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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 ‘성관계 요구’ 성희롱 당한 직원, 왜 국방과학연 징계위서 ‘창밖 투신’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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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03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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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조직을 믿었다. 국방과학연구소는 방산 분야를 전공한 ㄱ(30대 후반)씨에겐 꿈의 직장이었다. 지난달 4일 오후 사무실에서 “징계위원회에 참석해달라”는 연락을 받았을 때도 그는 ‘내 의견을 듣기 위해서겠지’라고 생각했다. 1시간 뒤 창밖으로 몸을 던지게 될 줄은 예감조차 못 했다.

지난여름 ㄱ씨는 같은 팀에서 일하는 선배 ㄴ씨(40대 후반)에 대한 고충처리를 신청했다. ㄱ씨는 고충처리위원회에 “지난 8월 출장지 숙소에서 ㄴ씨가 ‘한번 자자’며 성관계를 요구해 도망친 일이 벌어진 뒤 회사·일상 생활에서 스트레스로 인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내용의 진술서와 관련 자료를 제출했고, 고충위는 ㄴ씨의 ‘성희롱’을 인정하며 ‘경징계와 민군협력진흥원(민진원) 전보’ 의견으로 사안을 징계위로 넘겼다. 본원처럼 대전 유성구에 있는 민진원에 ㄴ씨가 있으면 마주칠 가능성이 있어 걱정됐지만, ㄱ씨는 “더는 다른 동료들에게 폐 끼치고 싶지 않아” 고충처리 결과를 받아들인 상태였다.

‘잠깐이면 되겠지.’

사무실 책상에서 일어서며 ㄱ씨는 생각했다. 징계위 담당자는 ㄱ씨에게 “징계위원들이 ㄱ씨가 징계위에 참석할 수 있을지 확인해달라고 했다”고만 설명한 터였다. 징계위 방문을 열었을 때 위원장 1명(내부위원)과 위원 4명(내부위원 1명, 변호사·노무사 등 외부위원 3명)이 앉아 있었다. 모두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구도와 분위기가 꼭 ‘입사 면접장’ 같았다.


한겨레는 지난달 27일 대전의 한 병원에서 ㄱ씨와 그의 가족을 만났다. 약 1시간20분 동안의 인터뷰 내내 ㄱ씨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담담했으나, 단호했다. 지난달 7일 ‘국방과학연구소 직원 투신’을 알린 첫 보도 뒤에도 모든 언론과의 접촉을 피해온 그였다.

“왜 ㄴ씨 아내에게 언니라는 단어를 사용했냐?”

병상에서 겨우 몸을 일으켜 앉은 ㄱ씨는 징계위의 첫 질문에 대해 이렇게 기억했다. 한 여성 징계위원이 이렇게 묻자 ㄱ씨는 “어떤 호칭으로 불러야 하는지 몰랐다. 옷가게에 가도 나이와 상관없이 그냥 언니라고 부르지 않나. 그 정도 의미였다”고 답했다. ㄴ씨와 대화에서 3인칭으로 그의 아내를 ‘언니’라고 표현한 것을 문제 삼는 것 같았다. 남자가 절대적으로 많은 조직에서 다른 선배들의 아내도 ‘언니’라고 지칭하고 있었기 때문에 ㄱ씨는 ‘왜 이런 걸 묻지?’ 어리둥절했다. 그 위원은 다시 ㄱ씨에게 “(방에서 나가달라고 요청하면서) 왜 ‘상간녀’란 단어를 언급했냐?”고 물었다. 8월 성희롱 사건 당시 ㄴ씨의 성관계 요구를 거절하며 “나는 상간녀라는 오해를 받고 싶지 않다”며 말했다. 같은 팀이라 매일 만나는 선배의 요구를 완곡하게 거절하며 쓴 표현이 빌미가 될지 몰랐다.

이어 징계위원장은 “우울증 약을 먹고 있는데, 혹시 환청이나 환각을 느끼기도 하느냐”고 ㄱ씨에 물었다. ㄱ씨는 오래 고생한 신경성 소화장애 증상 때문에 소량의 우울증 약을 처방받아 먹고 있었는데, 그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이어 다른 징계위원은 “ㄴ씨와 단둘이 시간을 보낸 적이 있냐”며 8월 사건이 있기 전 두 사람이 언제·어디서 밥을 먹었는지 쭉 읊었다고 한다. 위원들끼리 “각별한 사이가 맞네”라며 수군대는 소리가 ㄱ씨에게 그대로 들렸다. 병상에 누워 “ 같은 프로젝트를 했기 때문에 함께 출장을 가는 상황도 있었고, 개방된 공간에서 밥을 먹은 적도 당연히 있다. 공대를 나왔고, 남자가 많은 조직에서 지내다 보면 자연스럽게 남녀 구분이 없어진다. 남자 아닌 동료인데, 상사에게 남자랑은 ‘같이 밥을 못 먹겠다’거나 ‘출장을 못 가겠다’고 할 순 없지 않나. 동료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직장 생활을 한 것뿐인데 그게 빌미가 될지 몰랐다”라고 말하는 ㄱ씨의 목소리가 떨렸다.

충격이 컸지만 ㄱ씨는 끝까지 정신을 붙잡고 징계위원들 질문에 성실히 답하려 했다. 그러나 “제대로 답변할 틈도 없이 계속 질문이 쏟아지는” 상황이 40∼50분 동안 이어졌다고 한다. 결국 ㄱ씨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자 징계위원장은 “방해되니 ㄱ씨를 퇴장시키라”고 했고, ㄱ씨가 “계속 남아 질의에 답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는데도 내보냈다고 한다. 쫓겨나듯 그 방을 나가며 ㄱ씨는 징계위원들을 향해 “국방과학연구소가 날 지켜주지 않으면 나도 날 지키지 않겠다”고 말했다.

얼마 뒤 ㄱ씨는 징계위가 열린 건물 아래서 쓰러진 채 발견됐다. 맞은편 방 창을 통해 5m 아래로 투신한 지 약 15분 만에 지나가던 사람에 의해 발견된 것이다. “징계위가 끝나지 않았으니 기다려달라”는 말을 듣고 대기하던 중 벌어진 일이었다. 의식을 잃기 직전까지 ㄱ씨는 “제발 부모님에겐 알리지 말아달라”고 사정했다고 한다. ‘너무 속상해하고 걱정하실까 봐’ 8월 사건 뒤 병가를 낸 사실조차 부모님에겐 숨긴 채 홀로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방을 나오며 저는 지탱하던 얇은 끈이 뚝 끊어지는 것 같았어요. 내가 조직에 원한 건 성희롱 피해에서 벗어날 합리적인 조처뿐이었는데, 왜 내가 ‘꽃뱀’처럼 몰려야 하는지 순간 너무 분하고 억울했어요.”

ㄱ씨는 척추, 골반뼈, 손목·발목 골절 등으로 4차례 수술을 받고 입원 치료 중이고, 5차 수술을 앞두고 있다. ㄱ씨 가족으로부터 고소장을 접수한 대전 유성경찰서는 ㄴ씨(성폭력 혐의)와 징계위원들(모욕·명예훼손), 징계위 담당자(증거인멸) 등을 수사하고 있다. 이 사건과 관련해 국방과학연구소는 한겨레에 문자로 “이번 사고는 외부 전문가가 참여한 징계위 심의 과정에서 발생했다. 경찰 수사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수사 결과에 따라 엄중히 조치하겠다”고 입장을 밝혔다.

최예린 기자 floye@hani.co.kr


기사원문

https://n.news.naver.com/article/028/0002719103?sid=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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