩니다. 23.11.01 7,948,345
공지 ◤더쿠 이용 규칙◢ [스퀘어/핫게 중계 공지 주의] 20.04.29 26,352,181
공지 정보 더쿠 모바일에서 유튜브 링크 올릴때 주의할 점 760 21.08.23 5,535,994
공지 정보 나는 더쿠에서 움짤을 한 번이라도 올려본 적이 있다 🙋‍♀️ 233 20.09.29 4,483,526
공지 팁/유용/추천 더쿠에 쉽게 동영상을 올려보자 ! 3460 20.05.17 5,101,663
공지 팁/유용/추천 슬기로운 더쿠생활 : 더쿠 이용팁 3984 20.04.30 5,521,884
공지 팁/유용/추천 ◤스퀘어 공지◢ [9. 스퀘어 저격판 사용 금지(무통보 차단임)] 1236 18.08.31 10,340,277
모든 공지 확인하기()
2575906 이슈 김어준 실시간 멘트...... 53 12:11 1,946
2575905 기사/뉴스 박해영·김은숙·강은경 등 방송작가들, “윤석열 탄핵하고 구속 수사 처벌하라” 성명 발표 4 12:10 409
2575904 유머 재섭하다.X 10 12:10 686
2575903 기사/뉴스 [단독] 이수근도 상암동 건물주였네…13년 만 24억 ‘껑충’ 6 12:09 479
2575902 기사/뉴스 ‘서울의 봄’ 김성수→장항준 등 영화인 “내란동조 중단하고 尹 탄핵하라” [전문] 2 12:09 368
2575901 이슈 25년부터 우리 공공장소, 지하철, 버스 와이파이 이제 못써요 17 12:09 1,412
2575900 기사/뉴스 피부에 좋다던 콜라겐의 ‘배신’…조용히 ‘암 전이’ 돕고 있었다 10 12:08 1,206
2575899 이슈 <한국방송작가협회 윤석열 탄핵 촉구 성명서> 4 12:08 445
2575898 이슈 국회 과방위, 참고인 김어준 질의 중 8 12:07 1,316
2575897 이슈 김어준 : 계엄 제보는 체포조가 아닌 암살조가 가동된다 들었다 119 12:06 5,066
2575896 기사/뉴스 의료계, '尹 탄핵 집회' 현장에 의료지원단 파견 (민주당 요청) 25 12:06 1,036
2575895 이슈 임오경 국회의원 페이스북 9 12:05 1,103
2575894 이슈 [속보]경찰 특수단 "경찰청장 비화폰, 경찰 관리 아니고 개인소유도 아냐" 4 12:05 579
2575893 이슈 [속보]특수단 "조지호, 여인형 정치인 위치추적 요청받았지만 지시 안했다 진술" 2 12:05 192
2575892 이슈 [속보] 경찰 특별수사단 "윤 대통령 체포영장 검토 중" 61 12:04 1,783
2575891 이슈 안귀령에게 총기탈취범 아니야? 총기탈취 미수범?이냐는 시인 8 12:03 1,483
2575890 이슈 @@@정정글@@@ 내일 MBC 쇼음악중심 결방가능성 매우 높음 9 12:03 711
2575889 기사/뉴스 [속보] 경찰청장, 윤석열과 ‘비화폰’으로 통화···‘안가 회동’ 지령문은 “파기” 1 12:03 316
2575888 유머 제도를 이용하는 레즈비언 모성.jpg 16 12:02 1,813
2575887 이슈 [속보]경찰 특수단 "계엄계획 적힌 종이. 두 청장 각각 받아…훼손 행위는 증거인멸" 2 12:02 6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