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도 일본인 거주구역이 있던 대표지역임 1905년부터 본격적으로 세워짐
기존 거주하던 조선인들을 쫓아내고 땅 빼앗아 일본인 집단 거주구역 형성 일본인 :한국인 비율 9:1 이상
용산소학교(현 용산초등학교는 일본인들이 다니던 학교) 보통 대학은 일본으로 유학보냄
용산철도국 용산육군관사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이 그중에 좀 신분이 높았다고함
같은 일본애들끼리도 아버지 직업에 따른 차별이 있었대
그당시 철도공무원들은 지금의 철도원과는 위상이 많이 다름 일종의 고위공무원
https://history.seoul.go.kr/archive/bbsctt/view.do?key=2210200030&bbscttSn=2212200577
대부분 일본에서 가난한 자들이 건너와 부자가 된 것이기 때문에 일본 패망 후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고 남고 싶어 하였다. 당시 일본은 조선총독부에 공문을 보내 ‘너희들은 돌아오지 말고 조선에 남아라.’고 하였다. 지금도 그 공문이 있다.
그에 따르면 이들은 원래 일본에서 하층민으로서 조선에 돈을 벌러 온 사람들이고 일제가 이들에게 조선인 토지를 몰수해서 나눠줬다. 패망할 때까지 부를 축적하였고 재산이 엄청났다.
패망 후 거의 빈손으로 일본에 돌아가느니 한국에 남아 한국인으로 살고자 하였다. 미군정이 일본으로 돌아가라고 하였지만 어떻게 해서든지 조선에 남으려고 하였다. 몽양 여운형이 일본인들을 안전하게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보호해줬는데 일본에서 이를 이용하였다.
일본인 돌봄회가 그래서 생겨났고 전국에 20군데가 있었고 1년 반 동안 활동하였다. 일본인 돌봄회가 처음 시작한 사업이 한국어 강습소 만들기였다. 잔류하고자 하는 부자 일본인들을 한국인으로 만들기 위해 한국말을 가르치려고 한 것이다.
또 이들이 토지를 가지고 있었는데 대신 팔아 돈을 많이 만들어 이동하기 쉽게 해 주었다. 지방에 있는 일본인 부자들은 도시로 갔을 것이다.
이는 지방에 있으면 자신들이 일본이라는 사실을 다 알기 때문으로 신분을 숨기고 한국인으로 호적을 바꾸는 신분 세탁이 쉽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 공무원들도 다 일본인이었기 때문에 호적을 한국인으로 바뀌는 일은 쉬웠다. 요즘도 할아버지, 아버지 호적을 바꾸면 쉽게 되는데 그 당시는 더 쉬웠다. 특히 돈을 주면 더 쉽게 신분을 바꿀 수 있었을 것이다.
호사카 교수는 이 같은 사실을 확증하면서 “천 엔만으로 나가라고 했는데 지금 돈으로 2백만 원인데 이걸 갖고 어떻게 나가, 굉장한 부자들 많았다. 2백만 원 갖고 어떻게 나가요.”라고 힘주어 말했다.
“제가 만난 사람 중 이름만 대면 다 아는 굉장히 유명한 사람, 여러분이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사람이 있다. 내가 일본인 출신이니까 저한테 이야기했다. ‘제 아버지도 일본사람이다.’ 지금 76세 정도다. ‘아버지가 창씨개명해서 아버지가 일본인 이름으로 갖고 있었던 그 얘기하는 것 아니냐?’, ‘아니다’. 김이라는 자기 이름은 그냥 한국에서 사용한 것이다. 원래 일본 이름이었었다. 정확하게 저에게 만날 때마다 이야기한다. 굉장히 유명한 사람이다. 그러니까, (당시) 그러한 사람들이 많았다는 이야기다. 제가 물어봤어요. 당시 선생님 같은 분이 많았나요? ‘패전 당시 여섯 살 일곱 살이었기 때문에 잘 모른다.’ 알고 있어도 말을 못 하죠.”
호사카 유지 교수가 말한 이 사람은 김씨이고 현재 76세 정도로 보인다. 호적을 바꿔 성을 김씨로 하고 이름도 한국 이름으로 바꾼 것으로 보인다.
호사카 교수가 혹시 몰라 일제 치하 창씨개명한 조선인이니 아니냐고 물으니까, 절대 아니고 원래 일본 이름이었다는 것이다. 일본에서 부자의 꿈을 꾸고 식민지 조선에 건너온 원래 일본인이라는 소리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다 안다는 것으로 보아 식민지 때 모은 재산으로 더욱 재산을 불리고 권력도 움켜쥔 인물로 보인다.
박정희, 전두환 때는 오히려 숨죽이고 숨어있다가 소위 민주화되면서 정권이 5년마다 바뀌는 것을 알고 친일파 정권을 세우기 위해 일본인 극우세력과 연대하여 공작에 나섰다. “일본국가기본문제연구소”가 뉴라이트와 관련된 대표적인 일본 극우단체다.
그 결과 이명박, 박근혜에 이어 윤석열을 대통령 만들어 결국 대한민국 정부를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한국 재벌 창업주들 이력 보면 일제시대 부농의 자식or 아버지가 공장경영 +일본 대학 유학 이력 가진사람 많음...
정치계 학계는 훨씬 더 많겠지 일제시대 일본대학 유학 다녀와서 해방후 한국에서 교수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이코스가 많다고 생각함
당시 조선인은 초등학교도 진학률이 20%
조선인은 공부를 계속 하는 경우에도 대개 소학교-고등보통학교-전문학교의 단계를 밟아 올라가는데,
일본인은 소학교-중학교-고등학교 (혹은 대학예과)-대학의 길을 밟아 올라갔다. 일본인은 경성예대에서 경성제국대에 시험없이 엘리베이터식 진학함 조선인이 경성제국대 진학하려면 전교 1등을 해도 힘듬
일본인중에 나름 더 똑똑한 애들은 일본 본토 대학감
애초에 일제시대 제대로 된 대학 나온 사람들은 대부분 일본인이었음
해방후 이들은 이 경력으로 한국의 각계각층 고위층을 차지함
이승만이 못배워먹은 조선인이 아니라 당시 엘리트였던 이들을 적극 기용했고
군 고위공무원 교수 경찰 사업가 사학재단....
이들은 혼맥으로 자기들끼리 단단하게 연결돼있음
뉴라이트가 박정희보다 오히려 이승만을 국부로 찬양하는 이유
강약약강의 일본인 특성답게 이들은 군부독재 시절에는 바싹 엎드려 충성하며 기득권을 유지했음 민주정권으로 바뀌자 일본 극우세력과 연계해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고 기어이 정권을 탈환함 이명박 박근혜 윤석열로 이어지는 뉴라이트 정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