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노선과 '동일한 것' 이지만
분말 스프서 쇠고기 성분 걷어내
미 검역 당국 통과 육류만 허용
모든 항공사 '비건 라면' 실어
제품 남으면 도착 즉시 폐기 처리
한국 국적 항공기 중장거리 노선 승객만의 '특권'이라 할 수 있는 기내 국산 라면 제공이 점차 줄어들면서 이용자의 관심은 더 커지고 있다. 항공사 별로 기내식 라면의 종류는 각기 다른데 특히 미주 노선엔 특별한 제품이 공급돼 이채롭다.
국내 저비용항공사(LCC)의 맏형 격인 제주항공은 일본, 중국의 일부 단거리 노선을 제외한 전 노선에서 컵라면을 판매하고 있다. 선택지는 다양한데 신라면, 진라면, 오징어짬뽕, 튀김우동 등 네 종이다. 하지만 제주항공은 유독 괌, 사이판 등 미주 노선에서는 오징어짬뽕, 튀김우동만 판매하고 있다. 신라면, 진라면은 취급하지 않는 것.
국내 최대 국적 항공사인 대한항공은 8월 세 시간 이상 비행하는 중장거리 노선에서 일반석에 타는 승객에게 제공하던 컵라면 제공을 중단했다. 기후 변화로 인한 난기류가 자주 일어나면서 승객의 화상 사고를 방지하려는 조치다. 하지만 중장거리 노선의 일등석, 비즈니스석에서는 여전히 라면을 기내식으로 제공하고 있다. 대한항공 일등석은 신라면과 진라면을, 비즈니스석은 신라면만 제공한다. 기존에도 일반석에 컵라면을 제공하지 않았던 국내 대형항공사(FSC) 아시아나항공은 비행 시간 네 시간 이상 중장거리 노선의 비즈니스석에만 신라면 한 종을 기내식으로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 항공사가 미주노선에서 판매·제공하는 라면은 대부분 다른 노선에서 제공하는 제품과 겉은 같지만 속은 아예 다른 것이다. 분말 스프에서 쇠고기 성분을 걷어냈기 때문이다. 이른바 '비건'(Vegan·동물성 식품을 전혀 먹지 않는 채식주의) 제품이 다수다. 대한항공은 한국에서 미국으로 향하는 기내에는 한국에서 만든 수출용 비건 신라면·진라면만 싣는다고 밝혔다. 미국에서 출발해 한국으로 향하는 대한항공 기내도 마찬가지다. 아시아나항공은 국내에서 출발해 미국에 도착하는 항공기에서는 일반 신라면을 제공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미국에서 출발해 국내로 향하는 기내에는 수출돼 현지에서 팔고 있는 비건 신라면을 싣는다고 한다.
미국 농림부 동식물검역소 규정에…
이들 항공사에 문의한 결과 이유는 의외로 간단했다. 미국 농무부(USDA) 동식물검역소(APHIS·Animal and Plant Health Inspection Service) 규정이 현지 체류 중인 항공기내에 자국 검역을 통과하지 않은 육류 반입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 미 검역 당국의 허가를 받은 육류만 기내에 실을 수 있다는 얘기다.
야채, 과일도 마찬가지여서 국내에서 미국으로 싣고 간 기내식에 해당 재료가 남아있을 경우 도착 즉시 바깥으로 옮겨 APHIS의 승인 아래 폐기 처리한다고 한다. 때문에 아시아나항공 여객기도 미국 현지에 도착하면 남아 있는 일반 신라면을 모두 버린다. 다만 APHIS는 미국 공항에 도착해 세 시간 이내에 다시 국외로 출발하는 항공기에 한해서는 기내에 현지 검역을 통과하지 않은 육류, 야채, 과일을 두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 다만 음식물 포장이 개봉되지 않은 상태여야 한다.
국제법상 국적기라도 군 항공기가 아닌 민간 항공기는 다른 나라 영토, 영공에서는 현지 법의 적용을 받는다. 때문에 미국 영공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현지 검역 관련 법령과 규정을 따라야 한다. 김현수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민간 항공의 안전과 발전을 위해 1944년 채택된 시카고 협약에 의해 민항기는 타국 영공과 영토에서 그 나라 법률의 적용을 받는다"며 "이 때문에 바이러스나 세균 등 인체에 해로운 물질이 기내에서 밖으로 번질 것을 우려하는 현지 검역 법규가 있다면 따라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일등석은 봉지라면 끓여서 반찬과 함께
라면을 승객에게 제공하는 비용과 방식은 항공사 별로 제 각각이다. 제주항공 기내에서 컵라면을 먹으려면 개당 5,000원을 따로 내야 한다. 가격 책정 이유를 두고 제주항공 측은 "유통 경로의 차이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제주항공은 판매하는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부은 뒤 꽉 닫을 수 있는 비닐봉지에 싸서 제공한다. 혹시라도 승객 본인이나 옆 승객에게 국물이 튀어 화상을 입는 것을 방지하려는 조치다.
좌석이 널찍한 일등석이나 비즈니스석 승객에게만 라면을 제공하는 국내 FSC는 별도 요금을 받지 않는다. 대한항공은 일등석에는 봉지 라면을 전기냄비에 끓인 뒤 사기 그릇에 담아 오이지, 양파절이, 연근 등과 함께 내놓는다. 비즈니스석에는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담아 익힌 뒤 반찬과 함께 제공한다. 2019년부터 일등석을 없앤 아시아나항공은 비즈니스석에서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부어 익힌 뒤 김치, 단무지와 함께 준다. 고객 취향에 따라 라면 위에 다진 파와 버섯채 등 고명을 놓기도 한다는 설명이다.
이들이 기내식으로 제공하는 라면 종류는 승객 입맛을 따라 바뀌었다. 한 예로 아시아나항공 승객은 2008년 말까지는 신라면만 먹을 수 있다가 2008년 12월부터는 삼양라면도 즐길 수 있었다. 2012년 3월~2024년 3월엔 신라면, 꼬꼬면, 신라면 블랙, 삼양라면, 진라면 등을 시기 별로 세 가지 중 하나를 골라 먹을 수 있었다. 항공사 측은 2024년 4~9월엔 다시 두 종(신라면, 진라면)으로 줄였고 10월부터는 신라면만 제공하고 있다. 아시아나항공 측은 "시기 별로 승객이 좋아하는 라면을 제공해왔다"며 "현재는 선호도가 가장 큰 라면으로 단일화한 것"이라고 말했다.
김청환 기자 (ch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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